제81화
에탄은 아린이와 뇽뇽이를 보내고 나서도 연회장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세상에. 에탄 도련님 모습이 정말 많이 바뀌었군요.”
“근육도 생기고…훨씬 잘생겨지셨습니다.”
“나중에 저희 딸이랑 한번 만나보시죠.”
그리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모두 놀람을 선물해줬다. 한 명도 예외 없이 말이다.
‘놀랄 만도 하지.’
하나. 에탄은 그걸 불쾌하게 여기지도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많이 변했다는 사실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으니까.
“단순히 살만 뺀 게 아닙니다. 에탄은 이제 칼라사르 가문을 위해 일하는 훌륭한 후계자가 됐습니다.”
다만. 이런 에탄도 한가지 부담스럽게 느끼는 게 있었으니.
“그리고 북부에 악마 숭배자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들었습니다.”
“그 악마숭배자들을 처리한 게 바로 이 녀석입니다.”
“허어!”
옆에서 에탄의 업적(?)을 소개하는 지오반의 자랑이었다.
“아주 훌륭한 검기로 마물들을 배어버리더군요. 기사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
지오반의 말에 에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아버지. 제발 적당히…!’
다 좋았다.
그래. 이해도 할 수 있었다.
그동안 망나니처럼 지냈던 아들이 확 변했으니.
동네방네 자랑을 하고 싶은 게 당연하다고 에탄은 생각했다.
“심지어 빌헬름의 검도 막아냈으니! 앞으로 대륙을 이끌어갈 큰 인재가 될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 그것도 적당히가 있는 법인데. 지오반은 에탄이 생각하는 ‘선’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호오. 그거 참 흥미롭군요.”
“그렇게 까지 성장을 했다니….”
“이거. 이제는 칼라사르 가문을 예의주시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부끄러움은 오직 에탄만 느끼고 있었다. 지오반이 생각보다 말을 재밌게 하는 덕분에 듣는 귀족들은 재미를 느꼈다.
“야. 저 자식 귀가 빨개졌는데?”
“도련님이 칭찬에 부끄러움을 느끼시는 거 같습니다.”
“보기 드문 광경이라서 재밌군요.”
심지어는 뒤에서 따라다니는 세 사람도 피식 웃을 정도니.
할 말 다 한 거나 마찬가지리라.
‘제발 이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물론. 당사자인 에탄은 당장이라도 도망을 치고 싶었다. 만약 그가 순간이동 마법을 발동할 수 있었다면, 진지하게 그 수단을 고려했으리라.
“아버지.”
하지만 그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 조금만 자제를 해달라고 말하려는 순간.
“이봐. 저기 애들이 결투를 연다는데?”
뒤쪽에서 한 귀족의 말이 에탄의 귀에 들려왔다.
“이야. 검도 들었네.”
“연회가 아직 시작도 안됐는데 화끈하구만!”
그리고 이어지는 다른 귀족들의 말에.
획!
에탄이 고개를 뒤쪽으로 돌렸다.
“…아린아?”
그 후 눈앞에 벌어진 풍경을 보고 경악했다.
“자. 얼른 덤벼.”
아린이가 잔뜩 성이난 표정으로 검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아린이와 스텐이 서로를 마주봤다.
“각오는 되어 있겠죠?”
“물론이지.”
두 사람 모두 연회장에 어울리는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두 명의 손에는 연회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게 들려 있었다.
쓰릉!
상대방을 벨 수 있는 날카로운 검이었다.
“오오!”
“정말로 진검을 들었군.”
“이거 말리지 않아도 되는 건가?”
다른 귀족들이 그걸 보고는 자기들기리 대화를 나눴다. 결투를 하는 두 사람 모두 어린아이였으니 걱정을 하는 게 당연했다.
“자. 얼른 덤벼.”
하지만 아린이는 주변 시선을 전혀 신경쓰지 않았다. 아린이에게 검을 다루는건 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수준이었으니까.
“좋아요.”
그건 스텐또한 마찬가지였기에.
그녀도 검을 휘두르는데 망설임을 전혀 가지지 않았다.
“….”
“….”
그래서 아무말 없이 각자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쓰윽.
탁!
타악!
서로에게 달려들었다.
자신의 승리를 챙취 하기 위해 말이다.
* * *
스텐은 생각했다.
‘굴욕적인 패배를 맛보게 해주겠어.’
이번 대련을 통해서 자신의 수준을 톡톡히 보이겠다고.
‘명성을 챙기면서 결투에서 승리까지. 완벽한 계획이야.’
스텐의 원래 계획은 이게 아니었다.
일을 크게 키울 생각은 없었다.
자신한테 이득이 되는게 없을거라 생각했으니까.
‘바보네요.’
하지만 아린이가 알아서 결투를 신청하면서 판을 키웠으니. 스텐의 입장에서는 휴지도 안쓰고 코를 푸는겪이었다.
‘일단 가볍게…’
그래서 이 결투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이 볼수 있게 할 생각이었다.
아린이가 처절하게 무너지는 모습을 많은 사람에게 보이고 싶었으니까.
탁!
스텐이 아린이를 향해 두 발을 내달렸다. 동시에 오른손에 쥐고 있는 검을 사선으로 휘둘렀다.
평범한 5살 어린아이가 겨우 막아낼 수 있는 수준으로 말이다.
“…….”
아린이가 그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스텐이 아린이의 표정 변화에 미소를 지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어’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스르륵.
스텐이 원하던 그림은 벌어지지 않았다. 아린이가 스텐의 공격을 물 흐르듯 피해버렸으니까.
“최선을 다하세요.”
그러면서 역으로 스텐의 품으로 파고 들고는.
훙!
아래에서 위로 검을 힘껏 움직였다.
스텐의 턱을 베어버릴 기세로.
“!”
그 순간 스텐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예상했던 수준을 훨씬 웃도는 아린이의 움직임에 놀란 거였다.
까앙!
검과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오오…!”
그 순간 아린이와 스텐을 지켜보던 귀족들 사이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저. 아이 실력이 장난 아닌데?”
“칼라사르 가문의 딸이라고 하더군.”
“딸이라고? 그 가문에 또 다른 자식이 있을 줄이야.”
그리고 모두의 이목이 순식간에 아린이에게 집중됐다.
‘무슨…!’
스텐이 그걸 깨닫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이래서는 안 됐다. 이번 결투에서 주목을 받는 건 자신이어야만 했다. 그게 스텐이 원하는 그림이었으니까.
“집중하세요.”
그때. 가라앉은 아린이의 목소리가 스텐의 귓가에 들려왔다.
쐐애앳!
이어서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크윽!”
다시 한번 아린의 공격이 이어졌다.
깡! 까앙!
병장기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하지만 흘러가는 상황은 비등하지 않았다.
“세상에. 스텐이 밀리고 있군.”
“칼라사르 가문에 저정도로 수준 높은 천재가 있을 줄이야.”
아린이가 몰아붙이고.
스텐이 겨우 막아낸다.
누가 봐도 아린이의 우위가 명백한 상황이었다.
“이익!”
스텐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면서 모든 신경을 아린이에게 집중했다. 더 이상 녀석을 봐주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만만치 않은 상대다…!’
그럴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탁!
그래서 반격을 시도하기 위해, 자세를 다잡으려고 했지만.
퍼억!
“아악!”
아린이가 그걸 두고 볼 리가 만무했다.
“결투에서 검만 쓰라는 법은 없죠.”
아린이가 주먹으로 스텐의 배를 가격했다.
철퍼덕!
그러자 스텐이 앞으로 엎어졌다.
배를 가격 당하면서 몸에 있는 힘이 완전히 빠져 버린 거였다.
“…….”
아린이가 그러 스텐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하지만 10초가 지나고 15초가 지나도 스텐은 일어나지 못했다.
쓰릉!
그렇게 20초가 흘렀을 때 아린이는 검을 다시 집어 넣었다.
“결투는 제 승리네요.”
그 후 스텐에게 자신이 이겼다고 말하고. 몸을 뒤로 돌리는 순간.
“누가. 누가 이겼다는 거야!”
스텐이 소리를 버럭 내질렀다.
동시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아린이를 찌르기 위해 몸을 내던졌지만.
퍼억!
“더 이상의 움직임은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옆에서 지켜보던 포이른이 그걸 제제했다. 검집으로 스텐의 어깨를 때리는걸로 말이다.
“끄윽….”
포이른의 제지에 스텐이 몸을 좌우로 비틀 거렸다. 그러다가 다시 한번 앞으로 쓰러졌다.
하지만 이번에는 미세한 미동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기절을 해버렸으니까.
“끝까지 비겁하네요.”
아린이 그런 스텐을 빤히 쳐다보면서 혀를 찼다. 승부를 인정하지 않는 그녀의 추한 모습에 실망한 거였다.
탁.
그래서 조용히 인파를 빠져나가려는 순간.
“아린아.”
에탄이 결투를 구경하던 귀족들 사이에서 얼굴을 드러냈다.
“아빠….”
그러자 아린이의 얼굴이 굳어졌다.
연회장에서 이렇게 사고를 쳤으니.
‘혼나겠지.’
에탄이 분명 자기에게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터벅. 터벅.
그래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에탄을 보고, 아린이는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에탄이 잔뜩 실망한 채 자기를 쳐다볼 거 같아서 시선도 땅으로 회피했다.
쓰윽.
그런데.
“잘했다!”
이런 아린이의 예상과는 다르게.
에탄은 아린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역시 내 딸이야.”
그리고 시선을 바닥으로 떨군 아린이를 쳐다보면서 씨익 미소를 지었다.
“…아빠?”
“이야기는 대충 포이른에게 들었다. 저 아이가 아빠랑 아린이를 모욕했다며.”
“네.”
“그래. 그러니까 저 녀석은 뚜들겨 맞아도 싸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내 속이 다 시원해지더라.”
에탄의 말에 아린이가 두눈을 꿈뻑였다.
“저를 혼내지 않는 거예요?”
자신이 생각했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런 걸로 아빠가 아린이를 혼낼 거 같니?”
아린이의 물음에 에탄이 오히려 되물었다.
“으음….”
그러자 아린이가 미간을 찌푸리고는 진지하게 생각해봤다.
“아니요.”
그리고 끝내 대답이 나왔다.
에탄은 이런 걸로 자신을 혼낼 사람이 아니라고 말이다.
씨익.
에탄이 그 말을 듣고는 흡족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빠는 오히려 아린이가 대견하다.”
그러면서 아린이를 다시 한번 칭찬하고는.
“그렇지 않습니까?”
결투를 구경하던 다른 귀족들에게 물었다. 아린이가 자랑스럽지 않냐고 말이다.
“누군가 모욕을 하면 대가를 치르게 해야지.”
“그리고 저 아이는 그걸 훌륭하게 해냈군.”
그러자 귀족들 사이에서 아린이를 옹호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고.
짝… 짝짝!
누군가 박수를 쳤다.
짝짝짝!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사람들도 손뼉을 치고, 이내 박수 소리가 주변을 가득 채웠다. 아린이의 승리를 기념하듯이 말이다.
“…헤헤!”
그제서야 아린이의 얼굴에 환한 꽃이 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