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1화
에탄은 원래 보구를 얻자마자 왕국을 나갈 생각이었다. 그 과정에서 무언가를 더 가져갈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이 정도면 제법 큰 이득이지.’
둘째 형인 리든과 모헨 그리고 자신까지. 총 세 개의 보구를 케레니아 왕국에서 얻어 낸 게 그 이유였다.
“폐하께서 직접 작별 인사를 전하지 못해 이걸로 대체한다고 하셨습니다.”
하나 에탄조차 예상하지 못한 변수가 있었으니. 케레니아 왕국 국왕의 씀씀이였다.
“무조건 가져가셔야 한다고 강조했으니 거절은 거절하겠습니다.”
“그래도 안 가져가면?”
“제 목을 치겠다고 엄포를 놓으시고 떠나셨습니다.”
“…….”
심지어 에탄이 거절도 못 하게 대책까지 세워 둔 상태였다. 마치 에탄이 이렇게 행동할 줄 알았다는 듯 말이다.
“알겠어. 남 목을 떨어트리는 취미는 없으니까 가져갈게.”
이런 국왕의 술수(?)에, 에탄은 어쩔 수 없이 선물을 받아들였다.
“그런데 양이 좀 많은 거 같다?”
한데 문제가 있었다.
“이걸 다 들고 갈 수는 없을 거 같은데… 이거 어떡하나. 잘못하면 네 목이 날아가겠어.”
에탄이 들고 가기에는 상자의 개수가 너무 많았다. 마차 한 대로는 어림도 없을 정도로 말이다.
“아. 그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하지만 테이론은 에탄의 말에 당황하지 않았다. 이미 그 부분을 해결할 수단을 대기시켜 놨기 때문이다.
쓰윽.
테이론이 왕성 정문에서 오른편에 있는 마당으로 고개를 돌렸다.
“모두 나와라.”
그리고 누군가에게 명령하듯 입을 열었다.
척! 척! 척!
그러자 마당 안쪽에서 무장을 한 기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드르륵!
이어서 짐을 실을 수 있는 빈 수레들이 뒤따라 등장했다.
“…….”
에탄이 그걸 멍하니 바라봤다.
“폐하께서 내어 주신 선물을 호위할 기사와 마차입니다. 그러니 안심하시고 받으셔도 됩니다.”
그러자 테이론이 뿌듯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이건 조금 과한 거 같은데?”
“아닙니다. 악마 숭배자를 잡으셨는데 이 정도 대우는 당연히 받으셔야죠.”
그리고 에탄의 반문에 단호하게 답하고는.
“그러니 사양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저희가 다 준비했으니까요.”
에탄에게 아무 걱정하지 말라고 뒷말을 붙였다. 활짝 미소를 지으면서 말이다.
“…응. 그래. 알겠다.”
에탄이 테이론의 말에 결국 두 손을 들었다. 이렇게까지 선물을 준다고 하니, 제아무리 에탄이라고 해도 빠져나갈 구석이 없었다.
“짐을 실어라. 그리고 에탄 도련님을 목적지까지 호위하거라.”
“예!”
테이론도 그 사실을 알기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에게 마무리 명령을 내렸다.
‘이번에는 내가 한 방 먹었네.’
에탄이 그 광경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바라봤다. 하지만 당장 멈추게 할 명분도 없었기에.
“그럼 다음 만남을 기약하겠습니다.”
두 손 가득.
아니. 정확히 말하면 보석으로 꽉 찬 마차들과 함께 가문으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 * *
칼라사르 가문의 영지로 들어올 수 있는 다리. 지오반은 에탄이 떠난 날부터, 매일 같이 이곳을 찾아왔다.
“여전히 도련님을 기다리시는 겁니까?”
하지만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빌헬름이 지오반을 뒤따라 왔기 때문이다.
“…그냥 산책하는 것이다.”
“그 누가 산책을 새벽부터 합니까.”
“크흠.”
지오반이 빌헬름의 반박에 가볍게 기침했다. 대답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기침으로 무마한 거였다.
“심지어 아직 해도 안 떴습니다. 가주님.”
하지만 빌헬름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갔다.
달이 뜬 시간에 매일 같이 산책하는 사람은 없을 거라고 말이다.
“그래서. 날 따라온 이유가 뭐냐.”
지오반이 그 말을 듣고는 입을 열었다. 계속 입을 다물고 있으면 빌헬름의 잔소리가 끝나지 않을 거 같았으니까.
“이제는 슬슬 도련님을 믿으셔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지오반은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믿는다고 대답하지는 않으시겠죠. 그랬다면 이런 번거로운 행동을 하지도 않으실 테니까요.”
빌헬름의 말이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녀석은 아직 어리다.”
“가주님. 그 누구도 성인식을 치른 자를 아이 취급하지 않습니다.”
“원래 부모는 자식이 아무리 커도 애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흐음….”
빌헬름이 지오반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제 눈에는 아이가 아니라 한 마리의 맹수 같았습니다만….”
에탄과 대련을 한 그로서는,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대답이었다.
“대련을 할 때 도련님이 내뿜던 살기. 그건 절대 귀한 취급을 받으면서 자란 이들이 보일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빌헬름이 에탄과 검을 맞대면서 놀란 점이 여럿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하나를 꼽자면.
“눈빛이 정말 아름답더군요.”
어떻게든 자신을 이겨 먹겠다는 집념 가득한 눈동자. 빌헬름은 그걸 에탄의 제일 큰 변화로 여겼다.
“그래. 확실히 죽어 있던 동태 눈이 아니더군.”
지오반이 빌헬름의 말에 덤덤히 답했다.
“하지만 이해할 수가 없다. 도대체 무엇이 그 녀석을 완전히 바꿔 버렸는지 말이다.”
허나 말처럼 이해할 수 없었다.
지오반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급격한 변화였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건 지오반과 오랜 시간 함께한 빌헬름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도련님은 확실히 변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인정을 하는 게 맞는 거라 생각됩니다.”
“음….”
빌헬름의 설득에 지오반이 눈을 감았다. 그러면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 에탄은 변했다.’
“…어? 어어?”
자신이 에탄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흘러가는 물을 받아들여야…….’
“어어어? 어어어어어?”
‘…….’
하지만 지오반의 상념은 얼마 가지도 못했다.
“빌헬름. 왜 자꾸 이상한 소리를….”
빌헬름이 뒤에서 어벙한 소리를 내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한마디 하려고 눈을 뜨는 순간.
“…음?”
지오반은 자신의 두 눈을 의심했다.
“저거.”
“에탄 도련님입니다. 사람한테 저거라고 하시면 남들이 오해합니다.”
“…….”
그리고 빌헬름의 대답에 넋 놓은 표정을 지었다.
“빌헬름.”
“예.”
“혹시 에탄에게 숨겨진 돈 같은 게 있었나?”
하지만 빌헬름은 지오반의 얼굴을 보고 놀리지 않았다.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지. 있을 리가 없는데.”
가문을 나갈 때는 가문의 문양도 없는 마차 한 대만 끌고 나갔던 에탄이.
“그런데 저 긴 행렬은 뭐지?”
이제는 짐이 꽉 찬 마차들을 데리고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깃발은 또 뭐고?”
거기에 한술 더 떠서, 케레니아 왕국 국기를 들고 움직이는 무수히 많은 기사들까지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
“…….”
빌헬름과 지오반은 서로를 멍하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그래서 케레니아 왕국의 국왕이 조만간 가문을 방문한다고 했습니다.”
“…제법 많은 일이 있었구나.”
에탄은 가문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주실로 불려 갔다. 그 후 지오반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을 상세히 설명했다.
“다행이구나. 나는 네가 또 큰 사고를 친 줄 알았다.”
그제서야 지오반은 안도했다.
자신의 예상과는 다르게 꽤나 긍정적인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큰 사고라 하심은.”
“예를 들자면 국왕의 딸을 납치해 왔다거나 그 왕국에서 또 다른 자식을 데려온다는 등의 일이 있겠지.”
“…….”
에탄이 지오반의 말에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차마 저기에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냐고 답할 수가 없었다.
이미 아린이와 뇽뇽이라는 전적이 있으니까.
‘오랜만에 억울해지네.’
물론 아린이와 뇽뇽이도 엄밀히 따지면 에탄이 데려온 게 아니다. 환생을 해 보니 아린이가 딸이 되어 있었고, 그 딸이 데려온 알이 부화해서 인간이 된 거니까.
즉, 꼬리에 꼬리가 물려 이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걸 다 설명하려고 했다가는, 다른 의미로 이상한 녀석 취급이나 받겠지.’
억울해도 어쩔 수 없다.
환생했다고 말하는 선택지는 고르지도 못하니까.
“그래서 이제는 무엇을 할 생각이냐?”
그때. 지오반이 에탄을 향해 다음 질문을 던졌다.
“일단 제가 가져온 보구를 자세히 조사해 볼 생각입니다.”
에탄이 지오반의 물음에 입고 있는 갑옷을 손으로 가리켰다. 겉으로 보기에는 평범한 녀석이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 이게 아서왕의 갑옷이라는걸.’
하지만 실상은 그 어떤 갑옷이 와도, 이름조차 내밀지 못할 정도로 엄청난 놈인 걸 에탄은 알고 있으니.
“분명 무언가 있을 겁니다.”
이 보구를 무조건 조사할 생각이었다.
“흐음….”
지오반이 에탄의 대답을 듣고 갑옷을 향해 눈길을 돌렸다.
“그 갑옷이 그렇게 대단하다는 건가.”
그리고 의문에 가득 찬 눈빛으로 갑옷을 살펴봤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그만한 가치가 없는 거 같았다.
“알겠다. 조사를 하는 데 필요한 게 있다면 말하거라. 최대한으로 지원을 해 주겠다.”
하나 에탄의 결심을 바꾸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하는 게 있다면 도와주겠다고 말했다.
“반대 안 하시는 겁니까?”
에탄이 그 대답을 듣고 두 눈을 끔뻑였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 생각이 있어서 하는 거 아니냐?”
“맞기는 합니다.”
“그럼 됐다.”
지오반이 에탄의 대답에 문제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나는 이제 널 믿어 보기로 했다.”
자신의 변화된 심정을 솔직히 말하고는.
“이만 나가 보거라. 해야 할 일이 많다.”
터억!
책상에 있는 서류 뭉텅이를 책상 한가운데로 끌어왔다. 이어서 펜을 집어 들고는 업무를 보기 시작했다.
씨익.
에탄이 그걸 보고 얕게 입꼬리를 올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자신을 위한다는 마음이 느껴졌기에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하나 굳이 그 점을 언급하지는 않았다. 그러면 괜한 소리만 들을 게 뻔하니 말이다.
그래서 에탄은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하고 조용히 가주실을 빠져나갔다.
“…후우.”
그제서야 지오반이 움직임을 멈추고는, 에탄이 나가면서 닫은 방문을 빤히 바라보며.
“칭찬은 역시 나랑 안 맞는군.”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이번에는 그동안의 한숨과는 다른 느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