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0화
“그 아이를 넘겨라. 그러면 너를 포함한 나머지 애들은 살려 주마.”
우두머리 산적이 할린첸에게 뇽뇽이를 넘기라고 제안했다. 그 순간 어린아이들이 할린첸을 바라봤다.
“…….”
할린첸이 녀석들의 시선을 느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면서 잔인한 상황이라 생각했다.
자신의 선택에 따라서 아이들의 목숨이 좌지우지 되는 거니까.
“나는….”
그래서 깊은 고뇌에 빠지려는 찰나.
“언니. 저는 죽어도 괜찮아요.”
한 아이가 할린첸을 향해 싱긋 웃었다.
“어차피 저희는 팔려 나갈 운명이었잖아요. 그런데 저 친구가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 준 거고… 그러니까 저는 괜찮아요.”
그리고 할린첸이 저 제안을 거부해도 상관없다고 뒷말을 붙였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괜찮아요.”
“마음이 가는 대로 하세요.”
그 순간, 주변에 있던 다른 아이들도 한마디씩 입을 열었다. 자기들은 모두 이곳에서 죽어도 괜찮다고. 그러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말이다.
“애들아….”
할린첸이 아이들의 말에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죽음을 태연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모습이 너무 서글펐으니까.
“…제안은 거절하겠어.”
그래서 놈에게 뇽뇽이를 넘겨줄 수가 없었다.
“호오. 어째서지?”
“어차피 거짓말일 테니까.”
우두머리 산적의 물음에 할린첸이 두 눈을 부릅떴다. 그 후 녀석을 죽일 듯이 노려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그게 설령 진실이라고 해도. 이런 식으로 구차하게 살고 싶지는 않아. 난 당신들과 같은 쓰레기가 아니니까.”
“…….”
할린첸의 말에 우두머리 산적의 얼굴이 구겨졌다. 자신이 원했던 상황과는 반대되는 그림이 펼쳐졌으니까.
“재미 없구만. 나는 이렇게 눈물겨운 광경을 기대한 게 아니었는데.”
놈이 툴툴거리면서 말을 끝냈다.
그 후 주변에 있는 다른 산적들을 쳐다보면서.
“잠들어 있는 녀석 빼고 다 죽여.”
뇽뇽이를 제외한 나머지를 살해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
산적들이 그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답했다. 그 후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향해 서서히 다가왔다.
“언니….”
아이들이 조금씩 다가오는 산적들을 피해 할린첸에게 모였다. 할린첸이 자신에게 의지하는 아이들을 보고 입술을 깨물었다.
“제발…제발 도와주세요!”
그리고 마지막 발악을 하듯 소리를 내질렀다.
“하!”
그러자 한 산적이 할린첸의 말에 피식 웃었다.
“네 녀석은 제일 나중에 죽여 주마. 아이들이 먼저 죽어 가는 걸 보고 멍청한 선택을 한 걸 (뼈저리게 후회해라.”
그리고.
“죽어!”
가장 앞에 있는 3살짜리 아이에게 도끼를 휘두르는 순간.
쉐에에에엣!
콰직!
“으아악!”
날카로운 단검 하나가 놈의 팔을 꿰뚫었다.
“멍청한 선택이라….”
이어서 중후한 노인의 목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산적들이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으로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과연 누가 멍청한지 이참에 알려 주면 되겠군요.”
분노에 가득 찬 세바스찬이 서 있었다.
* * *
에탄은 세바스찬과 아린이를 데리고 수색을 시작했다.
“기운이 여기서 끊겼어요.”
그리고 3시간이 지났을 때 뇽뇽이가 잡혀 있던 산채를 발견했다.
“도련님. 발자국이 있습니다.”
“…그래. 나도 보여.”
이미 불타 버린 산채였지만 성과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곳곳에 거대한 불덩어리와 산적들의 시체.
거기에 어린아이들의 발자국까지.
“시간이 별로 없다.”
세 사람은 그걸 통해,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세바스찬이 발자국을 보고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동시에 녀석들의 흔적을 쫒아가겠다고 말했다.
“알겠다.”
에탄이 그 말에 덤덤히 답했다.
세바스찬의 추적 능력은 뛰어난 편에 속한다. 그러니 그에게 맡기는 게 더 좋으리라.
‘게다가… 죄책감도 느끼고 있겠지.’
게다가 이번 일에 자신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할 테니. 스스로 일을 해결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하리라.
그래야 세바스찬의 마음이 조금은 편안해질 테니까.
쓰윽.
세바스찬이 할린첸과 아이들이 도망친 숲 쪽을 바라봤다.
탁!
이어서 녀석들이 남긴 흔적을 따라 거침없이 발을 내달렸다.
“아린아. 우리도 가자.”
“네.”
에탄이 그걸 확인하고는, 아린이와 함께 세바스찬의 뒤를 바짝 쫓았다.
그리고 현장에 도착하는 순간.
“…제안은 거절하겠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뇽뇽이를 지키려는 할린첸의 모습을 목격했다.
* * *
우두머리 산적 빌런.
그는 갑자기 나타난 세바스찬을 보고 눈썹을 찡그렸다.
‘뭐지?’
첫 번째 이유는 기껏 올린 흥이 깨진 것에 대한 불쾌감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요인이 존재했다.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세바스찬이 이곳에 오기까지, 누구도 그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점. 그게 빌런의 얼굴을 찡그리게 하는 데 제일 크게 이바지를 했다.
“네 녀석… 누구냐.”
빌런이 세바스찬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상대는 고작 단검 하나로, 자신의 부하를 가뿐하게 제압한 강자다.
“혹시 다른 산채에서 온 녀석이냐?”
그렇기에 빌런은 세바스찬에게 무턱대고 달려들지 않았다.
“아이들을 원한다면 데려가라. 우리의 목표는 잠들어 있는 저 작은 꼬맹이니까.”
오히려 자신이 잡은 인질을 내주겠다고 했다.
“제가 산적처럼 보입니까?”
세바스찬이 빌런의 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자신이 입은 집사복을 눈으로 가리켰다.
“…집사?”
그제서야 빌런은 세바스찬이 집사라는 걸 깨달았다.
“예. 저는 칼라사르 가문의 집사입니다.”
“칼라사르 가문? 그쪽이 여기는 무슨 볼일로 온 거지?”
“그것까지 알려드릴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빌런의 물음에 세바스찬이 고개를 저었다. 그 후 품속에서 두 개의 흰 장갑을 꺼냈다.
쓰윽.
그리고 그걸 손에 끼우면서.
“어차피 당신들은 모두 노역장으로 끌려갈 테니까요.”
이들을 향해 한없이 차분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죽여!”
빌런이 세바스찬의 말에 몸을 움찔했다. 동시에 수하들에게 놈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으아아!”
그러자 열댓 명의 산적들이 세바스찬을 향해 달려들었다.
“흐음.”
세바스찬이 괴성을 내지르는 녀석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수적으로 우위에 있다는 요인 때문일까, 놈들의 눈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직 보이지 않았다.
탁.
그래서 세바스찬은 이들에게 알려 주기로 했다. 칼라사르 가문의 사람을 건들면 어떻게 되는지를.
짤그락.
세바스찬이 품속에서 작은 단검을 꺼냈다. 하지만 처음에 던졌던 녀석과는 다르게 손잡이에 쇠사슬이 걸려 있었다.
“죽이지는 않겠습니다. 산 채로 생포하라는 도련님의 말씀이 있었으니까요.”
세바스찬이 오른손으로 쇠사슬을 쥐어 잡았다. 그러면서 에탄이 말했던 명령을 상기하고는.
후웅!
녀석들을 향해 단검을 있는 힘껏 던졌다. 그리고 쇠사슬을 이용해 단검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힘껏 움직였다.
…서걱!
그러자 종이가 썰리는 소리가 숲에 울려 퍼졌다.
“끄얽….”
“컥!”
이어서 산적들의 목에서 피가 뿜어져 나왔다. 하지만 놈들 중에 죽은 녀석은 없었다.
생포하라는 에탄의 명령이 있었으니까.
“무…무슨!”
빌런이 쓰러진 부하들을 보고 경악했다. 놈들은 아직 죽지 않았다. 하지만 전투를 이어 나갈 수는 없었다.
목에서 뿜어져 나오는 피를 손으로 틀어막아야 했으니까.
‘승산이 없다.’
빌런은 그걸 보고 깨달았다.
자신은 단검을 휘두르는 저 노인을 이길 수 없다는 걸.
타탁!
“꺄악!”
“가까이 오지 마. 다가오면 이 아이를 죽여 버리겠다!”
그래서 빌런은 방법을 바꾸기로 했다. 할린첸과 뇽뇽이의 목숨을 가지고 거래를 하는 걸로 말이다.
“…….”
세바스찬이 빌런의 협박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빌런을 빤히 바라봤다.
“그래. 얌전히 내 말을 들어야….”
“당신은 바보입니까?”
그리고 빌런을 향해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마디를 툭 던졌다.
“뭐? 그게 무-”
빌런이 그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동시에 무슨 말이냐고 반문하려는 순간.
우두둑!
빌런의 양쪽 갈비뼈가 완전히 박살 났다.
“잘했어. 아린아.”
“네. 아빠!”
동시에 에탄과 아린이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걸 끝으로, 빌런은 정신을 잃어버렸다.
* * *
에탄이 거품을 문 채 기절한 빌런을 쳐다봤다. 마음 같으면 이 자리에서 목을 베고 싶었다.
‘하지만… 편안하게 보내 줄 수는 없지.’
그러나 에탄은 알고 있었다.
이들을 고통 없이 죽이는 쪽보다, 노예로 팔아 버리는 게 더 끔찍한 운명이라는 걸 말이다.
게다가 이곳에는 다른 어린아이들도 있으니, 구태여 살인을 하고 싶지 않았다.
“누구… 세요?”
그때. 할린첸이 에탄을 향해 조심스럽게 질문을 건넸다. 아직 조금의 경계심이 남아 있는 말투였다.
“칼라사르 가문의 막내 아들이다.”
에탄이 할린첸의 물음에 간결하게 답했다. 그 후 품속에 있는 뇽뇽이를 보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 녀석의 보호자이기도 하지.”
“음….”
할린첸이 에탄의 말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이걸 믿어도 되는 건가 싶었기 때문이다.
“뇽뇽아!”
그래서 어찌해야 하나 고민에 빠지려는 찰나. 아린이가 할린첸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갔다.
“하아….”
그리고 할린첸의 품속에 있는 뇽뇽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사고만 치고 다니고.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썽을 부리는 거야?”
아린이가 뇽뇽이를 향해 쏘아붙이듯이 말했다. 이어서 녀석의 이마에 손을 대는 순간.
“으음….”
뇽뇽이가 몸을 뒤척였다.
동시에 감겨 있던 녀석의 눈이 떠졌다.
“아린이!”
그 순간 뇽뇽이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아린이가 눈앞에 떡하니 나타났으니 당연한 거였다.
폴짝!
뇽뇽이가 할린첸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그 후 바닥에 사뿐히 착치하고는 아린이에게 꼬옥 안겼다.
“아….”
할린첸이 그 모습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뇽뇽이를 지켜 줄 사람이 왔으니.
이제는 신경을 곤두세울 필요가 없으리라.
비틀… 비틀.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할린첸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그동안 쌓여 있던 긴장감이 순식간에 사라졌기 때문에.
쿵.
이번에는 할린첸이 기절을 하고 말았다.
“그래. 푹 쉬고 있어라.”
에탄이 잠에 빠진 할린첸을 보고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세바스찬.”
그리고 뒤쪽에 서 있는 세바스찬을 향해.
“너에게 말해 줄 게 있다. 그러니 잠깐 따라와라.”
뇽뇽이의 비밀을 말해 주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