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6화
에탄은 페르메를 죽이고 베르사르 가문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밤새 많은 생각에 빠졌었다.
‘테이벤의 처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
그중에는 당연히 테이벤도 들어가 있었다. 사실. 에탄이 마음만 먹는다면 녀석은 가문에서 쫓겨나리라.
마족의 유혹에 넘어가서 자신에게 검을 겨누었으니까.
‘하지만 북부 통합에는 최대한 많은 사람이 필요하다. 비록 전생에는 원수였다고 해도 말이지.’
그러나 에탄은 그게 썩 좋은 선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악연이기는 하지만, 테이벤도 어느 정도 실력은 있는 놈이니까.
‘나오는 태도를 보고 결정해야겠군.’
그래서 에탄은 두 가지 선택지를 준비했다. 하나는 테이벤이 반성을 했을 때의 경우였고.
‘만약 여전히 멍청한 짓을 하려고 하면….’
나머지 하나는 그렇지 않았을 때의 경우였다.
그리고 테이벤이 후자를 선택하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놈을 죽인다.’
에탄은 다시 한번 검을 드는 걸 마다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렇게 밤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을 때.
“에탄. 미안하다. 내가 죽을죄를 지었다.”
정신을 찾은 테이벤이 에탄에게 무릎을 꿇었다.
* * *
에탄이 테이벤을 차가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일말의 감정도 들어가 있지 않은 눈동자로 말이다.
움찔.
테이벤이 그걸 보고는 몸을 떨었다. 자신의 영혼이 에탄에게 꿰뚫리는 기분이었다.
아니. 단순히 그렇게 느껴지는 착각이 아닐 것이다.
에탄은 이미 죽음을 한 번 경험했으니까. 그러니 사람의 본질을 꿰뚫어 보는 것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
덕분에 테이벤은 자신이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얼굴을 손으로 가리고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게 얼마나 한심한지 테이벤도 알고 있었으니까.
“저리 비켜.”
에탄이 고개를 조아린 테이벤을 보고 덤덤하게 답했다. 그 후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방을 빠져나가고는.
터벅터벅.
식사가 준비되어 있는 거실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 * *
자그락… 자그락.
수저와 포크를 움직이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 퍼졌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누구도 잡담을 하기 위해서 입을 열지 않았다.
“…….”
거기에는 테이벤도 포함되어 있었다. 녀석 또한 밥을 먹기 위해서 거실로 나왔다.
자의는 아니었다.
그저. 가주님이 밥을 먹으라는 말을 전한 집사 때문에 이곳으로 온 거였다.
그리고 그때부터 모두에게 외면받았다.
가주인 베이른부터 시작해서 에탄까지. 한 명도 테이벤에게 안부를 묻지 않았다.
와그작.
하지만 테이벤은 거기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자신의 잘못이 얼마나 큰지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으니까.
“밥이라도 같이 먹게 해 줘서… 감사합니다.”
테이벤이 밥을 먹고는 고개를 꾸벅였다. 자기 자리가 탁자가 아니라 바닥이어도 할 말이 없었으리라.
아니. 엄밀히 따지면 음식을 준 거 자체가 배려라고 할 수 있었다.
적어도 자신을 사람으로 봐준다는 뜻이니까.
“저는… 이제-”
“연무장으로 따라와.”
에탄이 테이벤의 말을 잘랐다.
“검 들고 나와. 지금 당장.”
그 뒤 다른 선택지는 없다는 단호한 어조로 뒷말을 이었다.
탁!
에탄이 말을 마치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거실을 벗어나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터벅터벅.
테이벤이 그런 에탄의 뒤를 조심스럽게 따라갔다.
다른 이들을 같이 오지 않았다.
오직 에탄과 테이벤.
단 두 사람만이 복도를 지나쳐 연무장으로 향했다.
“크흠.”
“흠.”
그 과정에 테이벤은 가문의 몇몇 사람들과 마주쳤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에 고개를 푹 숙였다.
부끄러워서 이들의 눈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끼익.
그렇게 죄인처럼 복도를 걸은 끝에. 테이벤은 에탄과 함께 연무장 안으로 들어오게 됐다.
쿵.
테이벤이 안으로 들어오자 에탄이 연무장 문을 굳게 닫았다. 아무도 볼 수 없게 말이다.
관람석에도 아무도 없었다.
오직 에탄과 테이벤 두 사람만의 공간이 마련된 거였다.
“나는.”
“닥치고 검이나 들어.”
테이벤이 그걸 확인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곧바로 에탄에게 저지당했다.
“할 말이 있으면 검으로 증명해라. 그거 말고는 네 사과를 받지 않겠다.”
쓰릉!
이어서 에탄이 검을 뽑는 모습을 보고는.
“…알겠다.”
테이벤 또한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자세를 잡은 채 에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들어와. 선공은 양보해 줄게.”
에탄이 그런 테이벤을 향해 고개를 까딱거리면서 말했다. 그제서야 테이벤이 굳은 얼굴로 눈을 감았다.
“!”
그 후 다시 두 눈을 부릅뜨고는.
“흐아아!”
에탄을 향해 기합을 내지르면서 달려들었다.
퍽!
“커헉!”
하지만 호기로운 기합은 테이벤의 실력을 향상시켜 주지 않았다.
“우웨에엑!”
오히려 바닥에 엎드려서 구토를 하게 만들었다. 에탄이 테이벤의 배를 있는 힘껏 검집으로 타격했기 때문이다.
“으윽….”
“일어나. 아직 안 끝났잖아.”
에탄이 비틀거리는 테이벤에게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검은 여전히 녀석을 향해 있었다.
“내 검이 먼저 거둬지게 만들어. 안 그러면 넌 여기서 딱 한 가지 경우를 제외하면 나갈 수 없어.”
“…무슨 경우지?”
“굶어 죽는 거. 그거 빼고는 바깥세상 구경도 못 할 거다. 그러니까 얼른 내가 검을 거두게 만들어 봐.”
에탄의 말에 테이벤이 침을 삼켰다. 녀석 또한 알고 있었다. 에탄과 자신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큰 벽이 있다는 걸 말이다.
“…알겠다.”
하지만 이번에도 테이벤은 불평을 토로하지 않았다.
“이걸로 용서를 받을 수 있다면. 그리고 이게 유일한 길이라면 그렇게 해야지.”
에탄이 자신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 걸 알고 있었으니까.
“진심으로 널 상대하겠다.”
그래서 테이벤은 그 어느 때보다 최선을 다해 승부에 임하기로 마음먹었다.
“퍽이나.”
에탄이 녀석의 말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우웅….
그리고 달빛의 기운을 끌어 올리고는.
“걱정하지 마. 딱 죽지 않을 정도로만 상대할 테니까.”
테이벤의 오른쪽 갈비뼈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 * *
그렇게 에탄이 테이벤을 끌고 연무장으로 갈 때.
“정원이 참 예쁘네요.”
“세바스찬이 꾸민 우리 정원보다 좋으냐?”
“그건 아니에요. 세바스찬님이 가꾸는 꽃과 나무들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워요.”
아린이는 지오반과 함께 베르사르 가문의 정원을 걸었다.
칼라사르 가문 만큼은 아니었지만, 베르사르 가문의 정원도 나름대로 꾸며져 있었기에 산책을 하는 맛이 있었다.
“…정말 괜찮을까요?”
그래서 두 사람은 베르사르 가문의 정원을 아무 말 없이 걸었다. 그리고 중간쯤에 왔을 때 아린이가 입을 열었다.
“뭐가 말이냐?”
“테이벤 님이요. 지금 테이벤 님은 아빠를 상대로 절대 이길 수 없잖아요.”
그러면서 테이벤의 안전을 걱정했다. 에탄이 어제저녁 했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연무장에서 끝을 보겠다는 건. 테이벤 님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저는 누군가 죽는 걸 원하지 않아요.”
“흐음.”
아린이의 말에 지오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얕게 입꼬리를 올렸다. 확실히 아린이는 남을 위하는 마음이 상당했다.
어린 나이인 걸 감안해도 말이다.
하지만.
“아린아. 할아버지 또한 테이벤이 죽는 걸 원하지는 않는다.”
“그럼.”
“하지만 이건 그거와 별개의 문제다. 테이벤은 가문한테. 그리고 에탄에게도 큰 잘못을 저질렀으니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라고 지오반은 생각했다.
“아무리 테이벤이 미안하다고 말해도, 상대방이 그걸 용납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
“…….”
“그러니까 네 아빠가 테이벤을 연무장으로 데리고 간 거다. 속죄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 말이지.”
“어려워요.”
지오반의 말에 아린이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자신의 기준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발언이었다.
인간으로 산 지 얼마 되지 않았으니 당연한 거였다.
“원래 인생은 그런 법이란다.”
지오반이 그런 아린이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만졌다.
‘신기하군.’
그리고 이 상황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녀석이 변한만큼… 나도 변했다는 건가.’
자신은 원래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에탄이 아린이를 데려오고 나서부터는 달라졌다.
사람 앞에서 미소를 짓는 건 물론이고, 이런 식으로 아린이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니.
옛날 같으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구나.’
지오반은 지금 이 변화가 잘못됐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속으로 한 가지 결심한 건 있었다.
“가문으로 돌아가면… 할아버지랑 대련 한번 해 보겠느냐?”
“할아버지랑요?”
“그래. 오랜만에 검을 휘둘렀더니 몸이 많이 낡아진 게 느껴지더구나. 그러니까 아린이가 할아버지를 좀 도와주면 좋겠다.”
평화로운 북부 인생에 찌들어서.
비루해진 이 몸을 다시 기름칠 해야겠다는 것.
그게 지오반의 새로운 목표였다.
“으음….”
아린이가 지오반의 말에 고민하는 척 미간을 찌푸렸다.
“아.”
지오반이 그걸 보고는 아린이의 의도를 알아차렸다. 그래서 흐뭇한 표정으로 아린이를 쳐다보면서.
“대련을 해 줄 때마다 설탕 사탕을 하나씩 주겠다.”
“뇽뇽이 것도 주세요! 저 혼자 먹으면 뇽뇽이 삐져요.”
“그래. 그러면 두 개씩 주겠다. 이거면 할아버지랑 놀아 줄 수 있겠느냐?”
“흐음!”
설탕 사탕을 내주겠다 말했다.
“좋아요.”
그제서야 아린이가 해맑게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지오반의 눈을 빤히 쳐다보면서.
“하지만 할아버지라고 해서 봐 드릴 생각은 없어요. 그러니까 대충하시면 안 돼요!”
진지하게 뒷말을 이었다.
“하하!”
지오반이 그 말을 듣고는 한 방 먹었다는 듯 웃었다. 그리고 아린이를 쳐다보면서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약속하겠다.”
아린이가 지오반이 내민 새끼손가락을 빤히 바라봤다. 이어서 자신의 새끼손가락으로 고리를 걸고는.
“좋아요. 거래 성립이에요!”
해맑은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부럽구만.”
베이른이 정원 입구에서 그 모습을 조용히 쳐다봤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참으로 보기 좋은 광경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