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4화
타탁! 탁!
에탄이 산길을 빠르게 올라갔다.
팍!
그리고 이런 에탄의 뒤에 지오반, 베이른, 아린이가 바짝 붙어서 움직였다.
‘놀랍군.’
베이른이 눈앞에 있는 바위를 가볍게 뛰어넘었다. 그러면서 옆에 있는 아린이를 힐끗 바라봤다.
‘정말 어린아이가 맞나?’
아린이가 전혀 뒤처지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저런 속도를 낼 수 있지?’
베이른은 이해할 수 없었다.
그의 입장에서 아린이는 끽해 봐야 5살짜리 어린아이다.
한데. 자신과 지오반을 가볍게 따라오고 있으니 의문을 가지는 게 당연한 거였다.
“옵니다.”
그래서 생각이 깊어지려는 찰나.
앞서 나가던 에탄이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쓰릉!
동시에 검집에서 검을 빼 들었다.
베이른이 그걸 보고는 앞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그리고 두 눈을 크게 떴다.
나무 사이에 있는 검은 존재들.
보기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외형을 가진 놈들.
“마물….”
절대 여기에 있으면 안 되는 녀석들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가 말하지 않았습니까. 마족이 있을 거라고.”
에탄 또한 베이른이 보는 걸 똑같이 시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래서 잔뜩 굳은 얼굴로 놈들을 노려봤다.
전생 시절 북부를 멸망시킨 녀석들이니까.
그때만 떠올리면 에탄은 아직도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목을 치셔야 합니다. 그게 제일 빠르게 놈들을 죽일 수 있는 방법입니다.”
하지만 에탄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지금 이 상황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건 좋은 선택지가 아니니까.
“알겠네.”
에탄의 말에 베이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왼쪽을 맡지.”
그 후 자신이 위치한 방향의 마물들을 처리하겠다고 말했다.
“그럼 내가 오른쪽을 처리하겠다.”
지오반이 그 말을 듣고는 뒷말을 이었다.
“저는-”
“아린이는 아빠랑 같이 움직일 거예요!”
그래서 에탄이 가운데를 담당하겠다고 하려는 순간, 뒤쪽에 있는 아린이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빠는 제가 지킬 거예요!”
“…….”
에탄이 아린이의 말에 입을 꽉 다물었다. 아린이의 저 말이 너무나 서글프게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에탄은 알고 있다.
아린이는 전생 시절 에탄이 어떻게 죽었는지 모른다는 걸.
‘묘하구나.’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아린이의 말이 왜 자신의 마음을 울리는지 말이다.
“믿고 맡길게.”
하나. 지금은 감성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중요한 건 아린이가 자신의 등을 지켜 줄 수 있다는 거였다.
전생 시절부터 자신과 함께해 온 동료니까.
탁!
에탄이 말을 끝내고는 땅을 박찼다. 동시에 자신의 눈앞에 있는 마물들을 향해 짙은 살기를 내뿜었다.
-끄르륵?
그러자 허공을 바라보던 마물이 에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죽어라.”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놈들은 아직 완전한 마물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그래서 에탄을 죽여야 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했다.
서걱!
놈들이 그걸 인식하기 전에, 에탄이 녀석들의 목을 쳐 버렸으니까.
쿵!
목이 날아간 마물의 몸이 뒤로 쓰러졌다. 검붉은 피가 녀석의 목에서 분수처럼 쏟아져 나왔다.
“…….”
에탄이 그 모습을 감정 없는 눈빛으로 쳐다봤다.
쿠웅! 쿵!
그 순간 양옆에서 남은 마물들이 쓰러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지오반과 베이른이 각각 눈앞에 있는 놈들을 처리한 거였다.
“계속 움직여야 합니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에탄이 검을 허공에 가볍게 털었다.
“마물들이 죽었으니 마족도 저희의 존재를 눈치챘을 겁니다. 그러니 다음부터는 전투가 일어나겠죠.”
그러면서 앞으로는 쉽지 않을 거라고 언질을 줬다.
“각오하고 있네.”
“나도 마찬가지다.”
베이른과 지오반이 그걸 듣고는 콧방귀를 꼈다. 지금은 가주로서 가문을 관리하고 있는 상태다.
하나. 그렇다고 해서 이들이 실전경험이 전무한 애송이는 아니었다.
“아린아. 할 수 있겠어?”
그래서 에탄은 이들을 걱정하지 않았다. 딱 한 사람. 아린이를 제외하면 말이다.
“…….”
아린이가 에탄의 말에 몸을 움찔했다. 눈앞에서 무언가 죽는 걸 목격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래서 심장이 빠르게 뛰고 손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자신이 곧 마물을 ‘죽여’야 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한 거였다.
“할 수 있어요.”
하지만 여기서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아빠의 뒤를 지켜 주기로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 정도 일은 아린이도 얼마든지 해낼 수 있어요.”
에탄을 지켜 주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씨익.
에탄이 아린이의 대답에 입꼬리를 올렸다. 자신을 위해서 검을 빼 들겠다는 태도가 너무 대견스러웠기 때문이다.
‘아직은 이런 걸 보여 줄 때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하지만 마음이 마냥 편하지는 못했다. 아린이는 아직 5살 수준의 아이니까.
“지금부터는 마족 놈이 나올 때까지 쉬지 않고 달리겠습니다. 각자 앞에 있는 마물들은 알아서 제거해 주세요.”
에탄이 마음을 다시 다잡았다.
그 후 베이른, 지오반, 아린이를 번갈아 쳐다보면서 뒷말을 잇고는.
탁!
다시 페르메가 있는 곳으로 발을 내달렸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런. 가주님이 여기까지 무슨 볼일로 오신 겁니까?”
에탄은 마침내 녀석과 마주하게 됐다.
* * *
에탄은 나머지 세 사람과 함께 산을 내달렸다. 그동안 이들의 눈앞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탁!
그래서 이들은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페르메가 있는 곳으로 향할 수 있었고.
“이런. 가주님이 여기까지 무슨 볼일로 오신 겁니까?”
결국은 녀석과 마주하게 됐다.
놈의 뒤에 있는 무수히 많은 마물들과 함께 말이다.
“페르메….”
베이른이 놈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도 여전히 자신이 알고 있던 집사 페르메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때와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네 녀석. 마물이었구나.”
놈의 등 뒤에 있는 무수히 많은 촉수들. 그게 페르메가 마족이라는걸 증명해 줬다.
“마물이라뇨. 그런 섭섭한 소리 하시면 안 됩니다.”
페르메가 베이른의 말에 얼굴을 구겼다. 그 후 뒤에 있는 마물들을 가리키면서 뒷말을 이었다.
“마물은 이런 놈들을 말하는 겁니다. 저는 마물이 아니라 마족입니다.”
녀석의 말에는 전혀 미안한 기색이 없었다. 자신이 베이른을 속여 왔다는 것에 죄책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저나 아쉽군요. 조금만 더 많은 시간이 있었다면… 가주님의 늦둥이 아들도 가뿐히 처리했을 텐데 말이죠. 물론 지금도 썩 좋은 상태는 아닐 겁니다. 제가 좋은 영단을 먹여 왔으니까요.”
“놈….”
베이른이 녀석의 말에 이빨을 갈았다. 차기 후계자인 테이벤을 건든 것도 모자라, 막내아들까지 노리려고 했다는 거에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 부분은 내가 이미 해결했다.”
그때. 에탄이 앞으로 나섰다.
동시에 페르메를 싸늘하게 쳐다보면서 뒷말을 이었다.
“그리고 이제 남은 건 네놈을 처리하는 거뿐이다.”
“호오….”
페르메가 에탄의 말에 눈을 가늘게 떴다.
“이상하군. 내가 알고 있던 네놈은 이렇게까지 똑똑한 녀석이 아니었는데….”
그러면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자신의 머릿속 에탄과 눈앞에 있는 에탄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아이는… 호오 재미있어 보이는 녀석이 섞여 있군.”
페르메가 아린이를 힐끗 쳐다봤다.
탁!
그때. 에탄이 검을 빼 들었다.
쓰릉!
그리고 놈의 목을 치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려는 순간.
터벅터벅.
페르메의 뒤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테이벤!”
베르사르 가문의 장남 테이벤이었다.
“괜찮은 거냐!”
베이른이 테이벤을 보고 소리쳤다.
“…….”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테이벤은 페르메의 마술에 의해 정신을 빼앗긴 상태였으니까.
-우웅….
심지어 녀석의 몸 안에서는 마기도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에탄이 그걸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전생 시절, 마지막으로 그를 보았을 때와 비슷한 모습이었다.
‘곱게 제압하지는 못하겠네.’
의식은 없지만, 마기로 인해서 힘은 늘어났다. 거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는 상태니.
테이벤을 상대하는 게 보통 일은 아니리라.
“확실히 재미있는 조합이긴 하군. 너도, 그 꼬마도. 하지만 아직 나를 상대하기엔 턱없이 모자랄 텐데.”
페르메가 에탄을 보면서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미리 준비해 둔 마물에다가 정신을 빼앗긴 테이벤까지.
베르사르 가문을 완벽히 무너트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여기에 있는 네 명을 이기는 건 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건 아직 모르지.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법이잖아?”
하지만 에탄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네 명이면 충분히 놈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아린이가 얼마나 강한지 가늠하지 못하고 있으니까.
“흥.”
페르메가 에탄의 말에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탁!
그 후 뒤로 물러나면서 오른손을 까딱거리는 순간.
-끼에엑!
뒤에 있는 마물 중 일부가 에탄을 향해 달려들었다.
턱…턱…탁!
그 순간 뒤에 서 있던 아린이가 에탄의 옆쪽으로 움직였다.
부웅!
이어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있는 힘껏 검을 휘두르자.
서걱!
가장 앞쪽에 있던 마물들의 목이 허공으로 날아갔다.
“…….”
그 순간 페르메의 낯빛이 어두워졌다.
“아빠를.”
아린이가 차갑게 가라앉은 놈의 얼굴을 째려봤다. 그러면서 아주 덤덤한 목소리로.
“무시하지 마세요.”
뒷말을 이었다.
씨익.
에탄이 아린이의 말에 입꼬리를 올렸다.
“아버지. 베이른 님. 마물들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두 사람에게 마물을 맡긴다는 말을 하고는.
타악!
두 다리를 박차고, 페르메에게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혼자서 이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냐!”
페르메가 그걸 보고는 분노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에탄이 자신을 너무 얕잡아 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놈을 갈갈이 찢어 버려라!”
그래서 옆에 있는 테이벤에게 에탄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타악!
그러자 테이벤이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그리고 페르메에게 다가오는 에탄의 앞을 막았다.
붕!
그리고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에탄은 아무런 방어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아빠를.”
자신과 전생부터 함께 해 왔던, 아린이가 공격을 막아 줄 거라는 확신이 있었으니까.
그리고 이런 에탄의 믿음에 보답하듯, 아린이가 테이벤의 공격을 보란 듯이 막아냈다.
“무시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요.”
그 후 얼음장 같은 눈빛으로 페르메를 쳐다보면서 경고했다.
“아빠를 무시하면 아린이가 혼내 줄 거예요.
에탄의 몸을 손끝만큼도 건들 수 없을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