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화
연회가 시작됐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한 기류가 흘렀지만, 술이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가 풀어졌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군. 어떻게 하면 사람이 저렇게까지 바뀔 수 있는 건가?”
그렇게 대화를 이어 나가다 보니, 자연스럽게 에탄에 대한 이야기가 다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오늘 보여 준 대련이 너무 인상 깊었으니까.
“나도 모른다.”
“에이….”
“정말이다. 원한다면 내 이름을 걸 수도 있다.”
지오반이 베이른을 향해 진지한 표정으로 답했다. 아무리 술이 들어갔다고 해도, 이름을 가볍게 걸 사람은 아니었다.
“호오. 정말 모르나 보군.”
그래서 베이른은 지오반의 대답이 진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지오반이 저 말을 한다는 건, 정말로 모른다는 뜻이니까.
“어느 날처럼 술에 취해서 집에 들어왔다. 그런데 그다음 날부터 사람이 달라졌다.”
지오반이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때 아린이를 소개했다. 자신의 딸이라고.”
“음.”
“어디서 데려왔는지는 나도 모른다. 알려 주지도 않더군.”
다짜고짜 자신의 딸이라고 말을 하니, 지오반의 입장에서는 어이가 없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래서 보육원으로 보내겠다고 했었다.”
“아니. 저렇게 귀여운 아이를? 자네 눈이 어떻게 된 거 아닌가?”
“…….”
“음. 미안하네. 입 다물고 조용히 듣겠네. 그러니까 그런 눈빛으로 안 봤으면 좋겠군.”
지오반의 싸늘한 눈빛에 베이른이 몸을 움찔했다.
“그런데 자기가 허락할 수 없다고 말하더군.”
“보육원에 보내는걸?”
“그래. 그리고 자기가 더 이상 망나니가 아니라는 걸 증명해 보이겠다고 했다.”
“증명이라.”
베이른이 그 말을 듣고 에탄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포이른. 너 아린이 좋아하냐?”
“그… 그게 무슨 소립니까!”
“포이른 오빠. 나 싫어?”
“아니. 그건 아닌데….”
에탄과 아린이와 자신의 막내아들 포이른까지. 세 명이서 즐겁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포이른… 대답을 잘 해야 할 거다.”
“예?”
“안 그러면 나랑 재밌는 놀이를 하게 될 테니까.”
“…….”
물론. 에탄에게는 조금 다른 감정도 들어가 있었지만. 다행히 포이른을 제외한 그 누구도 그걸 신경 쓰지 않았다.
에탄이 포이른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게 경고(?)했기 때문이다.
“잘 해낸 거 같구만.”
베이른이 멀찍이서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흥. 아직 멀었다.”
지오반이 그런 베이른을 향해 톡 쏘아붙이듯 말했다. 그리고 앞에 있는 술을 들이켰다.
피식.
베이른이 그걸 보고는 얕게 웃었다. 술을 마시는 지오반의 입꼬리가 자신처럼 올라가 있었으니까.
에탄의 경고를 포이른만 들었듯이. 지오반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는 베이른만 볼 수 있는 모습이었다.
* * *
“…….”
테이벤이 침대에 누운 채 천장을 멍하니 바라봤다.
“내가 패배하다니.”
그리고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자신의 상황이 너무 한심했기 때문이다.
‘치욕적이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대련을 시작했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압도적인 패배였다.
심지어 에탄은 검이 아니라 주먹으로 승리를 거뒀으니.
“…….”
큰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무 안일했던 건가.”
테이벤이 에탄의 눈빛을 떠올렸다. 대련을 할 때 자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눈동자.
과거. 테이벤이 망나니였던 에탄을 쳐다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만큼 자신이 만만했다는 뜻이니라.
“다음에는 이길 수 있을까?”
만약. 다시 한번 대련을 한다면 결과가 달라질까. 테이벤의 머릿속에 그런 의문이 들었다.
하지만 쉽게 답을 내리지 못했다.
에탄과 자신 사이에 큰 벽이 있다는 걸 체감했으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잘못-”
그래서 더 깊은 생각의 늪에 빠지려는 찰나.
똑똑.
누군가 테이벤의 방문을 두드렸다.
“테이벤 님. 집사 페르메입니다.”
가주 베이른의 집사인 페르메였다.
“…지금은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다.”
하나. 테이벤은 지금 페르메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아니. 페르메가 아니라 그 누가 와도 자신의 모습을 보일 생각이 없었다.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다고 여겨졌으니까.
“꼭 해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
“그리고 테이벤 님께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기도 합니다.”
“제안?”
“예. 그러니 들어가는 걸 허락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테이벤은 반응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가 하는 이야기에 흥미가 생겼기 때문이다.
‘설마 포이른한테 주는 영단에 관한 건가?’
테이벤도 포이른이 영단을 먹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테이벤이 그걸 주려는 건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들어와.”
페르메의 출입을 허락했다.
끼익.
테이벤의 말에 페르메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그 후 침대에 앉아 있는 테이벤을 보고는.
“아아….”
안타깝다는 듯 탄식을 내뱉었다.
“도련님….”
그리고 테이벤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로 말이다.
“많이 힘드신 모양이군요.”
테이벤이 페르메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이런 식으로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다.
탁!
“용건만 말해라.”
그래서 페르메가 내미는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페르메가 얕게 미소를 지었다.
“더 강해지고 싶으십니까?”
그리고 악마가 속삭이듯이 테이벤에게 물었다.
“당연한 거 아니냐? 내가 만약 에탄보다 힘이 좋았다면 패배 따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테이벤이 페르메의 말에 대답을 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이 얼마나 나약한지 이번 대련을 통해 철저히 깨달았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분노하고 있었다.
“그렇군요. 아주 훌륭한 자세입니다.”
페르메가 그걸 느끼고는 씨익 웃었다.
“그러면 지금 당장 강해질 수 있는 방법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진심인가?”
“예. 한 치의 거짓도 아님을 제 이름을 걸고 맹세하겠습니다.”
그리고 테이벤에게 힘을 주겠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되는 거지?”
테이벤이 홀린 듯 페르메를 바라봤다. 힘에 대한 갈망이 그의 판단력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거기에는 페르메의 기묘한 술수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지만.
테이벤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를 따라오시죠. 힘의 원천지를 도련님께 보여 드리겠습니다.”
페르메가 멍해진 테이벤의 눈을 보고 씨익 웃었다. 그 후 그의 손을 잡고는 침대에서 일으켜 세우고는.
터벅터벅.
그와 함께 조용히 방을 빠져나갔다.
* * *
연회가 끝난 다음 날.
베이른은 칼라사르 가문의 세 사람을 가주실로 불렀다.
“테이벤이 사라졌다고요?”
“그래. 오늘 아침에 시녀가 방문을 몇 번이나 두드렸는데도 반응이 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내가 직접 안으로 들어가 보니… 테이벤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테이벤이 자취를 감췄다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런데 내 집사인 페르메도 같이 모습을 감췄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거였다.
“페르메요?”
“그래. 유능한 집사인데… 테이벤과 같이 사라졌다. 포이른에게 영단까지 줄 정도로 능력이 출중했지.”
에탄이 베이른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페르메라… 처음 들어 보는 이름인데.’
페르메라는 집사의 존재를 이제 알았기 때문이다. 전생 때는 들어 보지 못했던 이의 이름이니.
‘수상하다.’
에탄은 이상하다고 여길 수밖에 없었다. 베르사르 가문에 유능한 집사였다면, 자신이 모를 리가 없을 테니까.
‘거기에 영단이라니.’
그리고 포이른에게 준다는 영단도 미심쩍었기에.
“혹시 그 영단을 자세히 살펴봐도 되겠습니까?”
상당히 무례한 청을 베이른에게 했다.
“지금 내 집사를 의심하는 건가?”
“예. 현 상황이라면 충분히 그럴 만합니다.”
베이른의 반문에 에탄이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사라졌으니 분명 무언가 있는 거겠죠. 아마 단순히 바람을 쐬고자 했다면 몰래 나가지 않았을 겁니다.”
“음….”
“그러니 영단부터 조사를 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만약 가주님의 집사가 수상한 인물이라면… 거기부터 무언가 드러날 테니까요.”
베이른이 에탄의 말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옆에서 이야기를 듣고 있던 지오반과 아린이가 입을 열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네.”
“저도요!”
두 사람도 에탄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기에 힘을 실어 주는 거였다.
“으음….”
“이럴 때는 냉정해지셔야 합니다. 발밑에 있는 검이 가장 날카롭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말이 왜 생겼는지를 떠올리시면 답이 나올 겁니다.”
에탄이 고뇌하는 베이른에게 한마디를 더 붙였다. 가장 믿는 이가 의심을 받고 있으니 화가 나는 게 당연하리라.
“만약 페르메라는 집사가 이번 사건과 아무 연관이 없다면. 제가 직접 무릎을 꿇고 사과하겠습니다.”
하지만 에탄의 직감이 말하고 있었다. 그럴 리가 없다고. 때문에 어떻게든 자신이 직접 조사를 하고 싶었다.
“굳이 자네가 할 필요가 있나? 내가 사람을 시켜도 되는데.”
“그중에서 연관된 사람이 없으리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내키지 않으신 건 알겠지만, 이번에는 믿고 맡겨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래… 그렇지. 맞는 말이다.”
베이른이 에탄의 말에 고개를 숙였다. 하나하나가 모두 합리적인 발언들이었다.
“후우….”
베이른이 그걸 깨닫고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고는.
“에탄. 나는 원래 자네를 믿지 않았네. 가문에서 어떤 취급을 받고, 무슨 행동을 해 왔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에탄이 망나니였던 과거를 콕 집어 말했다.
“하지만… 어제 대련을 통해서 그 인식이 조금은 변했네. 부디 그게 깨지지 않게 해 주면 좋겠군.”
그러고는 새끼손가락에 끼고 있는 반지를 빼냈다. 베르사르 가문의 인장이 보석에 각인되어 있는 반지였다.
“이제부터 내 권리를 임의로 넘겨주겠네. 그러니까 내 아들을 무사히 돌아오게 해 주게. 자네한테는 마음에 안 드는 놈이겠지만… 나한테는 둘도 없는 자식이니까.”
그런 소중한 반지를 베이른이 에탄에게 내밀었다.
쓰윽.
에탄이 그걸 조심스럽게 받아 냈다. 그리고 자신의 새끼손가락에 끼고는.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베이른의 말에 진중하게 답했다.
“지금부터 베르사르 영지에 있는 모든 신관을 불러 모으겠습니다.”
그리고 페르메와 테이벤을 찾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이번이 베르사르 가문의 운명을 바꿀 기회다.’
다가오는 북부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