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1화
사실 에탄은 테이벤에게 대련을 제안할 생각이 없었다. 녀석의 얼굴을 직접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문을 빛내기 위해서? 지나가던 개도 콧방귀를 끼겠어.’
하지만 녀석을 마주 보고 직접 대화를 하니, 이대로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과거 테이벤이 저질렀던 만행들이 속속히 떠올랐기 때문이다.
“에탄. 정말로 후회 안 할 자신 있나?”
그래서 에탄은 테이벤과 나머지 사람들을 데리고 연무장으로 향했다. 베르사르 가문의 ‘공식’ 연무장으로 말이다.
“그런 거 안 한다.”
“흐음….”
에탄의 말에 테이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이 완벽히 위라고 생각하고 있군.’
그걸 본 에탄이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누가 봐도 에탄을 약자 취급하는 모습이었다.
전생 시절 에탄이었다면, 그런 놈을 보고 불같이 화를 냈으리라.
아니. 어쩌면 진작에 검을 뽑아 들고 덤볐을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진심을 다해라. 나중에 방심했다는 변명을 듣기는 싫으니까.”
하지만 지금의 에탄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서는 미끼를 던지고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한다는 것을.
“내가 본심을 보이면 네가 다칠 수도 있다. 그게 너무 걱정이 되는구나.”
“그래서 대련을 못 하겠다?”
“뭐… 부정은 안 하겠다. 친구가 다치는 걸 보고 싶지는 않으니까.”
테이벤이 에탄의 물음에 어깨를 으쓱였다.
“다친다라… 네가 그만큼 실력이 뛰어났나?”
“뭐라고?”
“나는 반대로 네 녀석이 상처를 입지 않을까 걱정이다. 이번 대련을 통해 충격을 받을 테니까.”
“대련도 안 해 봤으면서 그걸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에탄의 비아냥에 테이벤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눈에 에탄은 여전히 망나니에 불과한 놈이다.
아니. 설령 정신을 차렸다고 해도 자신을 이기기에는 실력이 한참 부족하다고 확신했다.
검술은 단기간에 실력이 늘 수 있는 분야가 아니니까.
“그래. 그러니까 한번 해 보자는 거다. 네가 원한다면 가문의 이름을 걸고 ‘맹세’를 할 수도 있다. 대련 중 부상을 입어도 탓하지 않기로 말이야.”
“…좋다.”
에탄의 말에 테이벤이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녀석의 눈빛에서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나 테이벤은 베르사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이번 대련에서 부상을 입어도 어떠한 탓도 하지 않겠다!”
그 상태에서 테이벤이 맹세를 외쳤다. 관람석에 앉아 있는 가주 베이른에게 뚜렷이 들릴 정도로 큰 목소리였다.
씨익.
에탄이 테이벤의 맹세를 듣고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이 던진 미끼를 확실히 물었으니.
진심을 다해도 자신을 탓하지 못하리라.
“네 차례다. 설마 이제 와서 내빼지는 않겠지?”
“나 에탄은 칼라사르 가문의 이름을 걸고, 이번 대련에서 어떤 부상을 입어도 어떠한 탓도 하지 않겠다.”
에탄이 테이벤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맹세를 외쳤다. 관람석에 앉아 있는 지오반이 듣고도 남을 정도로 또렷한 목소리였다.
“…대련을 시작하라.”
그렇게 두 사람의 맹세가 끝나자.
지오반이 근엄한 목소리로 대련을 개시하라고 말했다. 에탄이 그걸 듣고는 씨익 미소를 지었다.
“어디 한번 제대로 놀아 보자고.”
그리고 자신의 검을 빼 들고는.
터벅터벅.
테이벤을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아주 천천히.
* * *
“정말 이대로 진행해도 괜찮나?”
베이른이 연무장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면서 지오반에게 물었다.
저 두 녀석을 내버려 둬도 되냐고 말이다.
“그래. 상관없다.”
지오반이 물음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에탄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진작 알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무리 에탄이 바뀌었다고 해도. 테이벤에게 맞설 정도는 아닐 텐데.”
“그건 보면 알겠지.”
“진짜로 그렇게 생각한다고?”
“그래.”
지오반이 답을 마치고는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리고 뒷말을 이으려는 순간.
“신관님을 부르는 게 좋을 거예요.”
지오반의 옆에 있던 아린이가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테이벤 님이… 많이 다칠 거 같으니까요.”
언뜻 보기에는 도발과 같은 발언이었다. 하지만 아린은 진심으로 테이벤을 걱정하는 거였다.
에탄과 수없이 검을 맞대 본 대련자로서 말이다.
* * *
에탄이 검을 아래로 늘어트렸다.
지이익….
그리고 흙바닥을 긁으면서 테이벤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이 꼭 사형을 집행하는 집행자와 같았다.
“무슨 짓이지?”
테이벤이 그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사방이 허점투성이인 자세였다.
그 말은 즉. 자신이 어떤 공격을 해도 막아낼 수 있다는 뜻이니.
“죽고 싶은 건가.”
테이벤의 심기가 불편한 게 당연했다. 한낱 망나니에 불과했던 에탄이 자신을 무시하고 있으니까.
“해 볼 수 있으면 해 보던가.”
“뭐?”
“맹세도 했겠다. 못할 이유는 없잖아.”
에탄이 그런 테이벤을 향해 비소를 지었다.
“놈….”
테이벤이 그걸 보고는 얼굴을 완전히 찌푸렸다.
탁!
그리고 에탄을 향해 있는 힘껏 달려들었다. 동시에 검의 위치를 에탄의 얼굴 쪽으로 향하고.
후웅!
검을 일직선으로 쭉 뻗었다.
에탄의 이마에 구멍을 내 버리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말이다.
“테이벤!”
그 순간 베이른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자칫하면 에탄이 죽을 수도 있겠다 싶었기 때문이다.
까앙!
“!?”
하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에탄이 테이벤의 검을 너무 손쉽게 막아 버렸으니까.
퍼억!
“커헉!”
그리고 거기서 한 단계 더 나아가.
에탄이 테이벤의 배를 발로 뻥 까 버렸다.
녀석의 허리가 절로 숙어질 정도로 매서운 발차기였다.
타탁…탁!
테이벤이 비틀거리면서 뒤로 물러났다.
“이게 무슨….”
그리고 당황했다.
자신의 검이 막힌 걸로도 모자라 심지어 반격까지 당하다니.
“말도 안 돼.”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상대가 에탄이면 더더욱 그렇고 말이다.
“짜식. 더럽게 침을 흘리냐.”
에탄이 바닥에 있는 침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 후 테이벤을 향해 다시 한번 다가갔다.
지이익….
물론. 검을 길게 늘어트리는 걸 빠트리지 않았다.
“노오옴!”
테이벤이 그걸 보고 크게 격노했다. 처음은 방심이라 당했지만, 이제는 안 당할 거라는 자신이 있었다.
파아앗!
그래서 다시 한번 에탄을 향해 검을 휘두르는 순간.
부웅!
테이벤의 눈앞에 에탄의 주먹이 나타났다.
우드득!
그리고 주먹이 얼굴에 닿는 순간, 테이벤의 코뼈가 박살 났다.
“끄아악!”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한 고통이 테이벤을 엄습했다. 손에 쥐고 있던 검이 바닥에 떨어지고, 녀석의 몸 또한 힘없이 무너졌다.
“아직 모자라. 항복이라고 외치지도 않았잖아.”
에탄이 완전히 드러누운 녀석의 가슴팍에 올라탔다. 그 후 오른손으로 놈의 입을 틀어막고는.
“대련은 지금부터 시작이다.”
왼손으로 테이벤의 얼굴을 사정없이 패기 시작했다.
* * *
“도련님께서는 당분간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알겠네. 이만 가 보게.”
“예.”
베이른의 말에 신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연회장에 있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고는 가문을 빠져나갔다.
“…….”
“…….”
그러자 연회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쥐의 찍찍거리는 소리도 다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에탄이 테이벤을 완전히 드러눕게 만들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딱히 별문제는 없을 겁니다. 얼굴만 조금 망가진 거뿐이니까요.”
“…조금?”
“예. 적어도 검으로 상처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니 치료만 잘하면 흉터도 남지 않을 겁니다.”
그때. 에탄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는 사과 같은 건 손톱 때만큼도 안 들어가 있었다.
“서로가 최선을 다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가문의 이름을 걸고 대련을 했으니까.
“그래. 음… 그러기로 했었지.”
가주 베이른이 에탄의 말에 침을 삼켰다. 딱히 반박할 여지도 없었다. 전부 맞는 말이었으니까.
“최선을 다하기로 했으면 그래야죠. 안 그러면 나쁜 사람이에요.”
그 순간 가만히 대화를 듣고 있던 아린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면서 가주 베이른과 눈을 마주치고는.
“그렇죠? 베이른 가주님.”
베이른에게 물었다.
“그래. 가문의 이름을 걸었으면 죽을힘을 다해야 하지. 물론 상대방을 죽이면 안 되겠지만.”
“그럼 저희 아빠가 잘못한 건 딱 하나밖에 없네요.”
“하나?”
아린이의 말에 베이른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에탄과 지오반의 시선도 아린이에게 집중됐다.
과연 에탄이 잘못한 게 무엇인지 이들도 궁금했으니까.
아린이가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고는 어깨를 폈다.
“아빠가 잘못한 건 상대방보다 더 강한 거밖에 없어요.”
그리고 떳떳하게 에탄이 잘못한 점을 말했다.
“…하하!”
그러자 베이른이 크게 웃었다.
설마. 저런 식으로 대답이 날아올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심지어 말하는 이가 5살짜리 어린아이.
“당돌하구나.”
베이른은 여러 의미로 아린이에게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네 말이 맞다. 에탄이 잘못한 건 내 아들 녀석보다 더 강하다는 것. 그거 하나밖에 없지.”
사실. 베이른은 에탄이 패배할 줄 알았다. 그것도 단순히 지는 게 아니라 큰 부상을 입을 수준으로 말이다.
“그리고 나 또한 패배를 했다고 해도 무방하다. 테이벤에게 어떻게 하면 힘을 얻을 수 있는지에 관한 것만 알려 줬으니까.”
하지만 정반대의 결과가 나왔으니 베이른도 느끼는 게 많았다.
“미안하다. 에탄. 테이벤을 대신해서 너에게 사과를 하마.”
베이른이 에탄에게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네가 만약 테이벤보다 약했다면 상황은 심각하게 돌아갔겠지. 테이벤은 그런 의도로 검을 휘둘렀으니까.”
“…….”
“하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구나. 이게 다 네 덕분이다. 오늘 이 대련을 나는 결코 잊지 않겠다.”
허울뿐인 사과가 아니었다.
베이른은 진심을 담아서 에탄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거면 됐습니다.”
에탄이 그걸 느끼고는 베이른의 사과를 받았다. 사실 분이 완전히 풀린 건 아니었다.
전생 시절 자신이 겪었던 북부의 멸망. 어찌 보면 테이벤도 거기에 기여를 한 셈이니까.
‘아직 마족과 접촉은 안 한 거 같은데….’
그러나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테이벤의 힘은 순수히 본인의 것이었다. 에탄은 녀석과 대련을 하면서 그걸 깨달았다.
‘상황을 좀 더 살펴봐야 하겠지만. 지금이라면 운명을 바꾸는 것도 가능하겠어.’
북부를 지켜 낼 수 있다면 전생의 원한을 현생까지 가져올 필요는 없으리라.
에탄에게 중요한 건 개인적인 복수가 아닌 북부를 지켜 내는 거니까.
꼬르륵!
그런 생각을 하는 순간, 아린이의 배에서 밥을 달라는 소리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
아린이가 그걸 깨닫고는 얼굴을 푹 숙였다. 모두의 시선이 다른 의미로 집중된 게 부끄러웠다. 참고로 시선에는 자신과 2살 차이 밖에 안 나는 포이른도 포함되어 있었다.
피식.
에탄이 그걸 보고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 후 자신의 배를 툭툭 두드리면서.
“대련을 했더니 배가 많이 고픕니다. 이제 슬슬 연회를 시작하죠.”
밥을 먹자고 이야기를 꺼냈다.
“이런. 내가 너무 자네 생각을 안 했군.”
베이른이 그 말을 듣고는 아차 하는 표정을 지었다.
짝!
그 후 가볍게 박수를 치고는.
“그럼. 지금부터 제대로 먹어 보자고!”
연회의 시작을 알렸다.
-고마워요. 아빠.
아린이의 소리 없는 감사 표현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