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8화
지오반이 에탄을 가주실로 불렀다. 이 경우에 일어나는 일은 보통 좋지 않은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전생 시절에는 허구한 날 불려 가서 혼났지.’
과거. 에탄이 망나니였던 시절에는 그랬다. 맨날 술을 마시고 유흥에 돈을 흥청망청 사용했으니.
지오반이 에탄을 불러서 좋은 소리를 할 리가 만무했다.
“수련을 하느라 고생이 많구나.”
한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에탄은 가주실로 들어가자마자, 지오반에게 한마디를 듣게 됐다.
자신의 잘못을 나무라는 게 아닌, 고생한다는 따뜻한 말이었다.
‘이거 참… 기분이 묘하네.’
전생이었다면 꿈도 못 꿀 상황이다. 하지만 현생으로 따지면 마냥 말이 안 되는 사태도 아니었다.
그동안 에탄이 변화된 모습을 보여줘 왔으니까. 자신에게 실망한 칼라사르 가문에 말이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덤덤하게 지오반의 말에 답했다. 놀래거나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하냐는 등의 호들갑은 떨지 않았다. 자신에게 저 말을 하기 위해, 지오반이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을지 뻔히 보였으니까.
“음.”
에탄의 대답에 지오반이 고개를 끄덕였다.
쓰윽.
그 후 책상에 있는 서신 하나를 에탄에게 내밀었다.
“베르사르 가문의 편지군요.”
에탄이 그걸 보고는 서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단번에 맞췄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각인된 인장이 너무 익숙한 형태였기에 맞추는 게 당연한 거였다.
“한번 읽어 보거라.”
“예.”
지오반의 말에 에탄이 봉투에서 서신을 꺼냈다. 그리고 안에 적혀 있는 글귀를 훑어봤다.
제법 다양한 미사여구가 붙어 있는 글이었지만 내용은 간단했다.
“막내아들 생일잔치에 와 달라는 편지군요.”
“그렇다.”
베르사르 가문의 막내아들 포이른.
녀석의 생일 연회에 얼굴을 비춰 달라는 부탁이었다.
“올해로 7살이라….”
이 시절 포이른은 아직 7살밖에 안 된 어린아이다. 전생 시절 에탄이 마지막으로 봤던 때보다 훨씬 앳되리라.
‘15살에 알 수 없는 병으로 죽었지.’
그리고 포이른은 20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다. 전생 시절 에탄이 기억하기로는 그랬다.
원인 모를 병 때문에 말이다.
‘그때는 운이 없어서라고 생각했지만… 어찌 보면 그게 아닐 수도 있겠어.’
베르사르 가문은 그걸 계기로 빠르게 무너진다. 때문에 마물과 야만족이 쳐들어왔을 때도 제힘에 10분의 1도 발휘하지 못했으니.
에탄은 이 모든 게 누군가의 계획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작년에 이어서 올해도 연회를 연다니. 베르사르 가문도 어지간히 한가한 모양이다.”
그때. 지오반이 한숨을 내쉬고는 마음에 안 든다는 말투로 투덜거렸다.
“그럴 만도 하죠. 포이른은 검술 천재 아닙니까?”
에탄이 그걸 듣고는 픽 웃었다.
지오반이 저러는 이유를 알기 때문이다.
‘자랑이 조금 심하기는 하지.’
베르사르 가문의 막내아들 포이른.
녀석은 검술에 상당히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
그렇기에 베르사르 가문의 가주 베이른은 포이른에게 무한한 사랑을 보였다.
‘그래서 15살에 포이른이 죽었을 때… 베이른은 방에서 한 달을 틀어박혀 지냈다.’
때문에 포이른이 사망했을 때의 충격도 상당했다. 베이른의 몸이 급격히 안 좋아질 정도로 말이다.
“…….”
그 시절을 생각해서일까? 에탄은 자신도 모르게 말이 없어졌다.
“…딱히 너를 탓하는 건 아니다. 그러니 너무 기죽지 말아라.”
지오반이 그걸 보고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에탄의 말수가 없어진 게 자신 때문이라고 착각한 거였다.
“딱히 기가 죽지는 않았습니다. 포이른이 잘난 아이인 건 사실이니까요.”
에탄이 지오반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딱히 포이른에게 열등감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전생 시절의 자신이 아니니까.
“이번 연회에 참가하실 생각입니까?”
“그래. 아무리 지겹다고 해도 이렇게 서신까지 보내는데 무시할 수는 없지.”
“그럼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음?”
대신. 이번 생에는 포이른에게 좀 더 다가가 보기로 했다. 그래야 녀석의 죽음을 막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같이 간다고?”
물론. 이런 에탄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지오반은, 같이 가겠다는 에탄의 말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예.”
“…….”
“못 갈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저한테 이걸 보여 주신 것도 그런 뜻이실 거고요.”
“맞다. 애당초 널 데려갈 마음이 없었다면 여기로 부르지도 않았겠지.”
에탄의 말에 지오반이 수긍했다.
이제는 에탄이 정신을 제법 차렸으니. 대외적인 활동에 에탄을 동행해도 되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이곳으로 부른 거였지만.
“하지만… 이해가 안 가는구나. 너는 딱히 베르사르 가문에 관심이… 아니 그걸 넘어서 싫어하기까지 하지 않았느냐?”
에탄이 베르사르 가문에 자신을 데려가 달라고 하는 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불과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베르사르 가문을 욕하던 그였으니까.
“그럴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제가 더 잘나면 그만이니까요.”
에탄이 지오반의 말에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면서 과거의 자신을 한심하게 여겼다.
지오반의 말대로 베르사르 가문을 싫어했으니까. 단순히 자신보다 뛰어난 이들이 많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된 거 같습니다.”
“음….”
에탄의 말에 지오반이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에탄이 변했다는 걸 실감했다.
과거의 자신의 치부를 인정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한데. 그걸 덤덤하게 말하고 있으니 에탄이 성장했다고 느끼는 게 당연한 거였다.
“좋다. 연회에 동행하는 걸 허락하겠다.”
“예. 감사합니다… 그런데 한 명 더 데려가고 싶은 인원이 있습니다.”
“한 명? 누구를?”
지오반이 에탄의 대답에 두 눈을 끔뻑였다. 그런 지오반을 보면서 에탄이 씨익 미소를 지었다.
“제 자랑스러운 ‘딸’ 아린이를 함께 데려가고 싶습니다. 저도 자식 자랑 한 번쯤은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어서 지오반에게 아린이를 데려가고 싶다고 말했다.
“…….”
지오반이 그 말을 듣고는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올렸다.
“허하겠다.”
그 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아린이의 동행을 수락하고는.
“그러면… 우리도 그쪽한테 뒤지지 않을 정도에 성의는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사악한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에탄이 지오반의 말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군요. 그러면 그에 대해서 한번 이야기를 나눠 보죠.”
그리고 지오반과 마찬가지로 비소를 지었다.
* * *
그렇게 에탄은 지오반과 함께 베르사르 가문의 자식 자랑 반격(?) 회의를 마쳤다.
“모이세르한테 가자.”
그리고 칼라사르 가문의 옷 제작을 책임지는 장인. 모이세르의 가게를 방문하기로 했다.
“지금 말입니까?”
“그래.”
에탄의 말에 정원에서 일을 하고 있던 세바스찬이 두 눈을 끔뻑였다.
에탄이 앞뒤 설명도 없이 모이세르한테 가야 한다고 하니. 의아함을 느끼는 거였다.
“아버지의 명이야. 연회장에 입고 갈 옷을 가져오래.”
“알겠습니다.”
“참고로 연회에는 나랑 아린이도 참석한다.”
“예?”
“이야기를 하다 보니 일이 그렇게 진행됐어. ‘철저히’ 준비하라고 하시더군. 참고로 이번 연회를 위한 예산은… 무제한으로 측정됐다. 내가 뭘 말하는지 알겠지?”
“무슨 말씀이신지 이해했습니다.”
에탄의 말에 세바스찬이 고개를 끄덕였다. 에탄이 말한 속뜻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눈을 반짝이고는.
“그럼. 시녀장 리른을 데려오도록 하겠습니다.”
과거. 아린이의 옷 제작에 총 책임자였던 그녀를 부르기로 했다.
베르사르 가문이 개최하는 이번 연회에 자신들의 ‘성의’를 똑똑히 보이기 위해서 말이다.
* * *
그 시각.
“하압!”
베르사르 가문의 가주 베이른은 연무장에서 30분이 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합!”
자신의 늦둥이 아들인 7살 포이른을 지켜보기 위해서였다.
“포이른의 기세가 날이 갈수록 살아나는구나.”
포이른은 베르사르 가문 내에서도 실력 있는 검사다. 7살이라는 어린 나이가 믿기지 않을 경지였다.
“이대로만 간다면… 오러 기사의 경지까지는 수월하게 올라가겠어.”
그래서 베이른은 포이른에게 많은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이 가문의 날카로운 검이 되어 줄 거라고 확신했다.
“그렇지 않은가? 페르메.”
그런 생각을 하면서, 베이른이 고개를 오른편으로 돌렸다. 그 후 자신처럼 포이른을 빤히 보고 있는 페르메에게 말을 걸었다.
“맞습니다. 가주님.”
페르메가 베이른의 말에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포이른의 성장에 한없이 흐뭇해하는 모습으로 말이다.
“음!”
포이른이 그걸 보고는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베르사르 가문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처럼 포이른에게 큰 기대를 하고 있다는 거에 기쁨을 금치 못하는 거였다.
“…그럼 저는 포이른 님을 위한 약재를 제조하기 위해 먼저 가 보겠습니다.”
그때. 페르메가 포이른을 향해 무덤덤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그래. 자네가 고생이 많군.”
베이른이 그 말을 듣고는 페르메의 어깨를 토닥였다.
“확실히 그 약재가 효과가 있는 모양이야. 날이 갈수록 포이른의 몸이 좋아지는 게 눈에 보이니까.”
“감사합니다.”
“그런데 그런 약재는 어떻게 알고 만들어 내는 건가?”
포이른은 페르메가 만들어 주는 약재를 한 달 전부터 꾸준히 먹어 왔다. 그 때문인지, 눈에 띄게 성장이 빨라지고 있었다.
그래서 베이른은 그 약재의 근원이 궁금했지만.
“그에 대해서는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저번에도 말해 드렸듯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제조법입니다.”
“음… 그렇지. 그래.”
페르메는 그에 대한 답을 회피했다. 하지만 베이른은 그걸 나무라지 않았다. 어찌 됐든 좋은 약재처럼 보이는 건 분명했으니까.
“미안하네. 내가 살면서 그렇게 좋은 약재는 처음 봐서 말이지.”
“감사합니다. 그럼 저는 먼저 물러나 보도록 하겠습니다.”
페르메가 베이른의 말에 씨익 웃으면서 답했다. 그 후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이고는 연무장을 조용히 빠져나갔다.
“…좋은 약재라.”
베이른은 듣지 못할 음산한 혼잣말을 중얼거리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