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1화
빌헬름과 에탄의 대련 날이 찾아왔다.
“도련님이 과연 기사 단장님의 검을 막아낼 수 있을까? 그것도 5번이나.”
“글쎄… 이번에 기사 단장님 눈빛이 살벌하시던데.”
“절대 봐주지 않겠다고 하셨으니까. 아무래도 힘들겠지.”
그리고 곳곳에서 에탄의 이야기가 오고 갔다. 빌헬름의 검을 막아내냐 아니냐로 말이다.
“도련님도 그동안 많이 변하셨어. 얕보면 안 돼.”
“맞아. 잘하면 5번을 막아내실 수도 있을 정도야.”
“하긴… 저번 대련 때도 모두의 예상을 뒤집어엎으셨지. 하지만 5번은 조금 무리이지 않을까 싶기도 한데….”
하나. 가문에 있는 사람들에 의견은 에탄이 빌헬름의 검을 막아내지 못한다에 좀 더 쏠렸다.
빌헬름이 ‘그곳’에서 자신의 몸을 바꿔 왔으니까.
“이게 뭐라고 이렇게까지 떨리는지….”
에탄도 그 사실을 알기에 긴장을 잔뜩 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빌헬름이 얼마나 강한 인물인지, 그 누구보다 에탄이 잘 알고 있었으니까.
똑똑.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키는 순간.
“도련님. 세바스찬 입니다.”
세바스찬이 에탄의 방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들어와.”
에탄이 세바스찬의 말에 답했다. 그 후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린이와 뇽뇽이는 정원에서 잠시 놀고 있었기에, 에탄 혼자 방 안에 있는 상태였다.
끼익.
세바스찬이 방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그 후 혼자 남아 있는 에탄을 보고 싱긋 웃더니.
“생각보다 평온하시군요.”
나지막한 목소리로 첫말을 던졌다.
“그럼 불안에 떨고 있을까?”
“음… 도련님답지 않습니다.”
“봐봐. 그렇게 말할 거면서.”
에탄이 세바스찬의 대답에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콧방귀를 꼈다. 세바스찬이 그 모습을 보고는 눈웃음을 지었다.
“두려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군요.”
그리고 에탄을 향해 무덤덤하게 말했다.
“패배하시면 아린 님이 가문에서 쫓겨날 수도 있습니다. 그게 이 내기의 조건이었으니까요.”
“그렇지.”
“한데… 너무 평온하시군요. 꼭 결과를 알고 있는 사람처럼 말이죠.”
세바스찬의 말에 에탄이 입꼬리 한쪽을 올렸다.
“빌헬름이 그곳에 가 있는 동안, 마냥 놀고 지내지는 않았어. 그건 네가 제일 잘 알 거 같은데.”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군요.”
“보름달이 뜬 밤에 네 기척을 느꼈어. 모른 척해도 소용없다.”
“!”
에탄의 말에 세바스찬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설마 멀리 있던 자신의 기운을 에탄이 알아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씨익.
에탄이 놀란 세바스찬을 보고 한 방 먹였다는 듯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나는 먼저 연무장으로 갈 테니. 너는 아버지를 데려와.”
그 후 세바스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이고, 먼저 방을 빠져나갔다.
“…….”
세바스찬이 자신을 지나치는 에탄의 뒷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허허.”
그러다가 작게 웃어 버리고는.
“알겠습니다. 도련님.”
뒤를 따라나섰다.
가주인 지오반에게 대련이 준비됐다고 말하기 위해.
* * *
칼라사르 가문의 ‘공식’ 연무장.
이곳에 가문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이 다시 한번 모였다.
“3기사들과의 대련 이후로 두 번째 개방인가….”
“심지어 이번에도 에탄 도련님이 주인공이네.”
“게다가 상대방은 빌헬름 단장님이고.”
이렇게 짧은 기간 내에 연무장이 두 번 열린 경우는 최초였다. 그래서일까.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대련을 보기 위해 모여들었다.
터벅터벅!
그리고 이런 연무장 안으로 에탄이 거침없이 들어왔다.
……
그 순간 모두가 합이라도 맞춘 듯 연무장에 정적이 찾아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보다 일찍 도착하셨군요.”
에탄을 기다리고 있던 빌헬름에 의해 고요함이 깨졌다.
“생각보다?”
“예. 저는 사실 도련님이 한 시간 정도 늦게 오실 줄 알았습니다.”
“흐음….”
빌헬름의 말에 에탄이 ‘그렇구나’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들이 보기에는 빌헬름이 비아냥거리는 걸로 오해할 수 있는 발언이다.
‘웃고 있네.’
하지만 에탄은 그게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빌헬름의 입꼬리가 아주 미묘하게 올라가 있었으니까.
게다가 빌헬름을 전생 시절까지 포함하면, 제법 오래 알고 지냈으니 더더욱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그가 어떤 인물인지 말이다.
“나는 빌헬름이 늦게 올 줄 알았어.”
“어째서입니까?”
“나이가 많잖아. 그러니까 허리가 아플 수도 있고… 굳이 더 말할 필요가 있나?”
“하…하하!”
빌헬름이 에탄의 말에 호쾌하게 웃었다. 그 후 자신의 도발을 두 배로 받아친 에탄을 쳐다보면서.
“신기하군요. 사람이 몇 달도 안 돼서 이렇게까지 변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해가 안 갑니다.”
두 눈을 반짝였다.
에탄의 달라진 모습과 패기에 감탄했으니까.
“저번에도 그 말 했던 거 같은데.”
“원래 나이가 들면 같은 말을 반복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내가 넓은 아량으로 이해를 해 줘야 겠구만.”
“…….”
빌헬름이 에탄의 말에 두 눈을 가늘게 떴다. 그 후 무어라 말하려는 순간.
“가주님 들어오십니다.”
세바스찬의 목소리가 사람들의 귓가에 들렸다.
그 순간 연무장에 있는 모든 사람이 입을 닫고.
척!
자리에서 일어났다.
“…흠.”
그렇게 연무장이 조용해지자, 빌헬름이 자신의 턱을 쓸어 만지면서 등장했다.
“다들 모여-”
“아빠!”
이어서 연무장에 있는 이들에게 말을 하려는 순간.
“아빠 힘내요! 빌헬름 할아버지한테 패배하지 마세요!”
지오반을 따라 들어온 아린이가 힘찬 목소리로 외쳤다. ‘아빠 힘내요.’라고.
허억.
아린이의 말에 모두의 동공이 확장됐다. 가주인 지오반의 말을 끊어 버리다니. 그 누구도 엄두조차 내지 못한 일을 아린이가 해 버렸으니까.
“……”
물론. 에탄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자. 아린이가 지오반의 손을 꼭 잡고는 뒷말을 이었다.
“으음. 가주님. 아빠가 아린이 말이 잘 안 들렸나 봐요.”
“딸의 응원을 무시할 셈이냐.”
지오반이 아린이의 말을 듣고는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그럼 얼른 대답해 주거라.”
“…….”
그리고 대답을 해 주라고 말하는 순간. 연무장에 있는 모두가 놀랬다. 냉혈한 가주. 지오반이 저런 말을 할 줄은 몰랐기에.
‘어지간히도 아린이가 좋으신가 보네.’
하지만 이해는 됐다. 그동안 지오반이 보여 준 모습이 있으니까.
‘그래… 아들이라는 놈이 허구한 날 술만 퍼마시고 댕기는 모습만 보다가, 저렇게 귀여운 손녀가 생기면 얼마나 좋겠어. 나라도 저런 반응을 보일 거야.’
에탄은 자신의 과거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지오반이 어떤 심정으로 아린이를 바라보고 있을지 훤히 보였다.
“그래. 아린아. 아빠가 빌헬름 할아버지를 멋지게 이겨 줄게!”
그래서 편하게 아린이의 응원에 반응을 보였다.
“네!”
아린이가 에탄의 대답에 활짝 웃었다. 연무장에 있는 몇몇 사람들이, 아린이의 모습에 심장을 움켜잡았다.
“대화는 거기까지다.”
물론. 지오반은 예외였다.
가주로서 품위를 지켜야 하는 그였기에, 다른 이들처럼 명확한 반응을 보일 수 없었다. 그저 입꼬리를 아주 작게 올리는 게 전부였다.
‘뇽뇽이는… 아린이가 지오반의 손을 잡은 걸 빤히 쳐다보고 있네.’
그리고 뇽뇽이는 아무 말 없이 아린이의 손을 빤히 쳐다봤다. 지오반을 꼭 붙잡고 있는 작은 손가락들을 말이다.
“대련을 하는데 별다른 문제는 없겠지.”
그때. 지오반이 에탄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예.”
“빌헬름. 그대는 어떤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고 빌헬름한테도 똑같은 질문을 하고는, 돌아오는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빌헬름의 검을 5번 받아 내면 에탄. 네 녀석의 승리다. 하지만 그러지 못한다면… 뒷말은 안 해도 알겠지.”
“예.”
“좋다. 대련을 시작해라.”
빌헬름이 말을 끝마치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제서야 서 있던 이들이 빌헬름을 따라 착석했다.
“…드디어 이 순간이 왔군요.”
그리고 지오반을 쳐다보던 빌헬름은, 에탄을 향해 고개를 돌림과 동시에.
쓰릉!
자신의 검을 빼 들었다.
기다렸던 순간이 와서 기뻐하는 어린아이처럼.
“그러게 말이야.”
에탄이 빌헬름의 들뜬 모습을 보고 씨익 웃었다. 동시에 빌헬름처럼 검을 쥐어 잡고는.
“오랜만에 재미지게 놀아 보자고.”
온 힘을 다해 빌헬름에게 달려들었다.
* * *
내기의 내용은 간단하다.
에탄이 빌헬름의 검을 5번 막아내면 에탄의 승리고 반대는 패배다.
‘하지만 내가 가만히 맞고만 있으라는 법은 없지.’
그러나. 거기에 에탄은 빌헬름을 공격하지 말아야 한다는 규칙 같은 건 존재하지 않았으니.
부웅!
에탄은 빌헬름을 있는 힘껏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살기를 잔뜩 담아서 말이다.
까앙!
빌헬름이 에탄의 검을 막아냈다.
철과 철이 부딪히면서 나는 소음이 연무장에 울려 퍼졌다.
“역시군요.”
이어서 빌헬름의 말이 에탄의 귀에 들려왔다. 이미 이렇게 행동할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기에. 빌헬름은 크게 놀라지 않았다.
“하지만 도련님의 뜻대로 되지는 않을 겁니다. 저는 5번의 공격을 쉽게 허비하지 않을 생각이니까요.”
그리고 에탄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그가 어떤 전략을 짜 왔는지 훤히 보였으니까.
“그래?”
에탄이 그 말을 듣고는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럼 어디까지 참을 수 있나 보자고.”
이어서 개구쟁이처럼 뒷말을 잇고는 검날을 바닥으로 향했다.
파팍!
이어서 연무장 바닥에 있는 돌과 흙을 위로 올려 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빌헬름의 시야가 흙먼지로 가려졌다.
“흥!”
때문에 빌헬름의 시야가 급격하게 작아졌지만, 그는 당황하지 않았다.
노련한 기사한테 이 정도 술법은 얕은 물에 발을 담그는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대비해야 한다.’
그래서 침착하게 다음 공격에 방어할 수 있는 자세를 취했는데….
“……?”
에탄의 후속타가 이어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짓입니까?”
빌헬름이 그것에 의아함을 가졌다. 동시에 검을 허공에 휘둘러, 시야를 가리는 흙먼지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글쎄.”
그러자 멀찌감치 서 있는 에탄의 모습이 빌헬름의 시야에 들어오게 됐다. 에탄이 그걸 확인하고는 어깨를 으쓱였다.
이어서 자신을 빤히 쳐다보는 빌헬름을 향해.
“빌헬름. 너무 재미가 없어.”
“?”
“이렇게 얕은수도 사전에 방지하지 못하고 있잖아. 그래서 내가 좀 봐줘야겠다 싶은 생각이 머릿속에 들었거든.”
한쪽 눈꼬리를 올리면서 도발을 걸었다. ‘압도적인 강자로서 너를 봐주겠다.’라는 느낌으로 말이다.
“…호오.”
빌헬름이 에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에탄의 도발이 아주 잘 먹혔다는 증거였다.
‘좋았어.’
그래서 에탄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하지만….
“잘 알겠습니다. 도련님. 아니. 에탄. 지금 이 순간부터 대련이 끝날 때까지 당신은 제가 죽여야 하는 적입니다.”
이어지는 빌헬름의 말을 듣고는.
“어?”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