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2화
겨울 공주.
아린이의 새로운 모습을 보는 순간 에탄의 머릿속에 저 단어가 떠올랐다.
차가운 눈이 내리는 북부에 있는 성에서 생활하는 공주가 말이다.
“세상에…….”
누군가는 이를 아버지의 지극한 딸사랑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아무리 옷이 바뀌었다고 해도, 에탄처럼 놀라는 게 흔한 건 아니니까.
“아린아…….”
하나. 에탄의 외모를 쏙 빼닮은 아린이는 예외였다. 보석 같은 눈동자에 뽀얀 피부를 가진 아린이의 모습은 그야말로 세계 최고라고 해도 될 정도였다.
“아빠가 미안했다.”
그런데 이런 아린이한테 실력 좋은 옷 장인의 손길이 더해지니. 천사한테 날개를 달아주는 격이나 다름없었다.
“좋네…좋아.”
머리카락과 똑같은 백색의 드레스. 그걸 입고 있는 아린이의 모습은 아름다움 그 자체였다. 옷과 머리카락의 색깔이 일치하니, 마치 원래부터 한 몸이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거기에 붉은 보석으로 눈길까지 끌게 해주니까… 장인이라 불리는 이유가 있구나.’
자칫하면 단조로워 보일 수도 있는 드레스다. 하지만 모이세르는 그 점까지 고려해서 드레스를 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실력 좋은 보석 장인이 만든 붉은 보석입니다. 이걸 드레스에 달아줌으로써 좀 더 색조를 살렸습니다. 회귀한 녀석이니 어디 가서도 주목을 받을 겁니다.”
그만큼 재료 투자를 아끼지 않은 거였다.
“…아린이한테 그동안 평범한 옷만 입힌 게 미안하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에 옷을 사줄걸.”
“우웅? 그게 무슨 말이에요. 아린이는 이미 옷 있잖아요.
그때. 아린이가 에탄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반문했다.
“새 옷이 아린이랑 너무 어울린다는 뜻이야.”
“으응! 아빠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아린이 기분이 너무 좋아요!”
그리고 이어지는 에탄의 칭찬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크헉!”
“심… 심장이!”
“나는 눈이 너무 부셔!”
아린이의 호위를 자처한 1기사들이 그 모습을 보고는 즉각 반응했다. 어디가 아픈 듯이 자신의 신체를 만지면서 말이다.
“아아… 전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모이세르 또한 마찬가지였다.
장인으로 이룰 수 있는 최고의 쾌감을 경험했기에. 그는 더 이상 여한이 없었다.
“모이세르 님. 아직은 이릅니다. 아린 님의 옷을 계속 책임지셔야죠.”
하나. 시녀장 리른의 말에 두 눈을 번쩍였다.
“아! 방금 했던 말은 취소하겠습니다.”
아린이의 어린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그 모든 순간에 기여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으니까.
“모이세르. 옷은 이게 끝인가?”
에탄이 삶을 이어 나가야 하는 이유를 방금 막 얻어 낸 모이세르에게 질문했다.
“예. 아쉽게도 그렇습니다.”
“으음…그렇구만.”
에탄이 아쉽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 같으면 이 자리에서 아린이의 옷을 최대한 많이 가져가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빨리 나머지 옷을 만들어서 보내드리겠습니다. 에탄 도련님.”
모이세르가 에탄의 마음을 눈치채고는 뒷말을 붙였다.
“그리고…한 가지 부탁 좀 드려도 되겠습니까?”
“말해봐.”
“혹시 조금의 자비를 베풀어주실 수 있다면… 제가 제작한 옷을 입은 아린 님의 모습을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직접 보고 싶다고?”
“예.”
에탄의 반문에 모이세르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 아린이는 여기 자주 오고 싶어요. 저 이상한 아저씨가 주는 옷들이 마음에 들거든요.”
그 후 입을 열려는 순간,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아린이가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았다. 이 가게에 계속 해서 오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 아린이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
“정말요?”
“응. 어차피 옷 수선도 가끔 해줘야 하거든. 그때 아빠랑 같이 이곳에 오면 될 거 같아.”
“좋아요!”
아린이가 에탄의 말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에탄 도련님.”
그리고 이야기를 듣고 있던 모이세르의 얼굴에도 미소가 번졌다.
그의 꺼져가던 열정에 불씨가 붙는 순간이었다.
* * *
“제법 화려한 옷을 샀구나. 보석도 많이 들어가 있고… 돈이 많이 깨졌겠군.”
에탄은 아린과 함께 가문으로 돌아왔다. 그 후 지오반이 말했던 대로 아린이의 변화된 모습을 그에게 가장 먼저 보여줬다.
“이 옷을 제외하고도 10벌이 넘는 옷을 제작하기로 했습니다.”
“10벌?”
“예. 그 이상은 아린이가 성장기라서 맞추는데 무의미할 거 같아서요. 그래서 10벌로 제한했습니다.”
“흐음…….”
지오반이 에탄의 말에 무덤덤한 ‘척’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는 걸 통해, 에탄은 지오반이 아주 흡족해 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좋다. 나머지 옷도 도착하는 대로 보여주거라.”
“예.”
그래서일까.
지오반이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음에도. 에탄은 마음이 쓰이지 않았다.
이미 지오반도 아린이의 매력에 넘어간 게 눈에 보였으니 말이다.
“어머…아린 님 너무 예쁘시다!”
“세상에 어쩜 이리 공주 같으세요?”
“앞으로도 이렇게 입고 다니기로 해요. 약속이에요 약속!”
그렇게 가주실에서 빠져나오고, 에탄은 아린이의 변화한 모습을 하녀들에게도 보여줬다.
그러자 하녀들이 아린이를 귀여운 인형 보듯이 쳐다봤다.
“아린이 예뻐요?”
아린이 하녀들의 반응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면서 물었다. 자신이 귀엽다는 걸 알고 묻는 게 아닌, 정말 진심으로 몰라서 질문하는 표정이었다.
“네네!”
“진짜 세상 그 어떤 아이보다 예뻐요!”
그래서 더더욱 귀여웠다.
계산된 행동이 아닌, 자연스러움에서 나오는 매력이었으니까.
‘아주 좋구만.’
에탄이 그 모습을 보고 뿌듯함을 느끼는 건 덤이었다.
* * *
그렇게 동네방네 자랑(?)을 한 뒤 에탄은 수련실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성장 속도가 느려지고 있어. 포션으로는 한계가 있다.’
자신의 몸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그걸 통해서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이 속도로는 야만족을 막아내기 버겁다.’
헤와른이 만든 포션에 이어서 또 다른 기연을 얻을 때가 왔다는 거였다.
“죽기 전 마지막에 느꼈던 힘…그 힘을 다시 한번 이용하기 위해서는 오러를 최대한 빨리 얻어낼 필요가 있어.”
아린이를 통해서 발현됐던 미지의 힘. 에탄은 그것을 최대한 빨리 손에 넣고 싶었다. 그래야 야만족과 악마들을 무사히 처리할 수 있을 테니.
‘이제 슬슬 그곳을 가볼까.’
다음 기연이 있는 장소로 발걸음을 움직이기로 했다. 그곳은 바로…
‘나이아 호수. 거기에 답이 있다.’
나이아 라는 이름을 가진 산속 깊은 곳에 있는 호수였다.
* * *
나이아 호수. 에탄이 이 호수로 제일 처음 발걸음을 움직인 이유는 간단하다.
‘가까우니까.’
가문 외부에서 제일 빠르게 도달 할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위험 요소도 크게 없지.’
게다가 나이아 호수는 무지막지한 힘을 가진 존재들이 지키는 장소도 아니니. 어느 정도 몸의 기반이 다져진 에탄이 가기에 적합한 곳이었다.
“아빠! 친구가 바깥세상에 나와서 기분이 너무 좋데요!”
“그래? 그거 참 다행이네. 아린이는 어때?”
“저도 좋아요. 하늘이 맑아서 마음도 편안해지고요!”
아린이가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하얀 먹구름들이 둥실둥실 떠다니고 있었다.
‘이번 일이 아린이한테도 좋은 경험이 되겠지.’
에탄이 그 모습을 보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아린이를 데리고 나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맨날 나가는 곳이 한정되니까 답답했을 거야.’
가문 내부에 있는 시설이나 마을.
이 두 군데가 아린이가 가본 곳의 전부다. 에탄은 그 점이 마음에 걸려서 아린이를 호수로 데려가는 거였다.
“아빠 옆에 잘 붙어있어야 한다. 아무리 호수에 위험한 녀석들이 없다고 해도… 날짐승이 돌아다닐 확률은 무시할 수 없으니까.”
“네! 아린이 아빠 옆에 꼬옥 붙어있을게요!”
아린이가 말을 마치고는 에탄의 옷깃을 꼬옥 잡았다. 그 모습을 본 에탄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그러면서 거침없이 앞으로 움직였다.
.
.
.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서 마차를 구하자.”
나이아 호수로 가기 위한 마차를 구하기 위해 어떤 마을 안으로 들어갔다.
* * *
에탄이 차분히 마을 광장을 살펴봤다. 아직 저녁도 되지 않은 이른 시간이기에. 제법 많은 사람이 거리에 있었다.
‘이 마을도 마물들이 몰려올 때 멸망했지.’
에탄은 이곳을 전생에 와본 적이 있었다. 마물들을 막기 위한 전초 기지로 활용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로 인한 결과는 썩 좋지 않았지만.
‘아직은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이번 생에는 바꿀 자신이 있기에, 크게 걱정하지 않았다.
“아빠. 저기 마차들이 모여 있어요. 저기로 가면 되는 거예요?”
아린이가 광장 옆에 있는 마구간을 손으로 가리켰다. 마부 한 명과 마차 한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움직이자.”
“네!”
에탄이 그 모습을 확인하고, 아린이와 함께 마구간으로 발걸음을 움직였다.
“그거 들었어? 어제도 산적들이 마차를 약탈했다고 하더군.”
“벌써 10대 이상의 마차가 손해를 봤다고 하는데…….”
“조만간 왕국에서 경비대를 보낸다고 하니까. 그때까지만 버텨 보자고.”
그러면서 마을 사람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었다. 약탈이 기승을 부리고 있는지, 여기저기서 산적에 대한 말이 나오고 있었다.
“나이아 호수로 가고 싶은데. 혹시 가능하십니까?”
에탄이 그 말들을 들으면서 마구간에 있는 마부에게 말을 걸었다. 굳이 신분을 드러낼 필요가 없기에 후드를 뒤집어 쓴 채로 말이다.
“나이아 호수라…가능은 합니다만. 보시다시피 마차가 작아서 많은 사람이 탈 수는 없습니다.”
“저와 이 아이 두 명뿐입니다. 1골드를 보수로 드릴 테니 데려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마부가 에탄의 말에 몸을 멈칫했다. 아주 잠깐의 변화였다. 하지만 에탄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마부가 그 사실을 모르고 에탄을 향해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출발은 언제 하시겠습니까?”
이어서 자연스럽게 일정을 물었다. 에탄이 그런 마부를 빤히 바라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가능하면 지금 바로 움직이고 싶군요. 할 일이 제법 많이 있어서 말이죠.”
“바쁘신 몸이군요. 때마침 말들의 상태도 나쁘지 않으니 원하신다면 당장 출발할 수 있습니다.”
“그럼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에탄이 마부의 말에 고개를 꾸벅였다.
‘…….’
동시에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가는 마부의 변화를 발견했다.
* * *
덜커덩!
마부는 에탄과 아린을 태우고 마을을 빠져나왔다. 그 후 해가 지고 밤이 되었을 때, 산길을 타기 시작했다.
“나이아 호수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그렇군요.”
그러면서 에탄을 안심시키려는 듯이 설명했다. 이쪽 길을 타면 나이아 호수까지 더 빠르게 갈 수 있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
실제로 맞는 말이었다.
에탄 또한 나이아 호수를 갈 때는 이 길을 애용했었으니까.
“밤이 늦었는데 눈이라도 잠깐 부치시지요. 저는 잠이 없어서 괜찮습니다.”
“그럼 실례 좀 하겠습니다.”
마부의 권유에 에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후 먼저 잠든 아린이의 손을 잡고는 눈을 감았다.
“…….”
마부가 그 모습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
.
.
그리고 약 한 시간이 지났을 때.
쓰윽.
마부가 자신의 품속에서 포승줄을 꺼냈다. 사람을 포박하기 위한 용도로 제작된 줄이었다.
덜컹.
동시에 마차를 멈추고는.
딸깍! 딸깍!
마차에 달려 있는 랜턴을 3번 깜박였다. 그 후 운전석에서 내리고.
터벅. 터벅.
“크흐흐.”
비릿한 웃음소리를 내면서 에탄과 아린이 잠들어 있는 뒷좌석으로 다가갔다.
끼익.
그 뒤 뒷좌석의 문을 여는 순간.
쓰릉!
“히… 히익!”
에탄의 검이 마부의 목을 겨누었다.
“지금부터 내 질문에 대답을 잘 해야 할 거야.”
그리고 싸늘한 에탄의 목소리가 마부의 귀에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