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화
“그래… 아린이 옷 사는 거 좋아. 여러 벌 살수도 있지. 사람이 어떻게 한 벌만 주구장창 입고 다녀.”
에탄이 눈을 감았다.
그후 리른이 하는 주장에 이해한다는 듯 답했다.
리른이 펼치는 말들이 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리른. 뭐든지 일에는 정도가 있는 법이야.”
하나. 그거와는 별개로 에탄도 반박할 게 있었다.
아무리 자신이 지갑 역할로 이곳에 참석한 거라고 해도.
“그래도 100벌은 조금 너무하지 않니? 심지어 모이세르 혼자서 만드는 거잖아. 그거 다 제작하려면 못해도 1년은 걸릴 거 같은데?”
아린이 옷을 100벌이나 만드는 건 조금 과한 거 같았으니까.
“게다가 아린이는 5살이야. 어린 애일수록 성장 속도가 빠르다는 거 몰라?”
만약에 아린이가 20살. 아니. 하다못해 10대이기만 해도 에탄은 반대하지 않았으리라. 그때쯤이면 100벌을 사도 몇 년을 입을 수 있으니까.
“지금부터 100벌 만들면 내 장담하는데 전부 다 못 입어. 하루 만에 100벌을 준비할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맞는 말이네요.”
리른이 에탄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아린 님에게 새 옷을 줄 수 있다는 것에 잠깐 이성이 나갔던 거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도련님.”
그 후 에탄을 향해 빠르게 사과했다.
“에탄 도련님의 말이 맞습니다. 제 손이 아무리 빨라도 100벌을 만들려면 1년은 넘게 걸리겠지요.”
모이세르 또한 에탄의 말에 납득 했다.
그래서 리른과 에탄을 향해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100벌은 많으니, 현실적으로 타협해서 계절마다 10벌은 어떻습니까? 지금은 무더운 여름이니 아린 님이 시원하게 입을 수 있는 재료로 옷을 제작해드리겠습니다.”
“저는 좋아요.”
리른이 모이세르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사실 10벌도 제법 많은 수준이었다.
모이세르가 만들어 준다는 가정 하에는 말이다.
‘모이세르한테 10벌을 맡길 돈이면. 일반 옷가게에서 50벌은 넘게 사겠지.’
실력이 뛰어난 장인인 만큼.
재료도 평범한 것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걸로 옷을 만들리라. 그렇기에 가문의 돈이 많이 빠져나가는 건 변함이 없겠지만.
“그래. 한 계절당 10벌로 하자.”
에탄은 더 이상 옷의 개수를 줄이지 않기로 했다.
지금 나가는 돈은 자신만 알고 있는 기연들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복구할 수 있으니까.
‘게다가 아린이한테 쓰는 거잖아. 아끼지 말자.’
그리고 에탄 또한 아린에게 투자하는 거라면.
돈이 얼마가 나가든 크게 상관하지 않았다.
다만. 100벌은 현실적으로 전부 입을 수 없기 때문에 막은 거였다.
‘불필요한 지출은 하지 말자.’
아린이한테 들어가는 돈이 아깝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돈을 허공에 뿌리겠다는 뜻은 아니다. 칼라사르 가문의 재산이 곧 에탄의 것이기도 하니까.
“그러면 10벌로 합의하는 걸로 하겠습니다.”
“좋아요.”
“나도 찬성이다.”
모이세르의 말에 리른과 에탄이 다시 한번 동의를 표했다. 그 모습을 보고 모이세르가 결의를 다짐한 듯 ‘음’ 소리를 내면서 표정을 굳혔다.
“원래 같으면 여기서 거래가 끝나고… 가문으로 10벌을 보내드리겠지만. 여기서 아린 님을 빈손으로 보내는건 제 마음이 용납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에탄 도련님만 허락하신다면. 이 자리에서 아린 님이 입을 수 있는 옷 한 벌을 만들고 싶다는 뜻입니다. 지금 아린 님이 걸치신 옷보다 더 좋은 걸로 말이죠.”
이어서 에탄에게 한 가지를 청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아린이의 옷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는 거였다.
“시간은 얼마나 걸리지?”
“마침. 가게에 아린 님한테 어울릴법한 재료와 구상한 옷의 도안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러니 1시간이면 충분합니다.”
1시간. 가게에 가만히 앉아서 기다 리만 있기에는 조금 긴 시간이다.
“좋아. 그럼 만들고 있어. 겸사겸사 나도 내 볼일 좀 처리하고 올 테니까.”
하지만 에탄은 그 시간 동안 할 게 있기에. 모이세르의 부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감사합니다!”
모이세르가 에탄의 대답에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고 해도 될 정도로 숙였다.
피식.
그 모습을 본 에탄이 작게 웃었다.
이어서 아린이에게.
“아린아. 여기 리른이랑 저 사람이 아린이를 위한 옷을 만들어 줄 거야. 그러니까 말 잘 듣고 있어야 한다?”
잠시 자리를 비우겠다는 말을 이었다.
“아빠는요?”
“아빠는 어디 좀 들렸다가 올게.”
“으음… 아린이 아빠랑 같이 있고 싶은데.”
“말 잘 듣고 있으면 설탕 사탕 하나 줄게.”
“조심히 다녀 오세요!”
설탕 사탕을 준다는 에탄의 말에 아린이가 활짝 입꼬리를 올렸다. 아빠랑 떨어지는 건 싫지만 설탕 사탕을 받는다면 이야기가 달라지는 거였다.
“좋아. 그럼 금방 갔다 올게.”
아린이의 반응에 에탄이 속으로 안심했다.
그 후 1기사들에게 아린을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건물을 빠져나와.
“오랜만이야 헤와른.”
연금술사 헤와른의 가게로 향했다.
* * *
“흐음… 에탄 도련님은 또 언제 오실려나.”
헤와른이 카운터에 앉아 멍을 때렸다.
그러면서 자신한테 3골드를 주고 떠난 에탄을 떠올렸다.
“슬슬 생활비가 떨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지극히 현실적인 거였다.
생활에 쓸 자금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었으니까.
“오신다고 해서 포션 준비까지 했는데. 설마 이대로 안 오시는 건 아니겠지?”
헤와른의 머릿속에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때 했던 말이 헤와른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였다면?
‘안 돼.’
그래서 일부로 포션을 더 많이 만들라고 한 거였다면…
‘저걸 사갈 사람도 없는데!’
대참사 그 자체였다.
5병을 만드는데 들어간 돈만 1골드가 넘어갔으니까.
때문에 헤와른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하려는 순간.
딸랑!
“오랜만이야 헤와른.”
종소리와 에탄의 목소리가 가게에 함께 울려 퍼졌다.
“드디어 오셨군요!”
헤와른이 에탄의 등장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 후 황금을 바라보는 상인의 눈빛으로 에탄을 쳐다봤다.
‘눈동자에서 탐욕이 아주 흘러 넘치네.’
에탄이 그 모습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이토록 돈에 충실한 연금술사가 또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헤와른이 재물욕이 싫지는 않았다.
덕분에 이렇게 헤와른을 자신의 편으로 꼬드기고 있는 거니까.
“포션 5병 준비했어요. 저번에 제조했던 것과 완전 똑같은 거로요.”
헤와른이 에탄을 향해 포션을 구비했다고 말했다.
그 후 에탄이 대답을 하기도 전에, 안쪽에서 5병의 포션이 들어있는 상자를 꺼내왔다.
‘행동력 하나는 정말 빠르네.’
역시 돈이 걸려있어서 그런지 움직이는 속도가 예사롭지 않았다.
“구매하시는 거죠?”
“왜. 아니라고 대답하면 포기하게?”
“…….”
“농담이야. 표정 풀어.”
에탄의 농에 헤와른의 얼굴이 싸늘해졌다.
그걸 본 에탄이 낄낄 웃으면서 농담이라고 말했다.
“저한테는 생계가 걸려있는 문제라고요.”
“그래서 3골드 줬잖아.”
“…항상 감사합니다. 손님!”
그리고 이어지는 에탄의 지적에 헤와른이 자본주의 말투로 답했다. 에탄이 그걸 보고는 역시 독특한 연금술사 답다고 생각했다.
“페테우스의 뿔. 모티르스의 눈알. 그리고 순록의 뼛가루 좀 합성해서 가져와. 개당 10개씩 넣어서 총 30개.”
그러면서 헤와른에게 다른 추가 주문들을 넣었다.
“갑자기 그것들은 왜요?”
“쓸 데가 있으니까 만들라고 하는 거겠지.”
“맞는 말이네요.”
에탄의 대답에 헤와른이 납득한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만들어 올게요.”
이어서 공방 안으로 들어가더니.
“완성했어요.”
10분도 지나지 않아 큰 통 하나를 들고나왔다.
에탄이 말한 재료들을 모두 합친 액체가 담겨 있는 통이었다.
“빠르네.”
“이래보여도 어느 정도 구른 연금술사니까요.”
“하긴. 그러니까 포션도 제조하는 거겠지.”
비록. 헤와른이 자금난에 허덕이는 연금술사라고 하지만, ‘나름’ 실력이 있다. 나중에 가면 더욱더 빛을 발휘하게 될 운명이고 말이다.
“…생각해보니까 포션이 효과가 있던가요?”
“왜?”
“제가 만들고 실험해 봤을 때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거든요.”
헤와른이 말을 끝내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후 아무말 없이 에탄을 빤히 쳐다보다가.
“…원하시면 구매 안 하셔도 돼요. 아무런 효과도 없는 포션을 팔아서 먹고살 만큼 자존심이 없지는 않아요.”
에탄이 바란다면 포션을 강매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에탄이 픽 웃었다.
“실패인지 아닌지는 내가 판단해.”
“네?”
“그러니까 넌 내가 말하는 대로만 하면 돼. 만들라면 만들고 조합하라면 하고. 그게 내가 너한테 돈을 주는 이유니까.”
“…어째서 그렇게 하시는 거죠? 이해가 안 가요.”
헤와른이 미간을 찌푸렸다.
3골드.
솔직히 그 돈이면 자신이 만든 포션보다 몇십 배는 더 좋은 물건들을 얻을 수 있다.
한데. 굳이 자신한테 추가로 돈을 주면서까지 가져가려고 하니.
“동정심인가요.”
자신이 불쌍해서 이리 행동하는 건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는 게 그녀의 입장에서는 당연한 거였다.
쓰윽.
에탄이 헤와른의 말에 품속에서 돈을 꺼냈다.
그 후 그녀한테 내밀면서.
“아니.”
간단명료하게 아니라고 답했다.
그리고 헤와른이 입을 다시 열기도 전에.
“나는 그런 이유로 너한테 돈을 주는 게 아냐. 그래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 넌 늘 하던 대로 만해.”
단호한 목소리로 뒷말을 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가게에 올 때는 알게 될 거야. 내가 왜 너한테 포션을 구매했는지.”
그럼에도 헤와른이 의문을 표하려고 하자.
에탄이 그녀의 미래를 아주 살짝 알려줬다.
“…알겠어요.”
그제야 헤와른이 질문 공세를 포기했다.
“이건 아공간 주머니에 담아서 드릴게요. 앞으로도 오신다고 했으니까 특별히 해드리는 거예요.”
그 후 자본주의 얼굴로 자연스럽게 대화의 분위기를 바꿨다. 에탄이 그 모습을 보고는 픽 웃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역시 될 놈은 새싹부터 다르다니까.’
헤와른은 확실히 다른 연금술사들과는 다르다고.
.
.
.
그리고 아공간 주머니와 함께 모이세르의 가게로 돌아가는 순간.
“…!”
툭!
에탄은 자신도 모르게 손에 들고 있는 아공간 주머니를 떨어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