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9화
“아버지. 돈이 좀 많이 필요합니다. 어차피 저 부르신 이유가 이번 대련의 결과를 보고 상을 주시려는 거라는 걸 알고 있습니다.”
“…….”
지오반이 에탄의 말에 몸을 멈칫했다.
그 후 아무런 대답도 없이 에탄을 빤히 바라봤다.
3자들이 보기에는 감정의 변화가 없다고 해도 될 정도로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찔리셨구만.’
에탄의 눈에는 지금 지오반이 ‘당황’ 하고 있다는 게 눈에 보였다. 당연한 거였다. 지오반과 함께한 시간만 몇십 년이지 않은가?
‘함께 살다 보면 알 수밖에 없지.’
그러니 지오반의 미묘한 감정 변화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는 거지?”
하지만 지오반은 그 사실을 알 리가 없으니 무덤덤한 척 에탄을 향해 반문했다. 이미 모든 게 들통났다는 것도 모른 채 말이다.
씨익.
에탄이 그 모습을 보고는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동시에 이번만큼은 자신이 대화의 주도권을 거머쥐었다고 확신했다.
“그런 연유가 아니라면 벌써 화를 내셨을 테니까요.”
“…….”
“지금도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까?”
에탄의 지적에 지오반이 입을 다물었다.
그 후 탁자에 있는 서류 뭉치를 아무 말 없이 왼편으로 치워 버렸다.
“흠.”
이어서 헛기침을 내뱉었다.
지오반 나름대로 당황한 걸 숨기기 위한 위장 행동이었다.
“제가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뿐입니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탄은 이미 지오반이 자신을 부른 이유를 눈치챈 지 오래였기에 자신의 말을 이어 나갔다.
“돈 좀 주시면 좋겠습니다.”
“뭐라고?”
“돈이 필요합니다. 아주 많은 돈이 말이죠.”
에탄의 말에 지오반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나 하는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아직도 거기서 빠져나오지 못한 것이냐.”
돈을 가지면 항상 유흥과 도박에 사용해 왔던 에탄이니, 의심이 자연히 따라올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그걸 눈치챈 에탄이 어깨를 으쓱이며 뒷말을 붙였다.
“그럼 왜 돈이 필요하다고 하는 거냐?”
“꼭 쓸 곳이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예를 들자면… 더 빠르게 강해지기 위해서라고 하는 게 맞겠군요.”
지오반이 에탄의 대답에 눈을 가늘게 떴다.
강해지기 위해서 돈을 요구한다.
명목은 그럴싸했다.
다만. 에탄에게 지원을 해 주는 건 순전히 지오반의 마음에 달린 문제였다.
“네 녀석도 알겠지만. 이번 대련은 네가 하자고 한 것이다.”
“예.”
“그리고 승리를 한다고 해서 상을 준다고 말한 적도 없다.”
“알고 있습니다.”
에탄이 지오반의 주장에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긍정했다. 다 맞는 말이었으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에탄의 개인적인 이유에 의해서 이뤄진 대련이었다.
“하지만 이걸로 어느 정도는 증명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바뀌었다는걸?”
“예. 그러니 저를 이렇게 부르신 거 아닙니까? 정말 완전히 변했는지 확인하려고 말이죠.”
그러나 이걸 통해서 에탄은 지오반에게 하나를 확실하게 인식시켰다. 자기는 이제 망나니가 아니라는 거였다.
‘엄밀히 따지면 모두한테 증명한 거지.’
정확히 말하면 지오반뿐만이 아니라, 가문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보여 준 거라 한 게 맞으리라. 그 자리에서 에탄의 모습을 보고 놀라지 않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으니까.
“그러니 눈 딱 감고 한 번만 도와주시죠.”
에탄이 세바스찬한테 받아 낸 돈이 그동안 꽤 됐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사실. 그동안은 세바스찬한테 어거지로 받아 내 왔습니다. 아버지한테 아무리 말해 봤자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테니까요.”
“얼마나 가져갔느냐?”
“10골드는 넘게 착취했습니다. 물론 그걸 유흥에다가 사용한 건 아닙니다. 개인적으로 필요한 물건과 아린이를 위해서 모두 소비했습니다.”
에탄의 대답에 지오반이 신기하다는 듯 두 눈을 끔뻑였다.
“그 고지식한 세바스찬이 그런 이유로 돈을 줬다고?”
이유는 간단했다.
세바스찬은 아무리 에탄이 졸라도 돈을 턱턱 내어 줄 인물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린이 앞에서는 세바스찬도 한없이 약해지더군요.”
“흠….”
하지만 이어지는 에탄의 대답에 납득하고 말았다.
지오반 또한 아린이가 얼마나 귀여운지 알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슬슬 세바스찬한테 미안한 감이 들고 있습니다. 그러니 돈 좀 주시죠.”
하나. 아무리 세바스찬이 돈을 준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그러니 이제부터라도 지오반에게 받아 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빨리 전생의 힘을 되찾아야 뭐든 수월하게 해낼 수 있어.’
그래야 자신이 전생에 이뤘던 경지까지 빠르게 올라갈 수 있을 테니까.
“…좋다.”
지오반이 에탄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는 에탄을 그저 가문의 수치로 생각했지만, 3기사들과의 대련을 통해 녀석이 바뀌었다는 걸 느꼈다.
“당돌하게 요구하는 게 마음에 드는구나.”
게다가 자신을 보고도 겁을 먹지 않는 에탄의 행동과 눈빛. 그것들이 지오반의 마음을 완전히 움직였다.
쓰윽.
지오반이 자신의 품속에서 열쇠 하나를 꺼냈다.
“이걸 가져가거라. 어디에 쓰는 건지는 말 안 해 줘도 알겠지.”
화려한 보석이 박혀 있는 황금 열쇠였다.
“이걸 주시는 겁니까?”
에탄이 그걸 보고는 살짝 당황했다.
저 열쇠는 단순히 돈을 지원해 주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돈이 많이 필요하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건 맞는데….”
지오반의 반문에 에탄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돈을 지원받아야 하는 건 맞지만.
‘금고에 있는 모든 돈을 쓸 생각은 없는데.’
그 정도가 좀 과하다 생각했다.
아무리 자신이 막 나가는 성격이라고 해도, 가문의 돈을 모두 바닥낼 마음은 없었다.
“일일이 돈을 주기도 귀찮다. 그러니 네 녀석이 알아서 사용해라.”
“적당히 해 먹겠습니다.”
하지만 주는 걸 사양할 생각은 없었다.
어찌 됐든 가지고 있으면 유용하게 쓸 테니까.
“그리고 아린이 좀 신경 쓰거라.”
“예?”
“맨날 똑같은 옷만 입고 다니지 않느냐. 만약 외부인들이 그 사실을 알면 우리 가문을 뭐라 생각하겠느냐.”
“…….”
지오반의 말에 에탄의 입이 멍하니 벌어졌다.
동시에 깨달았다.
어째서 자신한테 열쇠를 준 건지 말이다.
‘열쇠를 준 게 아린이 때문이라니. 이게 손녀 사랑이라는 건가?’
서운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봐도 아린이는 너무 귀여운 아이니까.
게다가 자신의 딸이 할아버지한테 사랑받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니. 오히려 기분이 좋았다.
‘…그래. 나 같은 놈보다는 아린이가 훨씬 귀엽고 예쁘지.’
하지만 마음 한구석이 쓸쓸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거였다.
“네놈은 옷에 일가견이 없으니 꼭 다른 사람과 함께 가거라. 괜히 아린이한테 어울리지 않는 옷 입혔다가는 각오하라는 뜻이다.”
“…….”
“알겠느냐?”
“반드시 그리하겠습니다.”
지오반의 물음에 에탄이 힘없이 답했다.
하나. 반박할 수는 없었다.
옷을 보는 감각은 전생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별로라는 걸, 에탄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좋다. 이만 나가 보거라.”
“예.”
지오반이 확답을 받아 내고는 다시 서류 뭉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에탄이 그 모습을 보고는 고개를 꾸벅이며 인사했다.
-끼익.
그 후 가주실을 나오고는.
‘…뭐지. 이 알 수 없는 패배감은?’
상당히 묘한 기분을 느꼈다.
* * *
“…그렇게 됐어.”
“설마 그런 이유 때문에 열쇠를 주실 줄이야. 가주님도 아린이를 많이 좋아하시고 계셨군요.”
에탄의 말에 세바스찬이 감탄을 내뱉었다.
정원에 있는 가지를 잘라 내던 손도 멈춘 채로 말이다.
“그래서 저를 찾아오신 겁니까?”
에탄은 가주실을 나오자마자, 세바스찬과 아린이가 놀고 있는 정원으로 향했다. 그 후 나뭇가지를 정리하는 세바스찬에게 지금까지 있었던 일들을 말해 줬다.
“네가 나보다 옷 입는 감각이 좋잖아.”
“그건 맞지만, 저도 뛰어난 편은 아닙니다.”
그래서 에탄은 세바스찬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했다.
자신과 함께 아린이의 옷을 사러 가자고 말이다.
“차라리 시녀장 리른은 어떻습니까?”
“리른?”
“예. 때마침 저기서 아린 님과 함께 놀고 있군요.”
세바스찬의 말에 에탄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 후 정원 한가운데에서 아린과 놀아 주는 리른을 쳐다봤다.
‘생각해 보니 리른이 있었구나.’
리른. 칼라사르 가문의 시녀장.
그녀 또한 전생 시절 죽을 때까지 가문을 위해 헌신한 일원 중 한 명이다.
‘나랑은 별다른 연이 없었지. 마주칠 일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에탄과는 그렇다 할 접전이 없었다.
굳이. 시녀장과 대화를 할 이유도 필요성도 못 느꼈으니까. 그리고 그건 시녀장인 리른 또한 마찬가지였으리라.
“그녀라면 제법 믿을 만합니다. 가문에서 중요한 행사가 열릴 때마다 가주님의 옷도 직접 고를 정도입니다.”
“그래?”
에탄이 세바스찬의 설명에 두 눈을 반짝였다.
지오반이 행사 때 입는 옷들은, 행사에 참석하는 다른 자들도 감탄할 정도로 완성도가 높은 것들뿐이었다.
헌데. 그게 리른이 직접 골라 준 거였다고 하니.
에탄의 마음이 솔깃하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러니까 리른을 데려가시죠. 게다가 저는 정원에 있는 나뭇가지들을 쳐내야 해서 조금 바쁩니다.”
“…그럼 어쩔 수 없구만.”
게다가 세바스찬은 바쁘다고 하니 선택지는 이제 리른을 데리고 간다밖에 없었다.
“아빠!”
그때. 아린이 세바스찬과 함께 대화를 나누는 에탄에게 달려왔다.
푸욱!
이어서 두 팔을 벌려 에탄의 몸을 꼬옥 껴안았다.
“잘 놀고 있었어?”
“네! 리른 님이랑 네잎 클로버 찾기 놀이 중이었어요!”
아린이 에탄의 물음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제법 신나게 놀았는지 손에는 흙이 묻어 있는 상태였다.
‘확실히 옷을 사 줄 때가 온 거 같네.’
게다가 아린이가 입고 있는 옷도 조금씩 해지고 있었으니. 에탄은 슬슬 아린이에게 새 옷을 선물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안녕하십니까, 도련님. 시녀장 리른입니다.”
시녀장 리른이 에탄을 향해 다가왔다.
이어서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시녀장이라는 직급에 걸맞은 귀품이 느껴졌다.
“어….”
에탄이 리른의 인사에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회귀를 하고 나서 처음으로 두 사람이 마주치는 거니.
어색함을 느끼는 게 당연한 거였다.
“그래.”
하지만 인사를 무시할 수는 없으니 리른의 인사에 오른손을 들며 답했다.
“혹시 하나 부탁해도 되나?”
그리고 조심스럽게 뒷말을 붙였다.
“무엇입니까?”
에탄의 말에 리른이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한테 뭘 부탁한다는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으니까.
“아린이한테 새 옷을 좀 사 주려고 하는데… 도와줄 사람이 필요하거든.”
“…!”
에탄에 이어지는 말에 리른이 두 눈을 번쩍였다.
그리고 먹잇감을 발견한 맹수의 눈빛으로 에탄을 쳐다보고는.
“그 일. 꼭 저한테 맡겨 주시면 좋겠습니다.”
무엇이든 해내겠다는 엄청난 기세로 뒷말을 이었다.
그 순간 에탄은 깨달았다.
‘이 녀석… 진심이다.’
리른한테 아린이의 옷 고르기를 맡기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거라는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