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7화
제84화. 완벽한 무대(4)
마지막 게스트 무대를 담당하게 된 팀은 바로 대한민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아이돌 그룹, 벡스의 두 멤버였다.
이은솔, 강의찬. 두 사람의 등장만으로도 콘서트장은 한여름의 온도보다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 사람 다 베테랑이다 보니 완급 조절이 보통이 아닌 모습을 보였다.
두 남자의 무대를 조용히 지켜보던 하니엘 멤버들은 마치 수업을 받는 듯한 학생의 표정이 되어 있었다.
선배들의 무대를 보면서 훗날 자신들의 것으로 녹여내기 위한 모범생의 자세를 갖췄다.
이은솔, 강의찬 듀오의 무대가 끝나고.
뒤이어 하니엘과의 합동 공연 순서가 찾아왔다.
스태프가 무대로 올라가는 계단에서 대기하고 있던 하니엘 멤버들에게 신호를 줬다.
“올라가시면 됩니다!”
“네!”
다시 무대로 복귀한 멤버들.
하니엘과 벡스가 나란히 같은 무대에 서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굉장히 진귀한 일이다.
오직 이 콘서트장에 온 사람들만 볼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래서인지 콘서트가 시작된 지 한참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열기는 식기는커녕 오히려 더 올라가 있었다.
이은솔이 마이크를 들고서 콘서트장 전체를 훑어보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러면서 마이크 끝을 관객들에게 돌리며 물었다.
“여러분, 즐거우신가요?”
“네에-!”
말해 무엇하랴.
관객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힘껏 소리쳤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좋아해 주고 계신데, 우리 후배님들도 와서 한마디씩 해주세요.”
이은솔이 이연에게 멘트를 넘겼다.
인기의 척도를 떠나서, 이 콘서트의 주인공은 벡스가 아닌 하니엘이니까. 그녀들에게 주도권을 넘기는 건 당연했다.
“선배님들이 오셔서 이렇게 분위기를 띄워주시니까 저희들도 뒤에서 지켜보면서 열심히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더라고요.”
물론 지금까지도 열심히였지만, 앞으로는 더 힘내야 한다는 동기부여가 되었다.
이연과 이은솔이 서로 마주보면서 눈웃음을 교환했다.
“그럼 저희가 준비한 스페셜 무대,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니엘과 벡스! 벡스와 하니엘의 콜라보 무대! 지켜봐 주세요!”
대한민국 최고의 보이 그룹과 걸 그룹 중에서 굉장히 핫한 팀이 만났다.
연습을 막 시작한 초기에는 이은솔의 고백 사건으로 인해서 호흡이 잘 안 맞는 모습을 보였지만.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는 이연과 이은솔은 누가 봐도 완벽한 파트너였다.
서로 다른 그룹에 속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가 어느 위치에서 어느 타이밍에 움직이는지 훤히 꿰뚫고 있는 모습을 보였다.
같이 노래를 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만남의 의미가 무엇일까.
I want to know.
이 노래가 알려줄 거야.
소리 높여 외쳐봐.
Shout!
두 사람의 노래에 맞춰 관객들의 몸도, 마음도 리듬에 맞춰 들썩였다.
객석 전체에 하니엘과 벡스를 상징하는 두 가지 색이 뒤섞여 콘서트 장을 가득 물들였다.
다시 한번 이은솔과 이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싱긋 웃는 이연의 모습에 이은솔은 확신했다.
역시.
이 무대에 서기를 잘했다고.
* * *
모든 게스트들의 무대가 끝나고.
하니엘의 단독 공연이 쭉 이어지는 사이, 벌써 마지막 차례가 다가왔다.
마지막을 장식할 노래는 이연이 작사, 작곡을 맡았던 그 곡. ‘Beyond’였다.
오늘의 여러 무대들 중에서도 이연이 가장 신경 쓴 공연이기도 하다.
“그럼 마지막 노래 들려 드리고, 저희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마지막이라는 이연의 말에 팬들은 아쉬움을 가득 드러냈다.
그러나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게 마련이다.
완벽한 무대에 서고 싶다는 일념 하나로 이곳까지 달려온 이연.
그녀가 만든 곡의 반주가 넓은 콘서트장 전체에 울려 퍼졌다.
팬들은 아쉬움을 감춘 채 응원봉 색깔을 바꾸면서 하나로 통일시켰다.
하니엘의 대표 컬러라 할 수 있는 화이트.
새하얀 빛으로 물드는 객석을 바라보면서 이연은 두 손으로 마이크를 힘 있게 쥐었다.
그녀의 노래에 맞춰서 멤버들이 각각 좌, 우에 서면서 어깨를 나란히 했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
원하는 곳에 도달할 때까지.
Beyond.
끊임없이 달려 나갈 거야.
My dream, Our dream.
꿈을 위해.
이연의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멤버들은 그런 이연의 모습을 보고 속으로 크게 놀랐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대 위에서 운 적이 없었던 이연.
그랬던 그녀가 콘서트 현장에서 맨 처음으로 눈물을 보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멤버들뿐만 아니라 스태프들, 회사 관계자들, 그리고 팬들 역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연의 눈물에 자극을 받은 걸까.
하니엘을 응원하는 팬들의 환호성이 더욱 커졌다.
손등으로 눈물을 훔친 이연은 다시 얼굴에 미소를 그리면서 노래를 부르는 걸 멈추지 않았다.
살면서 셀 수도 없을 만큼 여러 번 무대에 올랐던 그녀지만, 이런 감정은 난생처음이었다.
지금의 이 무대가.
어쩌면 자신이 바랐던 ‘완벽한 무대’의 정체가 아닐까.
* * *
노래가 끝나고, 하니엘 멤버들이 마이크를 들고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우미가 이연의 작은 등을 토닥여 주면서 물었다.
“연아. 괜찮아? 아까 우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놀랐는데.”
“그냥. 노래 부르다가 순간 울컥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이연의 해명을 듣고 나서야 멤버들은 겨우 안심할 수 있었다.
오채일 대표와 회사 관계자들이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기 위해 그녀들을 찾았다.
오채일 대표가 이연을 보자마자 그녀가 보인 눈물의 의미에 대해 물었다.
“기쁨의 눈물이었는지, 슬픔의 눈물이었는지 가늠이 잘 안 되던데.”
정답이 궁금했다.
사실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기뻐서 그런 거죠.”
그녀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바깥에서 팬들의 앵콜 요청이 들려왔다.
-앵콜! 앵콜! 앵콜!
콘서트에서 앵콜 요청은 빠질 수 없다.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구구절절 말로 하지 않아도 서로 통하는 게 있었다.
이연이 무대 감독에게 큰 소리로 외쳤다.
“물만 마시고 바로 올라갈게요! 준비 부탁드려요!”
무대 감독이 엄지를 추켜올리면서 맡겨달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완벽한 무대를 찾아냈다 하더라도 그게 끝이 아니다.
오늘보다 더 만족할 만한 무대를 만들 때까지.
이연은 언제까지고 계속해서 노래할 생각이다.
* * *
하니엘의 첫 단독 콘서트가 성황리에 마무리된 이후.
그녀들은 또 한 번의 앨범 발표를 앞두게 되었다.
콘서트가 끝나고 한 달 정도 긴 휴식 시간을 가진 후에 바로 다음 음반 작업에 돌입하게 된 하니엘.
이번 타이틀곡 역시 작사, 작곡에 이연의 이름이 올라가 있었다.
‘beyond’가 메가 히트곡 반열에 오른 덕분에 이번에도 그녀에게 직접 타이틀곡을 제작할 수 있는 기회가 넘어왔다.
당연하게도 이번 곡 역시 호평 일색이었다.
진세혁 프로듀서는 이연이 처음 고안했던 멜로디를 듣자마자 이런 말까지 했었다.
‘프로듀서 자리, 연이한테 넘겨줘야겠는데?’
물론 반쯤 농담이 섞여 있는 말이었지만, 이연의 작곡과 작사, 그리고 전반적인 프로듀싱 능력은 타의추종을 불허할 정도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었다.
LC 엔터테인먼트 내부에서도 이번 하니엘의 앨범은 역대급이라는 평가가 자자했다.
늘 그렇듯 하니엘이라는 그룹에게 거는 기대는 컸지만.
이번 앨범에는 그 이상의 기대감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이들의 예상대로, 하니엘의 네 번째 앨범 ‘Try’가 발표되자마자 타이틀곡뿐만 아니라 앨범 수록곡들까지 전부 다 음원 차트 탑 10에 도배되었다.
그야말로 하니엘 열풍이었다.
워낙 잘나가는 걸 그룹으로 성장하다 보니, 방송가에서도 하니엘을 찾느라 바빴다.
리포터가 하니엘 멤버들, 그중에서도 이연에게 앨범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을 던졌다.
“이번 타이틀곡도 이연 씨가 직접 작곡, 작사하셨다고 하는데. 정말인가요?”
“네. 맞습니다.”
“어떤 의미가 담겨져 있을까요?”
“저희가 지난번에 발표했던 곡, ‘Beyond’가 스스로의 한계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드러내는 노래였다면, 이번 ‘Try’라는 곡은 그 한계를 넘었으니 더 높은 목적지를 찾아 노력하겠다는 뜻이 담겨 있어요.”
“일종의 시리즈물이군요?”
“그렇게 해석하시는 분들도 많이 계시더라고요. 근데 노래라는 게, 만든 사람의 의사만 반드시 절대적으로 반영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해요. 노래를 듣고, 그리고 거기서 느끼는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 하나하나가 모여야 무대라는 게 완성된다고 보거든요.”
“가수와 팬들. 그리고 서로의 호흡에 대한 중요성. 이걸 강조하시는 거죠?”
“네, 맞아요. 노래를 들어주는 팬들이 있기에 저희가 가수로 불릴 수 있는 거니까요.”
이연의 말에 동의하듯, 멤버들 역시 고개를 위아래로 여러 차례 움직였다.
그렇게 짧은 인터뷰 촬영을 마친 후.
그녀들은 곧바로 다음 일정을 향해 또다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박도수 매니저가 급하게 통화를 마친 뒤에 멤버들을 향해 손짓했다.
“팬 미팅 장소로 바로 넘어갈 거야. 팬들 엄청 모여들었다고 하더라. 현장이 많이 복잡하다고, 우리는 뒷문으로 돌아서 들어가기로 했어.”
비아가 놀란 토끼눈이 되어 물었다.
“벌써 그렇게 많이 오셨대요?”
“뭐, 이제 와서 새삼 놀랄 것도 없지.”
박도수 매니저의 말대로였다.
이제 그녀들은 어딜 가든 사람들을 몰고 다니는 유명 셀럽 반열에 들어섰다.
국내를 넘어 해외에서도 그녀들을 향한 관심이 쏟아지고 있었다.
다음 주에 미국에서의 일정이 잡혀 있는 만큼, 앞으로는 더욱 바빠지게 될 것이다.
팬 미팅 장소에 도착해서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이후, 팬들 앞에 하니엘이 모습을 드러내자 리프 스카이돔에서 접했던 환호성 못지않은 열띤 반응이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둘, 셋!”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천사, 하니엘입니다!”
팬들을 위한 공연이 끝나고 짧은 토크가 이어졌다.
이다음은 팬들과 직접 만나면서 짧게나마 대화를 나누고 사인을 받을 수 있는 코너가 마련되었다.
수많은 팬들이 이연에게 사인을 받기 위해 줄을 섰다.
한 명 한 명씩 눈을 마주치면서 이름을 듣고, 사인을 진행하던 이연의 앞에 낯이 익은 여성 한 명이 마주섰다.
곱게 한복을 차려입은, 단아한 용모의 여성.
공교롭게도 이연은 이 여성을 본 적이 있었다.
“너는…….”
“오랜만이에요, 루웰.”
그에게 환생 계약서를 내밀었던 바로 그 저승사자였다.
이연은 오랜만에 여성을 만나서 반갑다는 느낌보다는 불안감을 먼저 느꼈다.
“나한테 무슨 용무라도 있나? 설마. 이 세계로 넘어온 걸 없던 일로 하겠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설마요. 이거 때문에 온 거예요.”
다시 환생 계약서라도 내미는 건 아닌가 싶었는데.
이번에는 다른 글자가 적혀 있었다.
“고객 만족도 조사?”
“다시 살게 된 이 삶이 만족스러우신지 어떤지. 설문 조사를 받고 있거든요. 피드백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저희들도 이 시스템을 가다듬을 수 있으니까요.”
이연은 어이가 없었다.
그래도 엄밀히 따지면 이 여성 덕분에 그토록 꿈에 그렸던 무대에 설 수 있게 되었으니까.
이연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만족인지, 불만족인지.
내용을 직접 확인한 여성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깃들었다.
“감사합니다, 고객님.”
짧은 인사말을 남긴 채 그녀는 다시 존재감을 감췄다.
이후에 또 다른 팬 한 명이 우물쭈물하면서 이연의 앞에 섰다.
“저기…….”
이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미소를 지으면서 팬을 맞이했다.
“사인은 어떻게 해드릴까요?”
“여기에다 해주세요!”
팬이 내민 하니엘의 네 번째 앨범에 이연의 사인이 새겨졌다.
루웰이라는 이름이 아닌.
이연이라는 이름이 적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