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2화
제83화. 어려운 결심(4)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부터 지금까지. 온몸에 유교 사상이 잔뜩 배어 있는 이연은 선배한테 주도적으로 뭔가를 강요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제안, 혹은 부탁. 이 정도의 선을 유지했었다.
하지만 하니엘의 첫 단독 콘서트가 걸려 있는 중요한 이때, 이연은 자신의 이 몸에 밴 신념을 잠깐 무시하기로 했다.
자신의 꿈이자 이상이라 할 수 있는 완벽한 무대가 더 중요시되기 때문이었다.
이연의 잠깐 보자는 말에 이은솔은 그녀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인적이 드문 야외 휴게실로 나온 두 사람.
근처에 사람이 없음을 확인하자마자 이은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미안, 연아. 내 태도 때문에 그런 거지?”
이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은솔이 한 손으로 목 뒤쪽을 꾸욱꾸욱 눌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너한테 고백하지 말 걸 그랬어.”
이은솔도 사람이다 보니 이연을 볼 때마다 자꾸만 어제의 기억이 오버랩되었다.
그거 때문인지 자신도 모르게 자꾸만 이연을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였다.
평소에도 굉장히 친하게 지냈던 두 사람이, 하루아침에 갑자기 서로를 어려워하는 모습을 보이면 주변 사람들도 당연히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큰 틀에서 보자면 이것은 곧 연습에 안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연습을 매우 중요시 여기는 이연이 이걸 두고 볼 리 없었다.
그래서 이왕 이렇게 된 거, 일찌감치 문제의 싹을 잘라낼 생각이었다.
“제가 어제 일로 선배를 안 좋게 본다거나 앞으로 거리를 두겠다는 그런 생각은 안 해요. 그러니까 너무 어려워하지 마시고 평소의 선배님으로 저를 대해주세요.”
거짓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말이었다.
그녀의 진심은 이은솔에게도 그대로 전해졌다.
잠깐 마음의 정리가 필요했던 걸까.
이은솔은 조금이나마 원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그래야지. 선배인 내가 정신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미안해.”
“괜찮아요. 저희가 기계도 아니고. 바로바로 감정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요.”
사적인 감정에 너무 치우쳤던 나머지, 이은솔은 잠시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들은 가수라는 사실을.
이연을 좋아하지만, 그만큼 무대도 좋아한다.
개인감정 때문에 본인의 무대뿐만 아니라 하니엘의, 그리고 이연의 무대까지 망치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이은솔은 평생 이연을 볼 면목이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을 깨닫게 만들어준 후배의 말을 이은솔은 마음속 깊이 소중하게 간직하기로 했다.
* * *
이연의 오랜 꿈이었던 완벽한 무대를 만들기 위해, 그녀는 모든 노력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앨범 활동 기간 때보다도 더 바쁘게 움직일 정도였다.
오늘 이연은 오랜만에 샤이걸스의 리더, 앤서를 만나기로 했다.
그녀에게 소개를 받고 싶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잘 지내셨죠?”
“나야 잘 지내고 있지.”
말과는 달리, 앤서의 눈 밑에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 잡고 있었다.
샤이걸스는 발표하는 앨범마다 최소 1곡 이상은 멤버들이 직접 작곡과 작사를 맡은 곡이 들어간다.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져 온 그녀들만의 전통 아닌 전통이다.
이 중에서 앤서는 작곡을 맡고 있다.
앨범 활동 기간이 끝나고 잠시 휴식을 가진 뒤, 지난주부터 본격적으로 다음 앨범 작업에 돌입하기 시작한 그녀들.
앤서의 다크서클은 노력의 훈장 같은 거였다.
오늘 이연이 앤서를 찾아온 이유가 있었다.
“채린 님은요?”
“10분 뒤에 오실 거야. 그 언니, 운전면허 딴 지 얼마 안 되어서 길을 자주 헤매거든. 아까도 연락 왔는데, 내비 잘못 보고 가고 있었대.”
“사고만 안 나셨으면 좋겠네요.”
방향이야 언제든 바로잡을 수 있지만, 큰 사고가 발생하면 돌이킬 수 없으니까. 괜한 걱정이 들어서 한 말이었다.
걸파이트 시즌 2 게스트 미션에서 샤이걸스와 합동 공연을 펼쳤던 피아니스트, 황채린.
드라마 ‘시들지 않는 너’ 삽입곡 무대를 보다 풍성하게 꾸미기 위해 이연은 황채린을 피아노 세션으로 섭외할 생각이었다.
그래서 이런 만남의 자리가 성사되었다.
앤서의 말대로 정확히 10분 뒤, 황채린이 작업실에 모습을 나타냈다.
“죄송해요. 주차하려고 하는데 어디다가 차를 대야 좋을지 몰라서 한참 헤맸어요.”
초보 운전자에게는 주차도 어려운 문제다.
이연은 충분히 이해하니까 괜찮다는 뜻으로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그녀가 10분 지각을 하든 어떻든. 사실 이연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황채린이 이연의 합동 무대 제안을 받아들일지, 말지. 이게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답은 직접 얼굴 보면서 들려주겠다고 했었다.
황채린이 내린 결론은…….
“저도 참가할게요.”
“감사합니다, 채린 님.”
“‘님’이라는 말은 너무 부담스러우니까요. 그냥 편하게 불러주세요.”
“편하게라면, 어떤 형태가 좋을까요?”
“‘언니’라고 해도 돼요.”
이연의 시선이 잠깐 앤서에게 향했다.
앤서는 쓴 미소를 지으면서 이연이 듣고 싶어 하는 말을 콕 찍어 들려줬다.
“채린 언니 성격이 원래 이렇거든. 굉장히 털털하고, 그리고 시원시원해.”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도 아니었다.
무대 위에서는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상태로 우아한 모습만 보여줘서 원래 성격도 약간 고상한 편이 아닐까 싶었는데.
실제로 만나본 그녀의 성격은 전혀 반대였다.
걸파이트 시즌 2 녹화 현장에서 황채린을 만났던 적은 있었지만, 그때는 라이벌 팀인 샤이걸스와 같은 편이었기에 자주 말을 섞진 못했었다.
이렇게 본격적인 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오랫동안 대화를 나누는 건 이번이 거의 처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럼 구체적인 내용은 이연 씨 소속사 통해서 연락 주고받으면 되는 거죠?”
“네. 오늘 저는 채린 님…… 아니, 채린 언니하고 인사라도 나누고 싶어서 온 것뿐이니까요. 일에 관련된 복잡한 이야기는 오늘 안 하셔도 돼요. 이렇게 연락이 닿은 것도 인연인데, 같이 식사라도 하실까요? 아까 선배님한테 들으니까 이 근처에 맛집 많다고 하던데.”
황채린한테 먹고 싶은 음식이 뭔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가 망설임 없이 바로 답했다.
“얼큰한 부대찌개가 좋겠네요. 소시지 가득 올린 걸로. 아, 면 사리는 무조건 추가해야죠. 이연 씨도 괜찮죠?”
“네. 저야 뭐…….”
입맛도 굉장히 화끈한 사람이었다.
황채린의 합류로 인해 이연의 솔로 무대 문제도 깔끔하게 해결되었다.
하나하나씩 퍼즐 조각을 모으다 보면, 이연이 바라는 완벽한 무대라는 거대한 작품이 완성될 것이다.
이연은 오늘도 이런 기대를 품으면서 앤서, 황채린과 같이 작업실을 나섰다.
* * *
이은솔과 강의찬, 아이비제이, 그리고 최근에 합류한 피아니스트 황채린까지.
게스트 라인업이 하나하나씩 갖춰지는 사이, 어느새 SSS 시즌 2 마지막 방송일자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SSS 시즌 2 촬영 현장을 찾은 이연은 심사 위원들과 같이 연습생들의 리허설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다.
스케줄을 마치고 온 혜원, 미랑도 중간에 겨우 합류했다.
“연아!”
“애들 리허설 다 끝났어?”
이연이 미랑의 물음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중간에 음향 문제가 있어서 그거 해결한 다음에 다시 하기로 했어요.”
“그래? 다행이다. 리허설 못 보고 그냥 넘어가는 줄 알았네.”
혜원과 미랑이 꼭 리허설을 보지 않아도 어차피 이연이나 고정으로 출연해 온 심사 위원들이 있기 때문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저 연습생들의 무대를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보고 싶다는 자기만족일 뿐.
그거 말고는 특별히 중요한 의미는 없었다.
SSS 시즌 2 역시 시즌 1 때처럼 두 팀이 맞대결을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될 예정이다.
혜원이 이연에게 슬쩍 물었다.
“이번에도 그거 있대?”
“그게 뭔가요?”
“왜, 시즌 1 때 우승한 조가 상대방 조에서 마음에 드는 멤버 데려와서 같이 데뷔시키는 그런 시스템 있었잖아.”
정확히는 베네핏이었다.
그러나 반드시 사용해야 하는 베네핏은 아니었고. 우승한 조의 의사에 따라서 사용해도 되고 사용 안 해도 된다.
이연의 경우에는 유키를 영입하기 위해 베네핏을 사용했었다.
당시에는 겉과 속이 너무나도 다른 유키의 모습에 ‘괜히 데려왔나?’ 하는 약간의 후회가 있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유키가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유키 덕분에 하니엘이 일본에서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아마 있을 거 같아요.”
“어머, 진짜로?”
“네. 아까 작가님들이 하시는 이야기 슬쩍 들었거든요.”
오랜만에 마법의 힘을 빌려서 몰래 정보를 염탐했다.
과연 우승팀이 베네핏을 사용할지. 이것도 관심이 쏠렸다.
그것도 그거지만.
역시 가장 신경이 쓰이는 건 어느 팀이 우승할지에 관한 거였다.
결승 무대는 1라운드 때부터 지금까지 쭉 라이벌 구도를 유지해 왔던 최솔림과 조이주 팀의 대결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두 사람의 포지션은 이연과 진절혜 같은 느낌을 풍겼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최솔림과 조이주는 서로 꽤 친하다는 점이었다.
같은 연습생 동기이면서 나이도 똑같고. 마음도 잘 맞는 친구 사이다.
하지만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 내에서는 서로가 경쟁자일 뿐. 두 사람 역시 사적인 친분보다는 각 팀의 리더로서 자신의 팀이 우승하는 데에 모든 에너지를 쏟고 있는 중이었다.
혜원이 흥미로운 상상을 입 밖으로 흘렸다.
“만약에 솔림이나 이주. 둘 중에 한 명이 우승해서 서로 자기 팀으로 데려오겠다고 지목하면 재미있지 않을까?”
“그렇긴 하겠네요.”
둘 다 SSS 시즌 2의 시청률을 견인했던 주역들이니까.
이 둘이 같은 팀으로 데뷔한다고 하면, 그 팀은 무조건 인기를 끌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니엘의 콘서트에 SSS 시즌 2 우승팀을 게스트로 데려오기로 합의가 되어 있다 보니, 이연은 내심 혜원의 상상이 현실로 이루어졌으면 하고 바랐다.
그러면 덩달아 하니엘의 콘서트도 관심을 끌 테니까 말이다.
후배 덕을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기는 셈이다.
그러나 이건 어디까지나 이들의 추측일 뿐.
연습생들이 서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거기까지는 이연도 알 수 없었다.
연습생들의 선택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 * *
SSS 시즌 2 파이널 미션.
강의찬의 힘찬 오프닝 멘트와 함께 드디어 생방송이 시작되었다.
“오늘 많은 분들이 자리를 채워주셨는데요. 이 중에서 눈에 띄는 분들이 계시네요.”
카메라가 이연과 혜원, 미랑이 나란히 앉아 있는 좌석을 비쳤다.
연습생들을 응원하기 위해 현장을 찾은 가족과 지인들, 그리고 팬들이 그녀들을 향해 환호성을 질렀다.
강의찬이 가장 먼저 마이크를 든 혜원에게 물었다.
“혹시 혜원 씨는 어떤 팀을 응원하시나요?”
“저는 동서남북 팀이요.”
“미랑 씨는요?”
“전 조이주 연습생이 있는 팀을 응원하려고 왔어요.”
라이벌답게 서로 응원하는 팀도 달랐다.
이제 이연의 차례가 도래했다.
“이연 씨도 혜원 씨와 마찬가지로 동서남북 팀이겠죠?”
이연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번졌다.
“저는 모든 연습생들을 응원합니다. 저에게는 다 똑같이 소중한 후배들이니까요.”
역시 분산투자가 제일 안전한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