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화
제83화. 어려운 결심(3)
이은솔로부터 기습적으로 고백을 받은 순간, 이연은 몸동작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그대로 정지했다.
음유시인으로 활동할 때에도 고백은 많이 받았었다.
그러나 그건 전부 여성으로부터 받았던 거였고.
남자한테 이런 식으로 고백을 받은 적은 생전 처음이었다.
물론 여자가 된 지금 상황에서 이전처럼 똑같이 여성에게 고백을 받으면 그것도 이상하겠지만.
그렇다고 이 상황이 마냥 기쁘다고 보기에는 굉장히 어렵다.
이은솔은 이연이 아직 속으로는 남자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은솔 본인도 설마 이 타이밍에 이연에게 자신의 속마음을 공개할 줄은 몰랐던 모양인지 당황하는 기색을 보였다.
“어…… 그러니까 이게 말이지…… 어떻게 된 거냐 하면…….”
오히려 말을 꺼낸 당사자가 어찌할 바를 몰라 하니, 반대로 이연이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언제부터였나요?”
자신을 여자로 보기 시작한 시점이 궁금했다.
이은솔은 충동적으로 마음에 없는 고백을 할 그런 남자가 아니다.
게다가 이연과 이은솔, 둘 다 사람들에게 너무나도 잘 알려진 톱스타들이다
그도 굉장히 오랫동안 심사숙고를 했을 것이다.
이은솔의 입에서 짧은 탄식이 흘러나왔다.
괜히 말했나? 싶은 그런 후회도 약간 담겨 있었다.
“작년에 너 처음 봤을 때부터 괜찮은 여자라는 인식은 들었어. 그런데 점점 만날수록 네가 좋아지더라.”
“선후배 관계가 아니라 남자와 여자 관계로 좋아한다, 이 뜻인 거죠?”
확인차 묻는 이연의 질문에 이은솔은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그…… 렇지.”
이은솔은 이연과 지금 이런 대화를 나누고 있는 것만으로도 굉장히 부끄러웠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먼저 신호탄을 쏘아 올렸는데. 이제 와서 없던 일이라며 도망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그리고 언제 또 이렇게 이연에게 속마음을 드러내는 날이 올지 모른다.
여기까지 생각이 다다르자, 이은솔은 차라리 지금 상황을 다행이라고 여기기로 했다.
이렇게라도 위안을 삼아야 자신의 마음이, 그리고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을 것 같았다.
언제까지 계속 닿지 않을 마음속 말을 계속해서 담아둘 수는 없으니까.
물이 고이면 썩게 된다.
마음의 소리 역시 마찬가지다.
이연을 좋아하는 이 감정이 희석되기 전에.
용기를 냈다.
이연은 이은솔을 좋은 선배, 좋은 사람, 그리고 좋은 조력자라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남자로서의 시선은 여기에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물론 가끔씩 자신이 이해 못 할 감정이 튀어나올 때가 있지만, 이걸 사랑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아직 검증이 필요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이 아직 그걸 받아들일 자세가 되어 있지 않았다.
육체는 완전한 여자가 되었지만.
아직 정신적인 면에서는 남자였을 때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한다면.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선배님.”
거절.
이것이 이은솔의 고백에 대한 그녀의 대답이었다.
이연은 사실 고민을 많이 했었다.
자신에게 시간을 달라고 하면서 심사숙고한 끝에 거절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줘야 할까, 이렇게 말이다.
그러나 이런 행동은 오히려 이은솔에게 미련만 심어줄 뿐이다.
거절할 거라면 차라리 냉정하게 딱 잘라서 말하는 편이 좋다.
이연의 선택은 옳았다.
이은솔의 입가에 아쉬움이 가득 담긴 미소가 번졌다.
“사실 네가 거절할 거 알고는 있었어.”
“근데 왜…….”
“누군가를 여자로서 좋아해 본 적이 이번이 처음이었거든. 첫사랑을 우물쭈물 망설이기만 하다가 흐지부지하게 끝내고 싶지 않아서. 그래서 고백한 거야.”
하지만 동시에 이연에게 미안한 감정도 들었다.
“괜히 내가 부담만 줬네. 선배가 할 짓이 아니었는데. 미안.”
“아니에요. 선배님이 저에 대해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서 오히려 고마웠어요.”
어림짐작으로만 이은솔의 속마음을 추측하고 있었는데. 그의 고백 덕분에 확실하게 알게 되었으니까. 한편으로는 시원하기도 했다.
고백을 거절하긴 했는데.
막상 다른 걱정거리가 떠올랐다.
때마침 이은솔이 먼저 말을 꺼냈다.
“거절당했다고 게스트로 출연할 것까지 엎을 생각은 없으니까 신경 쓰지 마. 내가 너 좋아하는 것과는 별개로, 이건 내가 너하고 하니엘 애들 도와주고 싶어서 결정한 거니까.”
“감사합니다, 선배님.”
“조심해서 들어가고. 숙소 앞까지 내가 같이 걸어가 줄까?”
“아니에요. 바로 요 앞이니까요.”
“알았어. 그럼 들어가는 것만 보고 나도 갈게.”
이연은 괜찮다고 여러 차례 말을 했지만, 오늘따라 이은솔의 고집을 꺾기가 쉽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연은 걸음을 옮겼다.
그녀가 아파트 입구로 들어가는 모습까지 확인하자, 이은솔은 자신의 머리를 거칠게 긁적였다.
“이 바보 멍청아. 고백을 할 거면 괜찮은 장소에서 분위기 잡고 하든가 했어야지. 어휴!”
이은솔은 오늘따라 자신이 매우 한심하게 느껴졌다.
* * *
이연이 숙소로 돌아오자, 거실에서 여솜과 둘이서 커피를 마시던 우미가 그녀를 맞이했다.
“어서 와……?”
“연아. 표정이 왜 그래? 밖에서 뭔 일 있었어?”
여솜의 물음에 이연은 한 손으로 자신의 볼을 몇 차례 쓰다듬었다.
“내 표정이 많이 이상해?”
“응. 뭔가에 엄청 놀란 사람처럼 보여.”
매우 날카롭고 정확한 추측이었다.
“무슨 일 있었어?”
우미가 묻자, 이연은 자신도 모르게 밖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털어놓을 뻔했다.
그러나 이내 그것을 삼켰다.
“아무 일도 없었어.”
그렇게 말하고서 곧장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침대에 누운 이연은 익숙한 숙소 천장을 바라보면서 조금 전 자신이 겪었던 일을 다시금 회상했다.
이은솔의 고백.
처음에는 별생각이 없었는데.
시간이 지나니 후유증이 꽤 있었다.
이은솔의 고백을 거절한 게 잘못된 선택이었을까?
아니, 이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거절하는 건 맞아.’
지금의 이연이나 이은솔, 두 사람의 상황을 고려하면 이게 정답이다
아직 두 사람은 아이돌로서 한창 성장해야 하는 단계니까.
그럼에도 묘한 감정이 이연을 계속해서 괴롭혔다.
침대 위에 여기저기 흐트러져 있는 그녀의 긴 머리카락처럼 이연의 마음 역시 일정하게 정리되지 못했다.
‘정신 차려. 콘서트가 얼마 안 남았잖아.’
이번 콘서트는 이연이 그토록 바라던 완벽한 무대를 실현하기 위한 조건들이 여럿 갖춰져 있었다.
이 순간이 오기를. 이연은 수차례 바랐다.
이런 와중에 괜히 마음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된다.
언제 또 이런 절호의 기회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이연의 머릿속에 문뜩 어떤 사실 하나가 스쳤다.
근처에 놓아둔 스마트폰을 집어 든 이연은 스케줄표를 확인하자마자 짧게 혀를 찾았다.
“하필이면 내일…….”
이은솔, 강의찬과의 합동 무대 연습이 잡혀 있었다.
* * *
스케줄을 마치고 먼저 LC 엔터테인먼트를 찾아온 강의찬이 하니엘 멤버들과 짧게 인사를 나눴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다들 오랜만이야. 연이는 최근에 나하고 봤지?”
이연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녀가 SSS 시즌 2에 특별 심사 위원으로 참가했었을 당시에 강의찬과 여러 차례 대화를 나눴던 적이 있었다.
그 이후로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애들은 잘하고 있나요?”
“연습생들 말하는 거지? 얼마 전에 파이널 미션 준비하는 거 슬쩍 보고 왔는데. 고생 좀 하고 있는 거 같더라. 이번 미션곡이 꽤 어려워서 그럴지도 모르고.”
SSS 시즌 2는 벌써 마지막 여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다음 주에 파이널 미션을 수행하기 위한 생방송이 펼쳐질 예정이다.
이때 이연과 혜원, 그리고 미랑. 셋도 현장에 참석해서 그녀들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볼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심사 위원 자격이 아닌, 연습생들을 응원하고픈 선배의 입장에서 참가하기로 했기에 큰 부담은 없었다.
오히려 부담감은 연습생들의 몫이다.
“애들도 연이, 너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
“혜원 선배하고 미랑 선배도 같은 말을 하더라고요.”
이연은 회사에 들락날락하면서 연습생들과 아주 가끔씩 보곤 한다.
그러나 혜원과 미랑은 아예 소속사가 다르다 보니 녹화가 아니면 연습생들을 볼 기회가 없다.
두 사람 다 SSS 시즌 2에 애정을 많이 가지고 있다 보니 하루라도 빨리 파이널 미션 생방송 날이 밝았으면 하고 바라는 중이었다.
SSS 시즌 2에 대한 걸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던 사이.
또 한 명의 연습 참가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오전 스케줄로 인해 가장 늦게 이곳에 도착한 이은솔이 하니엘과 스태프들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일찍 오고 싶었는데, 생각보다 녹화가 늦게 끝나서요.”
이들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괜찮다는 말로 이은솔을 안심시켰다.
그가 시간을 내준 것만으로도 하니엘과 스태프들에게는 감지덕지한 일이기 때문이었다.
이 중에서 유일하게 딱 한 사람, 강의찬만이 불만을 대놓고 드러냈다.
“나한테는 왜 미안하다고 안 하냐.”
“너는 어차피 오늘 저녁에 녹화 없다고 했잖아. 한가하면서.”
같은 그룹에 속해 있어서 그런지 서로의 일정에 대해 완벽하게 꿰차고 있었다.
하니엘 멤버들과도 오랜만에 인사를 나누던 이은솔은 이연과 마주한 순간, 자신도 모르게 표정이 어색하게 변했다.
“아, 안녕.”
“안녕하세요, 선배님.”
“…….”
“…….”
묘한 기류가 흐르자, 비아가 이해가 안 간다는 어투로 물었다.
“언니하고 선배님, 어제도 만나시지 않았어요? 왜 이렇게 어색해하세요?”
“우, 우리가? 그런 적 없는데. 그치, 연아?”
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은솔의 말에 공감한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러나 비아의 눈을 속이기에는 두 사람의 연기력이 너무 어설펐다.
“어제 뭔 일이 있었던 거 같은데.”
우미와 여솜도 비아와 같은 생각인지 두 사람을 수상쩍은 시선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더 이상한 분위기가 번지기 전에.
이연이 먼저 나섰다.
“시간 늦었으니까 얼른 연습해 보자. 선배님들도 괜찮으시죠?”
강의찬이 눈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나야 오늘 한가하다 치더라도, 다들 바쁠 테니까. 은솔이하고 같이 금방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네, 알겠습니다.”
* * *
이연은 연습이 시작되면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이라는 게 생각만큼 쉽게 컨트롤되지 않는다.
이은솔도, 그리고 이연도. 무의식적으로 서로를 계속 의식하는 낌새를 보였다.
이연 본인도 그걸 느낄 정도였다.
은서해 트레이너가 이연과 이은솔이 서로 합을 맞추는 안무 파트를 지적했다.
“서로 너무 거리가 떨어져 있어요. 좀 더 좁혀보세요.”
“이…… 렇게요?”
“아니요. 더 가까이.”
“…….”
너무나도 조심스럽게 한 걸음을 내딛는 이은솔.
그럴수록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는 주변의 시선은 더욱 짙어질 수밖에 없었다.
고민 끝에 이연이 잠시 타임을 외쳤다.
“이은솔 선배님. 잠깐 저하고 따로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이연의 적극적인 모습에 이은솔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