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9화
제83화. 어려운 결심(1)
“여보세요. 네, 선배님.”
사람들이 없는 공간으로 빠르게 이동하느라 그런지 이연은 살짝 숨이 차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목소리를 들은 이은솔은 괜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내가 좀 더 기다렸어야 했나 보네. 미안해.
“아니요. 괜찮아요. 안 그래도 선배님한테 막 전화하려고 했거든요.”
이은솔에게 고맙다는 말을 하려고 전화한 건데. 오히려 사과를 들으니까 이연의 입장이 난처해졌다.
“선배님이 저희 도와주시겠다고 먼저 말씀하신 거죠? 감사해요.”
-도와준다는 것으로 받아들이지 마. 안 그래도 다른 가수들 콘서트는 어떻게 진행되나 보고 싶기도 하고. 그래서 받아들인 거니까. 사실 우리 그룹이 다른 가수팀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한 적이 여태껏 한 번도 없었거든.
“그건 의외네요.”
-나도. 그래서 이번 다른 가수들은 어떤 풍경을 바라보고 있는지 보고 싶어졌어.
벡스의 첫 게스트 출연이 하니엘의 단독 콘서트장이 된 셈이었다.
그래도 이은솔이 이연을 위해 힘을 써준 건 변함없는 사실이었다.
“나중에 시간 한번 내주세요, 선배님.”
-응? 왜?
“제가 맛있는 거라도 사드리게요.”
-진짜? 네가 사준다면야 무조건 가야지. 근데 이왕 가게 잡을 거면 최대한 사람들이 없는 곳으로 하자. 저번처럼 또 우리끼리 스캔들 기사 뜨면 서로 곤란할 테니까.
하니엘은 한창 콘서트를 준비하는 중이고.
벡스의 경우에는 갈수록 세계인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이제는 예전처럼 두 사람이 편하게 거리를 활보하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어쩔 수 없다. 이연이 부산에서 멤버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인기가 올라갈수록 개인 사생활에 대한 자유는 반대로 떨어지게 되니까.
“알았어요, 선배님. 사람들 눈치 안 봐도 되는 곳으로 잡아볼게요.”
-기다리고 있을게. 연락 줘.
통화를 마친 이연의 고민이 깊어졌다.
가게 하나를 통째로 빌릴까? 하는 생각도 해봤다.
‘그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일 수도 있겠네.’
그렇다면 어느 가게가 편할까.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르는 곳이 한 군데 있었다.
‘오랜만에 혜영이한테 전화해 봐야겠네.’
중학교 동창 친구의 도움이 필요해졌다.
* * *
“원, 투, 쓰리, 포. 원, 투, 쓰리, 포!”
은서해 트레이너의 구령에 맞춰서 하니엘 멤버들이 단체 안무 동작을 펼쳤다.
그녀의 목소리에 약간의 아쉬움이 묻어 나왔다.
“좋긴 한데. 타이밍이 약간씩 어긋나는 게 보여. 특히 비아하고 리샤. 바로 들어가지 말고 반 박자 쉬고, 애들하고 같은 타이밍에 앞으로 치고 나와야지. ……가만. 이거, 내가 저번에 너희 데뷔 준비할 때에도 지적했던 거 같은데.”
말하던 도중에 은서해 트레이너가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옛 기억을 떠올렸다.
그러자 비아가 다급하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그녀의 기억을 부정했다.
“아, 아니에요, 쌤! 그, 그런 말 한 적 없으세요!”
“그래?”
“네! 처음 지적하신 거예요. 그치, 리샤 언니?”
그러나 리샤는 비아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였다.
“아닌데. 이거, 서해 쌤이 며칠 동안 우리한테 지적하셨던 거잖아.”
“저 언니가 진짜. 눈치가 왜 이렇게 없어.”
“……아!”
그제야 비아의 의도를 눈치 챈 리샤가 뒤늦게 아니라고 발뺌을 해봤지만.
은서해 트레이너의 기억을 조작하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요 녀석들 봐라. 선생님을 놀려먹으려고 해? 안 되겠다. 비아하고 리샤만 빼고 나머지는 쉬어. 너희 둘은 내가 특별히 집중해서 안무 봐줄 테니까.”
“으…….”
어설프게 책임을 피해가려고 했다가 도리어 더 큰 위기가 도래하고 말았다.
괴로워하는 두 멤버의 모습에 이연은 헛웃음을 삼켰다.
데뷔 앨범 타이틀곡부터 최근에 발표했던 노래들까지. 오랜만에 다시 연습하려고 하니 가끔씩 헷갈리는 경우가 있었다.
콘서트가 시작되기 전까지는 완벽하게 복원해야 했다.
옛날이라고 해봤자 가장 오래된 게 작년에 발표했던 앨범들뿐이다.
얼마 안 되었기에 기억을 되살리며 연습을 하는 게 그리 어려운 과정은 아니었다.
특히나 기억력이 좋은 이연의 경우에는 식은 죽 먹기보다도 쉬웠다.
여솜이 수건으로 젖은 땀을 닦아낸 이연에게 다가와 물었다.
“우미 언니하고 같이 화장실 갈 건데. 같이 갈래?”
“그러자.”
이연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순간, 안무 연습실에서 멤버들의 연습 과정을 조용히 지켜보고 있던 박도수 매니저가 이연을 불렀다.
“연아. 전화 온 거 같은데?”
박도수 매니저가 멤버들의 스마트폰을 따로 모아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연의 스마트폰 액정화면에만 불이 들어와 있었다.
유혜영한테서 온 전화였다.
“미안. 언니하고 같이 가. 난 친구하고 통화 좀 할게.”
“알았어.”
여솜에게 먼저 양해를 구한 이연은 스마트폰을 들고 화장실이 있는 곳과 반대 방향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연아! 나야. 지금 통화 가능하지?
“어. 왜?”
-왜긴. 어제 네가 나한테 물어봤던 거 확인하고 대답 준다고 했었잖아. 그거 알려주려고 전화했지.
이연은 유혜영에게 그녀가 운영하는 식당을 통째로 예약할 수 있는지 문의했었다.
하루를 통으로 빼는 건 가게 입장에서도 큰 손실이고.
그래서 점심, 저녁 둘 중 하나를 고민하다가 점심 타임 때를 골라서 그 시간에 자신과 이은솔, 둘이서만 식사를 할 생각이었다.
-마침 잘됐어. 그날이 딱 우리 가게 쉬는 날이거든. 그러니까 부담 없이 와도 돼.
“쉰다고?”
-응. 우리 가게, 화요일마다 쉬어.
유혜영은 다행이라는 것처럼 이야기를 했지만, 듣는 입장에선 그렇지 않았다.
그날 이연이 식당을 빌린다면, 유혜영과 다른 직원들은 쉬는 날에 굳이 나와서 일을 해야 한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오직 이연과 이은솔, 둘만을 위해서.
그러면 쉬고 싶어 하는 직원들 사이에서 연예인 특권 의식이니 뭐니 하며 안 좋은 말이 나올 수가 있다.
다른 날짜를 잡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것도 이은솔하고 겨우 일정을 맞춘 거였기에 바꾸기도 애매했다.
이연이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자 유혜영이 바로 눈치를 챘다.
-직원들 때문에 그래?
“아무래도.”
-괜찮아. 직원들 중에서 너하고 은솔 씨 보고 싶어서 일부러 출근하고 싶다는 사람들 엄청 많으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러나 이연 입장에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유혜영은 가게 사장이다. 사장 앞에서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내는 건 안 되니까. 일부러 이연과 이은솔의 팬인 척 거짓말을 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신경 쓰인다면 나 혼자만 나갈까? 두 사람 먹을 음식 요리하는 것 정도는 혼자서도 충분하니까.
“아니야.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 없어.”
유혜영도 이연에게 있어서 소중한 친구다.
이은솔에게 보답하겠다고 친구 혼자만 고생시킨다는 건 말이 안 된다.
뭔가 더 괜찮은 방법이 있을 거 같은데.
이연의 머릿속에 아이디어 하나가 스쳤다.
“혜영아. 그날, 가게 문만 열어주면 안 될까?”
-그게 무슨 뜻이야?
이연이 고안한 방법은 매우 간단했다.
“음식, 내가 거기서 직접 만들게.”
* * *
벡스 멤버들이 모여 있는 숙소.
스케줄이 없는 날임에도 불구하고 이은솔은 아침에 촬영 일정이 잡혀 있는 멤버들보다 더 일찍 일어나 나갈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강의찬은 부지런한 모습을 보이는 이은솔을 향해 어이가 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이연 씨하고 데이트 가는 게 그렇게 좋냐.”
데이트라는 말에 이은솔의 어깨가 크게 들썩였다.
“조용히 해라. 형들 들으면 오해한다고.”
“이미 제운 형하고 다 알고 있는 눈치더만.”
“…….”
나름 속마음을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었는데.
같은 숙소를 쓰고 있는 멤버들의 눈을 속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가족들보다도 더 가까이, 더 오래 지내는 사이니까.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일 수도 있었다.
“다 좋은데. 스캔들만 안 터지게 해. 너는 그렇다 치더라도. 이연 씨가 걱정이니까.”
“알고 있어.”
와이셔츠의 구김 정도까지 세세하게 확인한 이은솔은 다시 한번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은 오전 11시.
그러나 지금 시각은 오전 9시다.
2시간 정도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은솔의 심장은 벌써부터 쿵쿵 뛰고 있었다.
“왜 이렇게 긴장되는지 모르겠네.”
무대 올라갈 때보다도 더 떨렸다.
“너, 이연 씨하고 데이트 몇 번 해봤잖아. 방송 촬영할 때도 했었고. 이제 와서 긴장할 게 뭐 있어?”
“연이하고 둘이서만 보는 게 오랜만이라서 그런가 봐.”
이전에는 스케줄 때문에 방송국에 오며 가며 하다가 우연히 만난 게 다였다.
이렇게 상대방을 만나기 위해 따로 시간을 할애한 적은 최근 들어 거의 없었다.
게다가 그 상대가 이은솔이 좋아하는 권이연이라면, 당연히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강의찬이 이은솔의 넓은 어깨에 양손을 올렸다.
“가서 이연 씨한테 잘하고 와.”
“무조건 그래야지.”
“근데 어디서 보기로 했냐? 요즘은 어딜 가도 사람들 시선 피하기가 쉽지 않을 텐데.”
심지어 이은솔과 이연은 둘 다 얼굴이 너무 잘 알려진 연예인이다.
고령층이라면 몰라도, 젊은 사람들은 무조건 알아볼 것이다.
“연이가 잘 아는 가게 있다고 해서. 거기서 밥 먹고 그럴 거 같아.”
“갔다 와서 후기 꼭 들려주고.”
“뭐. 가게 후기?”
“아니, 데이트 후기 말이야.”
“그걸 내가 왜 말해주냐.”
“짜식. 부끄러워하긴.”
이은솔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내온 강의찬이지만, 자신의 친구가 이런 재미있는 반응을 보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이것도 권이연이라는 여자의 영향력이지 않을까 싶었다.
* * *
이연이 알려준 장소에 도착한 이은솔은 근처에 차를 주차시킨 뒤에 가게 쪽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가게 앞에 선 이은솔은 한 차례 고개를 갸우뚱했다.
“여기…… 맞지?”
혹시 몰라서 이은솔은 재차 이연이 알려준 주소를 확인했다.
“이상하다.”
주소는 맞다.
그런데 가게 내부에 불이 들어와 있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영업을 안 하는 거 같은데.
인터넷에 들어가서 가게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니, 매주 화요일마다 쉬는 걸로 나와 있었다.
“여보세요. 어, 연아. 오빤데. 그…… 보내준 주소, 이거 맞지? 아니. 나 지금 가게 앞에 있는데. 문이 닫혀 있는 거 같아서. 홈페이지에는 오늘 영업 안 한다고 나와 있는데?”
-괜찮아요, 선배님. 그냥 문 열고 들어오시면 돼요.
“열려 있어?”
-네.
“알았어. 잠깐만.”
이연의 말을 믿고 그대로 힘을 주며 가게 문을 열었다.
잠겨 있을 줄 알았던 가게 문이 쉽게 밀렸다.
불 꺼진 식당 내부로 들어온 이은솔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이연을 불렀다.
“연아! 안에 있어?”
“네, 선배님.”
이은솔의 부름을 듣고 이연이 주방 안쪽에서 나왔다.
그녀를 본 순간, 이은솔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고 말았다.
파란색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이연이 그에게 양해를 구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선배님. 음식 거의 다 되어가고 있으니까요.”
“어? 어…… 아, 알았어. 그, 그럼 나, 여기에 앉아 있을게.”
“네.”
마치 다리에 힘이 풀린 듯, 그대로 의자에 주저앉았다.
앞치마를 걸친 채 주방에서 요리하는 이연을 보면서 이은솔은 생각했다.
오늘 나오길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