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5화
제81화. 일본 활동(3)
일본에서 방송 활동을 이어나가기 시작한 지 이제 3일 차가 되었다.
오늘은 실내 스튜디오가 아닌, 야외 일정이 잡혀 있었기에 그녀들은 도쿄 한복판으로 장소를 이동했다.
처음에는 아무 소란 없이, 평화롭기만 하던 거리가 어느 해프닝을 기점으로 시끌벅적해졌다.
버스에서 하니엘 멤버들이 차례차례 하차하기 시작하자, 주변을 서성이던 행인들의 관심이 그녀들에게 쏠렸다.
서울에서도 이렇게 단번에 그녀들을 알아보기 힘든데.
그만큼 하니엘은 일본에서 최상위 아이돌급 인기를 누리고 있음을 뜻했다.
멤버들 중에서 특히나 가장 많은 인기를 끄는 멤버가 둘 있다.
그중 한 명은 명실공히 하니엘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이연.
또 한 명은 일본으로 넘어오면 인기도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무섭게 솟는 유키였다.
아무래도 하니엘의 유일한 일본인이니까. 같은 국가라는 공통점이 유키의 인기 비결이라 할 수 있었다.
현장에서도 유키의 이런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사방에서 유키를 향한 애정 어린 일본말이 쏟아졌다.
유키는 팬들의 말을 다 알아들을 수 있었기에 짧게나마 실시간으로 소통하는 게 가능했다.
유키가 손을 흔들어주는 것만으로도 팬들은 혼절 직전의 모습을 보일 정도였다.
일본 내에서 유명한 모 화장품 브랜드와 하니엘이 컬래버레이션을 하게 된 기념으로 가게 매장이 있는 곳을 찾게 된 그녀들.
그러나 업체 측에서도 이렇게 많은 인파가 몰릴 줄은 예상 못 한 모양인지, 행사 예정 시간이 되었음에도 여전히 시작이 불가능했다.
“조금만 뒤로 물러나 주세요!”
“위험하니까 거리 유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이연은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아니, 하니엘을 보기 위해 이곳에 몰려든 사람들을 향해 땀을 흘려가며 외치는 일본 스태프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녀들 주변으로 경호원들이 에워싸면서 행사가 시작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겨우 주변이 정리되었다.
“하니엘 여러분들을 모셔보겠습니다!”
먼저 작은 단상에 올라섰던 여성 MC가 하니엘을 향해 외쳤다.
계단을 타고 단상에 올라서자, 사람들보다 하니엘 멤버들이 더 크게 놀랐다.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몰렸었어?”
“세상에. 끝이 안 보여.”
마치 월드컵 길거리 응원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거리를 가득 메운 인파 한가운데에 하니엘이 있다고 하니 믿기지가 않았다.
그것도 한국이 아닌 일본에서.
이연이 먼저 신호를 주자, 멤버들이 이제는 입에 찰싹 달라붙은 일본어 버전 그룹 인사를 펼쳤다.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천사, 하니엘입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여러분!”
어설프게나마 일본말을 구사하는 그녀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귀엽다며 아우성이었다.
이때까지 스튜디오 촬영만 했던 터라 팬들과 공개적인 만남의 자리를 가지지 못했던 하니엘.
그간의 한을 이번 스케줄 한 방으로 전부 날려 보낼 수 있었다.
물론 카메라 앞에 서서 노래하고, 춤추고, 그리고 웃고, 이야기하고. 이게 연예인의 일이지만, 무대의 맛 또한 매우 중요하다.
사람들의 함성 소리를 자신의 눈과 귀, 그리고 온몸으로 체감할 수 있는 현장 특유의 맛.
이것 때문에 한번 무대를 떠난 연예인은 그 기억을 쉽게 잊지 못하고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꽤 많다.
그걸 잘 알기에 하니엘 멤버들은 지금의 순간순간을 평생의 기억으로 간직하기 위해 사방을 빠르게 둘러봤다.
여길 봐도, 저길 봐도.
온통 사람으로 가득했다.
진행자가 사람들을 향해 어떤 행사가 진행되고 있는지, 그리고 하니엘이 무슨 제품을 홍보하기 위해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등을 상세히 설명해 주기 시작했다.
“이연 씨가 직접 제품 들어보실래요?”
“네.”
그녀가 이번에 새롭게 출시된 틴트 제품을 집어 들었다.
“이연 씨도 이거 사용해 보셨나요?”
“올해 초부터 쓰기 시작했는데, 괜찮더라고요. 건조 방지도 되고. 촉촉함이 오래 지속되어서 가끔 립밤 대신 이거 바를 때도 있어요.”
이연이 직접 사용한 제품이라고 하자 팬들이, 특히 여성 팬들의 눈빛이 반짝거리기 시작했다.
MC가 이때를 노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준비된 이벤트 소식에 대해 알렸다.
“오늘부터 일주일간 이 제품, 전 매장에서 특별 할인가로 판매될 예정이니까 많은 관심 부탁드리겠습니다. 본인이 직접 사셔도 되고, 아니면 애인이나 여자인 친구, 어머님, 누나, 여동생 등등한테 사셔서 선물로 주셔도 되니까 포장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직원에게 말씀해 주시면 됩니다. 아셨죠?”
“네-!”
하니엘이 단지 제품 홍보만을 위해 이곳까지 온 건 아니었다.
그녀들의 직업은 가수, 아이돌이다.
그렇다면.
“하니엘 여러분들의 무대를 안 보고 넘어갈 순 없겠죠?”
사람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모아 ‘예-!’ 하고 큰 소리로 외쳤다.
무대가 준비되는 동안, 이연은 빠르게 단상 위를 체크했다.
공간이 상당히 좁다.
그렇다 보니 동선이 서로 꼬이지 않도록 잘 계산을 해야 한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무대를 선보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긴장되는데, 여건까지 좋지 않으니까 이래저래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멤버들에게 어떤 식으로 동선을 수정하면 좋을지 설명해 줄 시간조차 없었다.
‘불안한데.’
지금까지 아무런 사고 없이 일본 활동을 잘 이어왔는데.
괜히 여기서 안무를 엉망진창으로 선보이면 꽤나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이런 거 하나하나가 영상 기록으로 남아 인터넷에 오랫동안 떠돌기 때문이다.
이연의 이런 속내를 스태프들이 당연히 알 리 없었다.
곧바로 ‘beyond’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시간을 안 주네.’
작전 타임을 외칠 틈도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다른 멤버들이 눈치껏 잘해주기만을 바라는 것 말고는 달리 방도가 보이지 않았다.
이연이 첫 소절을 노래하면서 포문을 열었다.
현장 분위기가 점점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제 이연이 앞을 향해 시선을 고정한 채로 걸음을 뒤로 빼야 한다.
만약에 그대로 했다가 뒤에 누군가가 서 있으면 어쩌지?
이런 걱정을 떠안으면서 떨어지지 않는 뒷걸음을 실행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연이 우려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녀가 뒤로 빠지고도 남을 공간이 넉넉하게 확보되어 있었다.
단상이 좁은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연은 좌, 우측 멤버들을 살폈다.
그녀들이 눈치껏 이연을 위해서 자체적으로 동선을 수정한 거였다.
구두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알아서 척척 호흡을 맞췄다.
한 멤버가 좁은 공간에서 안무를 펼치기 힘들 거 같으면, 주변 멤버들이 더 거리를 벌리면서 그 멤버를 도왔다.
이연은 멤버들의 이런 협동심에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그녀들이 기특하게 느껴졌다.
‘이제 어엿한 가수가 다 되었네.’
물론 데뷔한 순간부터 가수로 불리긴 했지만.
이제 막 데뷔한 신인이라는 수식어 정도는 슬슬 지워도 될 것 같았다.
* * *
예정되어 있던 모든 스케줄을 마친 멤버들에게 마침내 일본에서의 짧은 휴가가 주어졌다.
이날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멤버들은 일본의 어느 한 대형 쇼핑몰로 몰려가 그동안 억누르고 있던 소비 욕구를 모두 풀어냈다.
자신이 사고 싶었던 것, 그리고 지인들에게 선물로 줄 것들까지 전부 다 구입하고 나니 양손이 모자랄 정도였다.
일일 짐꾼 역할을 맡게 된 박도수 매니저가 멤버들에게 ‘그만 좀 사고 가자!’라고 애원하고 나서야 겨우 쇼핑 투어가 끝났다.
이다음, 멤버들은 유키의 본가로 향했다.
유키의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동생들이 하니엘 멤버들을 버선발로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유키 언니 첫째 여동생, 유메코예요.”
일본말이 아닌 한국말로 자신을 소개하는 유메코의 모습에 멤버들은 귀를 의심했다.
비아가 혹시나 해서 우미에게 물었다.
“나, 드디어 일본어를 통달한 건가? 유메코 말이 한국말로 들리는데?”
“한국말 맞아.”
비아가 아쉬움에 짧게 혀를 찼다.
멤버들처럼 급하게 다른 나라 언어를 배웠다는 티가 전혀 안 날 정도로 능숙한 한국어 솜씨를 뽐내는 유메코.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한국말을 잘하게 되었는지, 유키가 직접 설명해 줬다.
“유메코도 저처럼 한국으로 넘어가서 아이돌이 되고 싶다고 해서요. 그래서 초등학생 때부터 시간 날 때마다 한국어 배우고 있어요. 유메코 말고도 주변에 한국말 배우는 친구들이 많대요.”
아이돌이 되기를 희망하는 애들이 아니어도 요즘은 드라마나 영화, 노래 등 다양한 문화 형태로 한국어를 쉽게 접할 수 있으니까. 그래서 젊은 일본인들 사이에서는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했다.
유메코가 이연을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연 언니가 저희 반에서 인기 가장 많아요. 오늘 이연 언니 만난다고 하니까 애들이 엄청 부러워하더라고요.”
“그래? 애들한테 고맙다고 꼭 전해줘.”
이연은 낯선 땅 일본에서도 동경의 대상으로 손꼽히고 있었다.
문화라는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이연은 일본의 평범한 가정을 통해 새삼 깨달았다.
* * *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에도 하니엘의 여정은 순탄치 않았다.
그녀들을 떠나보낸다는 게 아쉬운 모양인지, 공항에는 하니엘이 입국할 때보다도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
대기 중이던 경호원들만으로는 감당하기 벅찰 정도였다.
결국 공항 측의 협조까지 받고 나서야 하니엘 멤버들은 겨우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다.
그냥 떠나기에는 아쉬웠는지, 하니엘 멤버들은 몰려든 팬들을 위해서 즉석으로 포토타임을 가졌다.
수많은 일본 팬들과 취재진이 하니엘의 출국하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담기 위해 자리를 잡았다.
사방에서 번쩍이는 카메라 불빛들.
그럼에도 멤버들은 이제 이런 상황에 많이 익숙해진 모양인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끝까지 웃는 얼굴을 유지했다.
5분 정도 짧게 시간을 할애한 뒤, 이연과 멤버들은 사람들을 향해 허리를 크게 숙이고서 작별 인사를 건넸다.
비행기에 탑승한 그녀들은 마치 합이라도 맞춘 것처럼 동시에 탄식을 쏟아냈다.
“오늘 한국으로 못 돌아가는 줄 알았네.”
“우리를 안 놔줄 기세던데?”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도 일주일의 활동 기간이 너무 짧다는 식으로 원성이 자자했다.
어차피 이번 한 번으로 일본 활동을 끝낼 건 아니다.
나중에도 계속해서 일본과 세계 각국을 오가며 점점 하니엘의 활동 영역을 넓혀갈 예정이다.
이를 위해서 조만간 열리게 될 하니엘의 첫 단독 콘서트가 중요하다.
콘서트를 성공적으로 마쳐야 앞으로 그녀들의 행보에 탄력이 붙게 될 테니까.
일본 활동까지 끝냈으니, 이연은 당분간 콘서트 준비에 집중할 생각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게 있다.
“숙소에 가면 짐 풀고, 바로 안무 연습하자.”
“가자마자?”
“어제는 쉬었고. 오늘은 특별히 일정도 없었잖아. 시간도 많이 남고. 이럴 때 연습해야지.”
열의 넘치는 이연과 달리, 멤버들의 표정은 그리 밝아 보이지 않았다.
비아가 ‘더 쉬어도 되잖아’라고 말을 했지만, 이연은 이에 대해 딱 잘라 답했다.
“충분히 쉬었잖아.”
“…….”
야외무대에서는 찰떡같은 호흡을 자랑했던 그녀들이지만.
아직 연습량에 대해선 서로 화음이 맞지 않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