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3화
제81화. 일본 활동(1)
2라운드 마지막 미션 녹화가 끝난 다음 날.
이연은 하니엘 멤버들, 그리고 스태프들과 함께 일본 활동을 나서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공항을 찾았다.
그녀들의 일본 진출 관련 소식이 기자들에게 널리 퍼진 탓에 공항에는 벌써부터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멤버들도 사람들이 공항에서 자신들을 찍기 위해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말을 미리 듣긴 했었는데.
“이렇게까지 많을 줄은 몰랐어.”
우미의 말에 멤버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들이 계속 밖에 있으면 교통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일찍 공항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새벽 이른 시간대라 공항 내에는 유동 인구가 많이 없다는 점이었다.
대신에 그 빈자리를 기자들과 하니엘을 보기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공항에서 대기하던 팬들이 채웠다.
박도수 매니저가 멤버들이 각자 들고 있는 개인 짐들을 맡았다.
“짐은 내가 잠깐 들고 있을 테니까, 저기 저쪽 가서 사진 찍고 와.”
고개를 끄덕인 그녀들은 임시로 마련된 포토존으로 향했다.
연예계 관련 기사를 보면, 인기 연예인의 공항 패션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하니엘도 그걸 의식한 탓에 새벽 시간임에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전신을 다 신경 써야 했다.
여기에 대한 보람을 느끼게 하기 위함인지, 사람들은 하니엘이 잠깐 숨 쉬는 모습조차도 놓칠 수 없다는 기세로 사진과 영상을 찍어댔다.
“오른쪽 한번 봐주시겠어요?”
“정면 보시고 손가락 하트 포즈 한 번씩만 취해주세요!”
“멤버 분들, 서로 좀 더 붙어주세요! 한 화면에 잘 안 나와서요!”
기자들의 요구가 쏟아졌다.
이연을 가운데에 두고 하니엘 멤버들이 서로 몸을 가까이 붙였다.
자신들을 찍는 카메라가 몇 대나 있는지, 개수를 셀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짧게 사진을 찍은 뒤, 그녀들은 출국을 위해 다시 걸음을 옮겼다.
워낙 인파가 많이 몰린 탓에 경호원들조차 그녀들을 보호하는 데 애를 먹을 정도였다.
겨우 비행기 안에 들어선 그녀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이연의 오른쪽 창가 자리에 앉은 여솜이 벌써부터 지친 모양인지 시트에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아직 일본 스케줄은 시작도 안 했는데. 이미 지쳐 버렸어.”
“가는 동안 잠깐 눈이라도 좀 붙이고 있어.”
시간은 얼마 안 되지만, 그 짧은 시간이 정신없이 움직이는 아이돌들에게는 천금과도 같다.
여솜이 ‘그래야겠어’라고 말하면서 안대를 찾는 사이, 이연은 또 다른 옆 파트너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게 뭐야?”
우미의 손에 못 보던 봉투 하나가 들려 있었다.
“이거? 아까 공항에서 어떤 팬이 선물로 편지를 주더라고. 뭘까 싶어서 읽어보려고.”
기자들의 취재 열기 못지않게 팬들의 선물공세 또한 굉장했다.
이연도 선물을 한가득 받았지만, 전부 다 비행기 안으로 들고 올 수 없었기 때문에 잠시 다른 곳에 맡겨둬야 했다.
그녀가 받은 선물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했다.
몇 백만 원에 달하는 고가의 명품 핸드백을 시작으로 각종 화장품, 먹을 거, 마실 거 등등.
팬들이 주는 선물만으로도 생활이 가능할 정도로 그 종류가 다양하고 양도 많았다.
우미가 어느 팬이 준 손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취업도 잘 안 되고. 가정환경도 좋지 않아서 하루하루가 우울했는데, 하니엘의 무대를 보면서 많은 힘을 얻고 있다고, 정말 고맙다는 내용의 편지였다.
우미 옆에서 편지 내용을 같이 확인한 이연은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내 무대로 인해 누군가의 인생이 밝게 빛나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보람찬 일이기 때문이었다.
우미도 이연과 같은 기분을 느꼈는지 입가에 짙은 미소가 자리를 잡았다.
“가수하기를 잘했다. 그치?”
이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서로 가까이 붙어 있는 나라라 할지라도 그 나라 특유의 정서와 풍경이 존재하는 법이다.
난생 처음 일본 땅을 밟은 이연은 공항에 들어서면서부터 이 말을 크게 체감했다.
그러나 한국과 크게 다르지 않은 현상이 있었다.
일본 쪽에서도 수많은 사람들이 하니엘의 모습을 눈으로, 혹은 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담기 위해 공항에 몰려든 거였다.
오히려 한국에 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인파를 자랑했다.
일본에서도 하니엘의 인기가 상당하다는 건 이미 뉴스를 통해 여러 차례 나간 적이 있었지만.
멤버들과 스태프들은 이 정도까지일 줄은 몰랐었다.
덕분에 바빠진 건 경호원들이었다.
앞서 걸어가던 경호원이 방향을 잡고, 나머지 경호원들은 멤버들의 안전에 유의하면서 그녀들을 공항 밖으로 이끌었다.
차에 타자마자 멤버들은 합을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짧은 한숨을 토해냈다.
박도수 매니저가 운전대에 오르면서 그녀들에게 다음 일정에 관해 말했다.
“오전에 아침 방송 하나 출연할 거니까 그쪽으로 바로 이동할게. 짐들은 그대로 차에 놔뒀다가 나중에 점심 먹고 호텔에서 체크인할 때, 그때 짐 풀면 돼.”
멤버들의 대답 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그래도 일정은 일정이니까.
힘들더라도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
여러 대의 차량이 한꺼번에 공항을 빠져나갔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엄청난 피곤함에 찌들었던 멤버들.
그러나 한국과는 다른 일본의 이국적인 풍경 덕분에 피로감이 어느 정도 사라졌다.
“저 건물, 되게 작고 예쁘네.”
“어머, 그러게.”
건물 양식도 미묘하게 달랐다.
신기해하는 멤버들 속에서 오직 유키만이 그러려니 하고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외곽 쪽으로 빠지면 저런 단독주택들 엄청 많아요. 저희 집도 저렇게 생겼어요.”
유키의 발언 덕분에 그녀의 본가에 대한 관심이 폭발했다.
“진짜?”
“나중에 놀러 가도 돼?”
유키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당연하다는 것처럼 답했다.
“일정만 허락한다면요.”
박도수 매니저에게 은근히 압박을 가했다.
유키의 속내를 알아차렸는지 박도수 매니저가 크게 웃었다.
“걱정 마. 너희 놀 시간은 충분히 빼줄 테니까.”
“정말이죠? 나중에 가서 다른 말하기 없기에요?”
“걱정 마. 내가 그 정도 힘은 써줄 수 있으니까.”
하니엘이 유명해질수록 박도수 매니저 또한 회사 내에서 행사할 수 있는 영향력이 점점 늘어가고 있었다.
현재 LC 엔터테인먼트를 대표하는 걸그룹의 대부분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박도수니까.
회사 눈치만 보던 시절은 이제 옛 추억이 되었다.
그녀들이 필요하다는 게 있으면 박도수 매니저가 정리해서 회사 측에 알리면 된다. 그러면 나머지는 LC 엔터테인먼트가 알아서 대처해 줄 것이다.
한참 동안 도로를 달린 끝에 방송국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차에서 내린 하니엘 멤버들은 박도수 매니저, 최공예 코디, 그리고 기타 몇몇 스태프들과 함께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이때, 그녀들과 반대로 막 방송국에서 나오던 어느 한 미모의 여성 그룹이 하니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중 한 명이 반가운 표정으로 크게 외쳤다.
“ゆき!”
그녀의 외침에 유키가 걸음을 멈췄다.
“미나미잖아!”
“久しぶり! 元気だった?”
“もちろん.”
하니엘 멤버들은 여자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비아가 갑자기 자신의 관자놀이를 지그시 눌렀다.
“모르는 말이 들려오니까 갑자기 머리가 어질어질해.”
이연이 피식 웃으면서 비아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앞으로 많이 듣게 될 텐데. 벌써부터 골치 아파하면 어떻게 하려고.”
“언니는 뭐라고 하는지 알아들어?”
“대충은.”
이연은 전생에서 워낙 많은 나라를 다니다 보니 낯선 언어를 접하는 거에 큰 거부감이 없었다.
그 나라의 언어에 맞춰서 대사를 바꾸는 경우도 허다했다.
그쪽 관객들이 무대에 좀 더 몰입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선 역시 해당 국가의 언어로 노래하고 연기를 펼치는 게 가장 효과적이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이연은 틈날 때마다 일본어, 영어 공부를 조금씩 해뒀다.
현지인 수준은 아니더라도, 막힘없이 의사소통을 주고받는 단계 정도는 된다.
“보니까 저 사람, 예전에 유키하고 같이 아이돌 준비하던 동기인가 본데.”
“진짜? 그게 해석이 된다고?”
“궁금하면 본인한테 직접 물어봐.”
마침 유키가 짧게 대화를 마치고 다시 하니엘 일행이 있는 곳으로 돌아왔다.
비아가 확인차 묻기 전에 유키가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해요. 옛날에 저하고 같이 소속사 오디션 보러 다니던 친구를 만나서…… 일본에서 아이돌 활동 시작했다는 말은 들었는데, 설마 여기서 마주칠 줄은 몰랐어요.”
이연이 비아를 향해 어깨를 작게 으쓱였다.
“거 봐. 내 말이 맞지?”
“우와. 이 언니, 진짜 못 하는 게 없네.”
유키는 두 사람이 왜 이런 말을 하는지 한동안 이해하지 못했다.
* * *
아침 방송에 출연한 하니엘은 같은 촬영장이면서도 어딘가 낯선 분위기를 풍기는 현장에 자리를 잡고 순서를 기다렸다.
통역을 맡은 여성이 그녀들에게 빠르게 설명했다.
“스튜디오에서 이쪽 연결하기 전에 먼저 스태프가 신호를 줄 거예요. 저기 카메라에 불 들어오면 그때 단체 인사 먼저 하시면 돼요. 그 이후에는 저하고 여기 계신 아나운서분이 여러분들한테 돌아가면서 질문드릴 테니까 편하게 답해주세요. 한국말로 하셔도 괜찮아요.”
유키가 손을 들면서 물었다.
“저는 일본말로 해도 될까요?”
“네, 물론이죠.”
저녁에 있을 음악 방송에선 유키가 대신 통역 역할을 맡을 예정이다.
그래서 오랜만에 카메라 앞에서 일본어로 입을 풀고 싶었다.
3, 2, 1.
큐 사인이 떨어지자, 통역이 설명한 대로 카메라 위쪽에 불빛이 들어왔다.
이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둘, 셋.”
“おはよう ございます! 皆さんの天使, 하니엘です!”
일본 활동에 맞춰서 인사말도 일본어로 바꿨다.
현장에서 급조한 것치고는 나름 호흡이 잘 맞았다.
일본 아나운서가 이연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통역이 이연에게 그녀의 말을 번역해서 들려주기도 전에 이연이 먼저 입을 열었다.
“네. 제가 여기 리더를 맡고 있어요.”
이연이 리더인지 묻는 질문이었다.
심지어 대답한 것도 일본어였다.
간단한 내용이었기에 이연은 통역의 힘을 빌리지 않고 바로 답할 수 있었다.
일본 아나운서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제 말을 어떻게 알아들으시는 건가요?”
“일본어 조금 할 줄 알거든요.”
“혹시 유키 씨가 알려주셨나요?”
유키가 아나운서의 물음에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몇 개 알려준 적은 있었는데. 언니가 이렇게까지 능숙하게 소화하실 줄은 몰랐어요.”
“그러게요. 저도 놀랐어요. 한국 사람하고 대화하는 느낌이 아니라 일본 사람하고 이야기 나누는 기분이네요. 발음도 너무 좋으신데요?”
이연이 합장하듯 두 손을 모으면서 고개를 살짝 숙였다.
반면, 멤버들은 아나운서와 이연, 유키. 세 여성이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론 이런 생각도 들었다.
우리 리더는 낯선 땅 일본에서도 여전히 믿음직하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