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0화
제79화. 신경 쓰이는 것(2)
강윤애는 이은솔에게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 저녁에는 일정이 있는지. 이런 질문들을 계속해서 꺼냈다.
마치 이은솔이 어디 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싶다는 듯이.
이 때문에 이연은 이은솔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려고 했었던 발걸음을 잠시 멈춰야 했다.
저 사이에 끼어들어서 인사만 건네고 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못 본 척하자.’
그렇게 반대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하던 때였다.
“아, 선배님!”
하필이면 복도에서 최솔림과 마주치고 말았다.
회사에서 우연히 대선배를 만났으니, 예의 바른 최솔림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안녕하세요!”
오늘따라 그녀의 목소리가 왜 이리도 기운찬지, 이연은 알 수가 없었다.
조금은 조용한 목소리로 인사해도 될 거 같은데 말이다.
최솔림의 인사말 덕분에 이은솔과 강윤애, 두 사람도 이연의 존재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연아. 언제부터 거기에 있었어?”
이은솔이 강윤애를 벗어나 이연 쪽으로 먼저 다가왔다.
순간 강윤애의 표정이 굳었다.
그러나 이내 웃는 얼굴로 표정을 싹 바꾸고서 그녀도 이은솔의 뒤를 따랐다.
이연은 그녀를 보고 있자니 어느 한 인물이 절로 떠올랐다.
‘유키 같네.’
자유자재로 가면을 바꿔 쓰는 게 마치 유키와 같은 스타일처럼 느껴졌다.
한편, 이연만 있을 줄 알았던 최솔림은 그녀보다 더 선배인 이은솔까지 나타나자 크게 당황하는 반응을 보였다.
“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처,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최솔림 씨 맞죠? SSS 방송 잘 보고 있습니다.”
이은솔이 먼저 그녀에게 아는 척을 하자, 최솔림의 얼굴이 사과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여, 영광이에요!”
한편, 강윤애는 주도권을 후배들한테 넘겨준 게 마음에 안 드는 모양인지 이은솔 쪽으로 슬쩍 팔을 뻗었다.
그러더니 갑자기 이은솔과 팔짱을 꼈다.
“뭐 하는 거야, 윤애야.”
그녀의 적극적인 스킨십에 당황한 모양인지, 이은솔이 재빨리 팔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강윤애도 물러설 생각이 없는지 이은솔의 왼팔을 품에 안고 놔주지 않았다.
“왜 그러세요, 선배님. 예전에는 저하고 자주 팔짱도 끼고, 손도 잡고. 그러셨잖아요.”
“내, 내가 언제.”
“에이. 또 그런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사람들도 다 알아요.”
이은솔은 이연의 눈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연아. 윤애가 그냥 나하고 친하게 지내고 싶어서 그러는 거야. 오해하지 말고. 아, 알았지?”
이연은 크게 상관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빠 보이시니까 저 먼저 가볼게요, 선배님. 그럼 나중에 또 뵐게요.”
꾸벅.
한 차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마친 이연은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은솔은 오늘따라 그녀의 걸음이 유독 빠르게 느껴졌다.
* * *
원래는 매니저가 숙소까지 이연을 바래다주기로 했으나.
중간에 급한 회의가 잡힌 탓에 어쩔 수 없이 이연 혼자서 숙소로 돌아가기로 했다.
택시를 잡기 위해 어플을 실행하고 호출 버튼을 눌러봤지만, 생각보다 바로 잡히지 않았다.
‘퇴근 시간도 아니고. 왜 이렇게 안 잡히나 모르겠네.’
그렇다고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도 애매했다.
요즘은 이연을 몰라보는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하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기왕이면 조용히, 편안하게 가고 싶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내 차 가져올걸 그랬어.’
후회는 늘 그렇듯 시간이 흐르고 난 다음에야 찾아온다.
기다리다 못한 이연은 결국 지하철을 이용하기로 결심하고 방향을 돌리려 했다.
이때.
빵빵-!
도로변에서 차 경적 소리가 들렸다.
교통 문제 때문이 아닌, 누군가를 부르기 위해 일부러 소리를 낸 듯한 느낌이었다.
이연이 고개를 돌리자, 어디서 많이 봤던 차 한 대가 비상등을 켠 채 정차되어 있었다.
창문이 열리자, 이은솔이 안쪽에서 고개를 내밀면서 이연에게 손짓했다.
“숙소 갈 거지? 얼른 타.”
“선배님이 그걸 어떻게…….”
“아까 박도수 매니저님 만났거든. 너 바래다주기로 하셨는데, 갑자기 회의 잡혀서 당황해하시길래 내가 대신 하겠다고 했어. 마침 나도 볼일 끝나고 가려고 했으니까.”
“강윤애 선배님하고 약속 있던 거 아니었나요?”
이연은 자신이 말하고도 본인이 놀란 모양인지 한 손으로 입가를 가렸다.
왜 이런 말이 갑자기 튀어나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말투에 약간의 가시도 돋아 있었다.
이은솔도 그걸 느꼈는지,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윤애 보러 회사에 온 게 아니라, 오 대표님 만나러 온 거니까. 원래는 식사하려고 했었는데. 의찬이가 갑자기 일정이 생겨서 다음으로 미루기로 했거든. 정말이야.”
믿어달라고 간절히 빌었다.
이연은 작게 한숨을 삼켰다.
그러면서 이은솔의 차에 얌전히 올라탔다.
그제야 이은솔은 안도할 수 있었다.
“숙소가…… 이 주소 맞지?”
“네, 맞아요.”
“가는데 좀 걸릴 수도 있어. 거리는 짧은데, 이 시간에 이쪽 도로는 항상 막히거든. 그럼 출발할게.”
이연이 이은솔의 차를 얻어 타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그러나 최근은 아니다.
가장 가까운 날짜라고 해봤자 몇 달 전이다.
이연은 자신이 앉은 보조석 시트 위치에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시트 포지션이 제가 앉았을 때 딱 맞는 걸 보니까 옆에 다른 여자 태우신 적 있으신가 보네요.”
“응? 아, 아니야! 저번에 너 옆에 태우고 난 후에 아무도 안탔어. 나 혼자만 타고 다녔으니까 시트 포지션이 그대로인 거야.”
“그래요?”
“어. 진짜로. 맹세할게.”
“…….”
이연은 오늘따라 민감하게 반응하는 자신의 이런 모습이 굉장히 낯설었다.
평소에는 이런 거 하나도 신경 안 쓸 텐데.
왜 이렇게 된 건지 본인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이어질 무렵.
이은솔이 먼저 강윤애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은애하고는 아무 사이도 아니야. 친한 오빠하고 동생. 그거 말고는 딱히 없어.”
“네. 알고 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기자들로부터 24시간 내내 주목을 받고 있는 이은솔이 강윤애와 연애 기류를 이어가고 있었다면, 기사가 안 났을 리가 없다.
나름 조심하면서 만났던 이은솔하고 이연도 스캔들 기사가 나지 않았던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은솔의 말이 맞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아니, 사실 이은솔과 강윤애가 서로 사귀는 관계라 할지라도 예전의 이연은 크게 신경 안 썼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의 이연은 뭔가 달랐다.
“강윤애 선배님은 선배님 좋아하는 것처럼 보이더라고요.”
이은솔이 마른침을 삼키는 소리가 이연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였다.
“그, 그렇게 보여?”
“네.”
같은 여자라서 그런지, 이연은 강윤애의 마음이 어떤지 거의 확실하게 보고 있었다.
사실 이은솔도 어느 정도 눈치는 챘다.
강윤애는 오늘뿐만 아니라 이전부터 유독 이은솔한테만 살갑고 다정하게 대하는 모습을 자주 보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노골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어필하는데. 이쯤 되면 상대방이 눈치 못 챌 리가 없다.
“윤애가 무명 시절이 좀 길었거든. 내가 그때 윤애 몇 번 도와준 적 있었는데, 그거 때문에 나한테 호감이 생긴 거 같아.”
자신이 어려울 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주는 이가 있다면, 그 사람은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다.
이연도 전생에 그랬으니까.
강윤애 입장에선 이은솔이 그런 존재였다.
처음에는 고마움과 감사의 마음으로 시작했을 감정이 지금은 연애라는 종착지에 도달했다.
“강윤애 선배님이라면 좋은 분이지 않나요? 예쁘시고. 성격도 좋으시고. 그리고 연예계에서 평판도 나쁘지 않고. 선배님하고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해요.”
“물론 윤애가 나를 좋아해 주니까 기쁘긴 하지만. 그래도…….”
망설이는 모습을 보이던 이은솔은 겨우 결심을 굳혔다.
“나, 좋아하는 여자가 따로 있거든. 윤애보다 예쁘고, 성격 좋고. 연예계에서 평판도 괜찮고. 그리고…… 개인적으로 나하고 어울렸으면 하는 사람이 있어.”
이연은 고개를 황급히 창문 쪽으로 돌렸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이은솔은 걱정되는 마음으로 물었다.
“왜? 컨디션 안 좋아서 그래?”
“아, 아니요. 멀미기가 느껴져서요.”
“차 잠깐 세울까?”
“괜찮아요.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냥 가주세요.”
이연은 창밖에 어렴풋이 비치는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여태껏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비아가 여기에 없어서 다행이네.’
만약 그녀가 차 안에 같이 있었더라면.
이연은 분명 놀림거리가 되었을 것이다.
* * *
다수의 연예인 게스트들이 참가하는 토크 예능 프로그램 녹화 현장.
이곳에서 이연은 강윤애와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안녕.”
강윤애는 이연과 짧게 인사를 나눈 뒤에 다시 대본 쪽으로 시선을 고정시켰다.
이연도 그녀를 따라 가방에서 대본을 꺼내 들었다.
스태프들이 바쁘게 왔다 갔다 하면서 시끄러운 소음을 내도 두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대본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PD가 작가를 닦달하기 전까진 그랬다.
“은솔 씨, 언제쯤 도착할 수 있는지 아직 확인 안 해봤어?”
“네. 10분 안에는 도착한다고 하셨는데…….”
“혹시 모르니까 확인 한번 해보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어! 그러다가 펑크라도 나면. 네가 다 책임질 거야? 어?”
“죄, 죄송합니다!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막내 작가가 급하게 자신의 스마트폰을 찾아 헤맸다.
이때 강윤애가 잠시 대본을 내려놓았다.
“제가 선배님한테 전화해 볼게요. 아마 바로 받으실 거예요.”
그러나 그녀의 기대와는 달리, 생각보다 신호음이 길게 이어졌다.
막내 작가가 불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전화 안 받으세요?”
“주무시고 계신가 봐요.”
“그러면 안 되는데…….”
막내 작가의 얼굴에 불안감이 번졌다.
이번에는 이연이 나섰다.
“저도 한번 걸어볼게요.”
그러나 강윤애는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될 리가 없다는 식으로 말했다.
“안 받을걸?”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요. 만약에 주무시고 계신다면 깨우기 위해서라도 계속 전화를 거는 게 좋겠죠.”
매니저는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말만 계속 돌아온다고 하니까.
혹시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확인차 전화를 걸어보기로 했다.
통화 버튼을 누른 지 5초도 지나지 않았는데.
-여보세요?
곧바로 전화가 연결되었다.
강윤애와 막내 작가가 덩달아 놀랐다.
반면 이연은 침착한 목소리로 이은솔에게 현 상황에 대해 물었다.
“선배님. 매니저님 스마트폰이 꺼져 있다고 해서 선배님 쪽으로 전화 걸어봤어요. 10분 전까지 오실 수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하던데.”
-아, 우리 지금 막 주차장 도착했으니까 금방 갈 수 있어. 그보다…… 형! 전화기 꺼져 있는지 확인해 보세요!
건너편에서 매니저가 미안하다고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배터리가 다 닳아서 그런가 봐. PD님하고 작가님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네. 알겠습니다.”
-이따가 봐, 연아.
“조심해서 오세요.”
통화를 마치자마자 이연은 질투심에 활활 타오르는 강윤애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은솔 선배님, 전화 잘 받으시네요.”
이연은 왠지 모를 승리감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