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5화
제77화. 천사 리더(5)
이연이 누군가를 좋게 평가하는 일 자체가 상당히 보기 드문 일이다.
그녀의 ‘잘한다’라는 기준은 다른 가수들에 비해 한없이 높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동서남북 팀도 퍼포먼스를 펼치면서 사실 그렇게까지 큰 기대는 하지 않았었다.
볼만했다. 그냥저냥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 소감만 나와도 대성공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이연의 ‘잘 봤다’라는 짧은 말이 동서남북 팀원들에겐 크나큰 감동으로 다가왔다.
특히나 최솔림의 경우에는 현실이 아닌 꿈을 꾸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 정도였다.
모든 연습생들의 무대가 끝났다.
이제 심사 위원들의 평가만이 남았다.
혜원은 이연이 동서남북 팀에게 호평을 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도 부러운 목소리를 냈다.
“우리 애들도 동서남북 팀처럼 잘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혜원이 이연과 비슷한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결국 그녀 또한 사람이다.
다른 팀들보다 아이비제이의 곡을 골라서 무대를 펼친 연습생 팀에게 더 마음이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못한 걸 잘했다고 억지로 포장할 생각은 없었다.
좋게 보고 싶다는 마음만 있을 뿐. 그게 반드시 높은 점수를 준다는 뜻은 아니니까.
그건 연습생들에게도 도움이 되지 않는 행동이라는 걸 혜원도 잘 안다.
그래서 동서남북 팀의 활약상이 더 부럽게 느껴졌다.
이연은 쓴 미소를 지으면서 지난날을 회상했다.
“중간점검 때 싫은 소리를 늘어놓은 보람이 있네요.”
이연의 잔소리에 무너지진 않을까. 걱정되었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데뷔라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이 정도 일은 감내하고도 남아야 한다.
그래서 이연은 오늘의 동서남북 팀원들이 대견스러웠다.
실제로 공연도 잘 선보였으니, 이연은 부담 없이 점수를 매길 수 있었다.
오히려 혜원 같은 애매한 입장이 점수를 주기가 힘들었다.
반대로 미랑은 시원스럽게 점수를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고정 심사 위원들 역시 무대를 보는 동안 이미 마음을 굳힌 모양인지 긴 상의 없이 빈 항목들을 숫자로 채워 나갔다.
스태프들이 점수를 계산하는 동안, 서윤철 PD가 심사 위원들을 찾아와 말했다.
“점수 발표는 의찬 씨하고 연습생들만 따로 모여서 촬영 진행할 예정이니까 바쁘신 분들은 먼저 가셔도 됩니다. 결과는 나오면 저희가 따로 알려 드리겠습니다.”
심사 위원들은 알겠다고 말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굳이 결과를 들을 필요도 없었다.
왜냐하면.
어느 팀이 1위를 차지할지. 이미 대략 다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현아 트레이너가 이연에게 물었다.
“연아. 너도 회사로 바로 갈 거지?”
“아니요. 저는 점수 발표하는 것까지 보고 갈게요.”
이연의 말을 접수한 미랑이 ‘그럼 나도’라고 답했다.
혜원은 처음부터 보고 갈 생각이었는지 먼저 카메라 뒤쪽에 자리를 잡은 상태였다.
오채일 대표도 특별 심사 위원 셋과 같이 스튜디오를 응시했다.
15분 후.
결과가 나왔다는 스태프들의 말에 따라 연습생들은 긴장감이 가득 담긴 걸음으로 다시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23명의 연습생들 모두가 다 본인들이 속한 팀원들과 손을 마주 잡거나 서로를 부둥켜안으며 터질 듯이 두근거리는 심장을 달래기 위해 노력했다.
잠시 뒤에 강의찬이 마이크를 들고 무대에 올랐다.
“아아. 제 목소리 잘 나오죠?”
오디오 스태프가 손으로 오케이 신호를 보냈다.
음향 체크까지 모두 끝낸 후에 다시 촬영이 재개되었다.
“2라운드 첫 번째 미션이 모두 종료되었습니다. 지금 제 손에 심사 위원분들이 매긴 평가 결과가 적혀 있는데요.”
강의찬의 손에 들린 큐시트 안에 승자와 패자의 정체가 담겨 있었다.
연습생들은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늘 그렇듯 평가, 투표 결과를 듣는 이 순간이 가장 떨린다.
연습생들을 보고 있으니 미랑의 머릿속에서 걸파이트 시즌 2 당시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랐다.
“저 심정, 나도 잘 알지.”
그러자 혜원이 옅은 미소를 띠었다.
“우리들 중에서 연이가 가장 잘 알지 않을까?”
“……그것도 틀린 말은 아니죠.”
이연은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SSS 참가 경력이 있는 사람이니까.
강의찬이 잠시 뜸을 들이면서 버라이어티 특유의 긴장되는 순간을 자체 연출했다.
“먼저 하위권부터 발표하겠습니다. 공개해 주세요!”
다섯 개의 팀 가운데 5위가 먼저 발표되었다.
5위는 예상대로 아이비제이의 노래를 선곡했던 팀이 차지했다.
혜원은 아쉬운 마음에 쓴 입맛을 다셨다.
어쩔 수 없었다.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물을 얻기 위해선, 잘하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까.
4위, 3위 팀이 연달아 공개되었다.
이때까지 동서남북 팀과 노력 100퍼센트 팀은 불리지 않았다.
미랑이 이연을 힐긋 바라봤다.
“우리 둘이 1위 자리 두고 경쟁하게 되었네?”
“‘우리’가 아니라 ‘연습생들’이겠죠, 선배님.”
각각 MAYO와 하니엘의 곡을 들고 공연을 펼쳐서 그런 건지, 미랑은 무의식적으로 자신들을 연습생들에게 투영했다.
1라운드 투표 1위와 2위를 차지했던 연습생들이 속한 팀들의 순위 대결.
이연은 조용히 최솔림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심사 위원들은 이미 결과를 다 알고 있기에 크게 긴장할 건 없었다.
하지만 연습생들은 다르다.
1위를 차지하는 팀에게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는 베네핏이 주어지니까.
이런 결과 하나하나가 굉장히 소중할 수밖에 없었다.
강의찬의 고조된 목소리가 현장을 가득 채운 긴장의 끈을 바짝 조였다.
“1위부터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2라운드 첫 번째 미션! 1위의 주인공은 바로……!”
아주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마침내 1위의 정체가 공개되었다.
“동서남북 팀입니다!”
최솔림과 네 명의 연습생들은 서로를 얼싸안으면서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1라운드에서 팀원의 반을 잃고 새롭게 팀을 개편해서 무대에 오른 만큼, 많은 심적 부담감을 느꼈을 것이다.
중간에 이연의 쓴소리도 여러 차례 듣기도 했고.
그럼에도 동서남북 팀은 훌륭하게 위기를 극복해 냈다.
하지만 이연은 동서남북 팀의 현 상황을 마냥 좋게만 보지 않았다.
오히려.
‘위기는 지금부터 시작이지.’
데뷔라는 도착 지점을 향해 겨우 몇 발자국 뗐을 뿐.
아직 최솔림과 동서남북 팀이 가야 할 길은 한참 멀었다.
* * *
SSS 시즌 2 촬영이 한창 진행될 때.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 역시 앨범 홍보를 위해 연습생들 못지않은 바쁜 스케줄을 보내고 있었다.
오늘도 서울에서 일찍 출발해 부산에 도착한 멤버들은 쉴 틈 없이 바로 촬영 현장으로 이동했다.
해운대에서 진행되는 야외 현장에 하니엘이 등장하자, 근처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갑작스러운 유명인들의 등장에 주변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렸다.
미리 대기하고 있던 경호원들이 그녀들을 촬영 현장으로 안내했다.
한창 앨범 활동 기간 중이라 치더라도.
“생각보다 사람들 반응이 너무 뜨거운데?”
비아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손으로 부채질을 하면서 자신의 생각을 흘렸다.
멤버들 역시 비슷한 느낌을 받은 모양인지 막내의 의견에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이전 활동 기간 때보다도 2배…… 아니, 3배 이상은 인지도가 늘어난 기분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사람은 역시 리더 권이연이었다.
오늘 촬영하기로 한 프로그램에서 방송 작가를 맡고 있는 여성이 어리둥절해하는 멤버들에게 말했다.
“이연 씨가 SSS에서 심사 위원으로 나오고 계시잖아요. 요즘 그게 엄청 핫한 거 같더라고요.”
실제로 여성 아이돌 중 이연이 혜원과 더불어서 개인 브랜드 평판 1, 2위를 다투고 있을 정도였다.
미랑이 3위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고작 데뷔 2년 차밖에 되지 않은 이연의 성장세는 어마어마하다고 볼 수 있었다.
원래부터 인기 있던 이연이 더 많은 인기를 누리기 시작하니, 하니엘 그룹도 덩달아 상승세를 이어가게 되었다.
해운대의 열기보다도 더 뜨거운 사람들의 관심은 이런 이유에서 비롯된 결과물이라 봐도 무방했다.
방송 작가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비아가 다른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은 목소리를 유지했다.
“추석쯤에 아운대가 방송으로 나가면, 우리 더 유명해지겠네.”
여솜도 같은 생각인지 고개를 여러 차례 끄덕였다.
“맞아. 거기서 우리, 두 번이나 우승했잖아. 하나는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그렇게 말하면서 여솜과 비아의 시선이 유키의 가슴 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시선을 느낀 유키가 눈을 찌릿 흘겼다.
“지금 저한테 싸움 거는 거죠? 예?”
“아, 아니야!”
“우리는 그냥. 그때의 아름다웠던 기억을 잠시 회상하고 있었을 뿐인걸.”
다른 사람들에게는 땀과 노력으로 수놓인 추억으로 기록되어 있을지 모르지만, 유키에게는 흑역사 그 자체로 남아 있었다.
방송으로 송출될 편집본도 확인했었다.
멤버들은 재미있게 잘 편집되었다고 공통적으로 평했지만, 유키만 유일하게 불만이 가득했다.
그래도 방송을 위해서라면야.
유키는 숭고한 희생정신(?)을 발휘해 참아내기로 했다.
아운대에서 하니엘 멤버들의 활약이 워낙 도드라진 덕분인지, 방송은 거의 그녀들이 주인공인 것처럼 나왔다.
하니엘의 활동에 당분간 호재만 가득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하나 더.
우미가 중요한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콘서트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알지?”
하니엘이 데뷔한 이후 처음으로 열리게 될 단독 콘서트.
지금은 막연히 기획만 잡아놓고 있는 단계에 불과했지만, 올해 안에는 반드시 할 예정이기에 일찍이 마음의 준비를 해둘 필요가 있었다.
아직 정식으로 발표가 안 났음에도 불구하고 팬들 역시 단독 콘서트에 대한 기대치를 높여가고 있었다.
단독 콘서트란 말에 리샤가 눈빛을 반짝였다.
“내가 나중에 데뷔하면 콘서트는 꼭 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되네.”
“아직 아니야.”
시기도, 장소도. 제대로 정해진 게 없다.
일단은 이번 앨범 활동부터 무사히 끝내고. 그다음에 본격적인 콘서트 준비에 돌입할 예정이다.
태블릿 PC로 하니엘의 스케줄표를 정리하던 박도수 매니저가 콘서트 이전에 그녀들이 놓쳐선 안 될 중요한 일정 하나를 언급했다.
“이번 달 말에 일본 스케줄 잡혀 있는 것도 잊지 말고. 알았지?”
“네!”
조금 전까지 짜증과 불만이 가득했던 유키의 표정이 금세 밝아졌다.
하니엘 첫 공식 일본 활동. 고국으로 돌아가서 처음으로 무대를 선보일 수 있다는 생각에 유키는 벌써부터 설렜다.
콘서트부터 일본 활동까지.
해야 할 일이 산더미다.
그럼에도 멤버들의 표정은 밝았다.
그만큼 자신들이 걸어온, 그리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이 밝고 희망차다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냥 좋은 일들만 일어나는 건 아니었다.
박도수 매니저가 본인의 스마트폰을 꺼냈다.
“예, 작가님. 아니요. 아직 촬영은 시작 안 했습니다만…… 네? 오늘 저녁에 연이 데리고 잠깐 올 수 있냐고요?”
본인의 이름이 나오자 이연의 관심이 쏠렸다.
통화를 끊은 박도수 매니저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
“연아. 오늘 서울 올라가면 동서남북 팀 연습생들 한번 만나볼 수 있어?”
“네. 어려운 일은 아니니까요. 근데 왜요?”
이유가 궁금했다.
박도수 매니저가 머리를 긁적였다.
“애들 사이에 트러블이 좀 있나 봐. 제작진이 네가 나서줬으면 좋겠다고 그러더라.”
급하게 들어온 SOS 요청에 이연은 이런 생각이 번뜩 들었다.
결국 우려했던 일이 터졌구나, 하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