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7화
제72화. 아운대(3)
평소의 하니엘이었다면 아침부터 회사에 위치한 안무 연습실로 출근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 일정은 달랐다.
안무 연습실 대신, 제작진이 미리 준비해 둔 경기장에 출근 도장을 찍었다.
경기장이 너무 커서 한눈에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비아의 입에서 감탄사가 절로 흘러나왔다.
“우와! 언니들, 저기 봐봐! 육상 트랙 있어!”
아운대에 포함되어 있는 종목들 중에서 계주만 자그마치 3개다.
그렇다 보니 달리기 종목 쪽에 많은 신경을 쓸 수밖에 없었다.
특히나 릴레이 계주는 아운대의 하이라이트 종목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남자, 여자, 그리고 남녀 릴레이 달리기는 가장 후반부에 배치되어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넓게 펼쳐진 경기장 풍경을 둘러보던 이연은 속으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돈 많이 썼네.’
제작진이 아운대에 얼마나 진심인지를 알 수 있었다.
하기야. 이미 흥행이 보장되어 있는 프로젝트인데. 허투루 준비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늘 하니엘은 미리 경기장을 둘러볼 겸, 그리고 각 종목에 맞춰서 연습도 해볼 겸 해서 이곳을 찾게 되었다.
하니엘과 같은 목적으로 먼저 경기장을 방문한 아이돌 그룹들이 멀리 흩어져 몸을 풀고 있었다.
박도수 매니저가 멤버들을 불러모았다.
“연습 시작하기 전에 스트레칭 하는 거 잊지 말고. 녹화가 모레인데, 괜히 무리하게 연습했다가 다치면 안 되니까. 알았지?”
“네!”
“그리고 리샤, 양궁은 저기 경기장 오른쪽 편에 보이지? 저기서 한다니까 나하고 좀 있다가 가 보자. 여자 릴레이 참가하는 멤버들은 트랙 한번 살펴보고. 연이는…… 어떻게 할래?”
아직 남녀 릴레이에 참가하는 아이돌들이 도착하지 않았다.
이연은 크게 신경 안 쓴다는 반응으로 일관했다.
“혼자서라도 조금씩 연습하고 있을게요. 축구나 농구도 아니고. 달리기니까요.”
그러면서 멤버들 연습 상대 역할도 가끔씩 해줄 생각이었다.
방향을 정했으니, 바로 행동에 나설 차례다.
이연은 우선 여자 릴레이 종목에 참가하는 멤버들과 같이 트랙으로 이동했다.
다섯 명이서 참가하는 종목이다 보니 순서가 굉장히 중요하다.
“비아가 선봉이라고 했지?”
“응.”
“그다음이 여솜, 우미 언니, 시우, 마지막이 유키.”
지금까지 이연이 그녀들을 봐온 데이터를 통해 살펴보면, 시우, 유키. 이 두 사람이 가장 순발력이 좋다.
그래서 둘을 네 번째, 다섯 번째에 배치하게 되었다.
본인들도 그걸 희망했다.
‘게다가 둘이 승부욕도 높고.’
스포츠 경기는 매너 있는 경쟁을 펼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기본이 되는 건 역시 이기겠다는 욕심이다.
승부욕으로 따지면 시우와 유키, 이 두 사람이 단연 톱이라 할 수 있다.
특히 유키의 독기는 아직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았을 뿐. 이연도 인정할 정도로 독하다.
이연이 멤버들의 달리기를 봐주는 사이, 리샤가 그녀를 찾았다.
“연아. 이거, 어떻게 당기는지 알아?”
양궁 연습을 위해 연습용 활을 구해온 것까지는 좋은데.
알려줄 사람이 없었다.
원래 아이돌들 연습을 위해 대기 중인 도우미들이 있었는데. 양궁 담당이 개인적인 용무 때문인지 잠시 자리를 비운 상황이었다.
겨우 시간을 내서 연습하러 온 건데. 도우미가 없다고 그냥 멍 때리면서 가만히 있기에는 너무 아까웠다.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이연을 찾게 되었다.
이연은 뭐든지 아니까.
“잠깐만.”
양궁을 배우긴 했었는데. 전생에서 다루던 활과 현대 시대의 활은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이연에게도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다.
활 좀 쏴보던 여자여서 그런 걸까.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데 생각보다 오래 걸리진 않았다.
“잠깐만. 먼저 한번 쏴보고.”
표적지를 앞에 두고 몸을 90도 각도가 되게끔 양발을 살짝 벌리며 섰다.
현에 화살을 끼운 뒤, 활을 표적지 방향으로 들어 올렸다.
턱 관절 아래까지 활을 바짝 당긴 후에 그대로 슈팅.
피융! 하는 소리와 함께 화살이 멀찍이 날아가 정확히 표적지에 꽂혔다.
따로 떨어져 각자 양궁 연습을 하던 다른 아이돌들은 표적지 한가운데에 꽂힌 이연의 화살을 보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먼저 와서 연습하던 아이돌들은 표적지에 화살을 맞히는 것조차 쉽지 않았는데.
이연은 단 한 발이면 충분했다.
“대충 이렇게 하면 될 거 같은데.”
“그, 그래……?”
당황하기는 리샤도 마찬가지였다.
이연은 이 세계에서 사용하는 정확한 양궁 용어 같은 건 모른다.
예전의 기억을 떠올리면서 몸이 기억하는 대로 활시위를 당겼을 뿐.
뒤늦게 자리로 돌아온 양궁 담당 트레이너가 이연의 활 쏘는 모습을 본 모양인지 박수를 치면서 다가왔다.
“이연 씨. 혹시 양궁 배우신 적 있으세요? 멀리서 봤는데, 노킹, 훅킹, 셋업, 드로잉까지 완벽하던데요?”
“혹시 이게 노킹인가요?”
이연이 아까처럼 화살 끝을 현에 끼웠다.
그러자 양궁 트레이너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그 자세에서 활 들어 올리고 아까처럼 당겨보세요. 그게 드로잉입니다.”
“그래요?”
이연은 다시 한번 무심한 표정으로 화살을 쏘아 보냈다.
포물선을 그리면서 날아가던 화살 한 발이 방금 전 이연이 맞힌 과녁 한가운데에 정확히 꽂혔다.
두 발 연속 히트.
주변에서 박수가 쏟아졌다.
“이연 씨. 양궁 나오시는 거예요?”
“이번에 이연 씨가 우승할 거 같은데.”
“청팀 큰일났네.”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여기저기서 호들갑이 펼쳐졌다.
이연은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옆에 서 있는 리샤를 가리켰다.
“저 말고 리샤가 대표로 나갈 거예요.”
이연이 사람들의 기대감을 잔뜩 높인 덕분에 괜히 리샤의 부담감만 더욱 커졌다.
뭐든지 잘하는 리더를 두고 있으면 이런 부작용이 간혹 발생한다.
* * *
남녀 릴레이 팀이 다 모이기 전까지 이연은 리샤의 연습 과정을 조용히 지켜봤다.
이연이 너무 독보적으로 잘 쏴서 그렇지, 리샤도 나름 잘하는 편이었다.
서양인에 가까운 이국적인 외모에 머리카락도 긴 금발이어서 그런지 영화에서 보는 엘프를 연상케 했다.
‘실력 좀 높여서 우승까지 하면 이번 기회에 사람들한테 제대로 주목받을 수 있겠네.’
이연은 속으로 이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는 사이, 마침내 이연이 참가하는 남녀 릴레이 계주 팀원들이 모두 모였다.
연습은 가장 선배 격인 은솔과 의찬의 주도하에 이루어졌다.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강의찬이 이은솔과 팀원들에게 물었다.
“청팀 중에서 가장 견제해야 할 거 같은 팀이 어디야?”
인지가 먼저 손을 번쩍 들고서 말했다.
“저는 혜원 선배님하고 미랑 선배님 있는 팀이요.”
혜원과 미랑은 같은 팀을 맺어 남녀 릴레이에 참가하게 되었다.
걸파이트 때에도 못 봤던 진귀한 장면이 아운대에서 펼쳐지게 될 예정이었다.
두 사람 다 워낙 피지컬이 좋은 축에 속하다 보니 아무래도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혜원, 미랑 팀에는 작년 아운대 MVP 팀으로 선정되었던 12인조 보이그룹, 캐리 원 멤버도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벡스도 나름 아운대에선 에이스 그룹으로 손꼽히긴 하지만, 그래도 캐리 원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청팀 A팀의 우세를 점치고 있었다.
그러나 강의찬은 주눅 들지 않았다.
오히려 목소리를 높이면서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강한 의욕을 드러냈다.
“내가 아운대 몇 번 뛰어봐서 알게 된 건데. 영원한 강자는 없더라. 누가 우승할 거 같고 뭐고 이런 거 다 무의미해. 그때 가 봐야 알아.”
이연도 강의찬의 의견에 공감했다.
그래서 스포츠가 재미있는 거다.
강의찬이 허리춤에 한 손을 올리면서 말했다.
“일단 순서부터 한번 정해보고, 거기에 맞춰서 한번 트랙 뛰어보자. 여자부터 시작해서 남자, 다시 여자, 다시 남자. 이런 식으로 순서가 반복되니까 자기 앞 주자, 뒤 주자하고 바통 주고받고 하는 거 꼭 연습하고.”
강의찬이 바통에 관해서 이렇게까지 강조하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로 아운대 릴레이 경기에서 바통을 놓치는 실수가 벌어진 탓에 아쉽게 1위 자리를 놓쳤던 경우가 꽤 있었기 때문이다.
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실수하지 않는 건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다.
가볍게 연습 삼아 트랙을 뛰기 시작하는 팀원들.
먼저 여자 멤버부터 진행되었다.
스타트를 끊은 건 인지였다.
인지는 CDP 내에서도 운동 신경이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멤버다.
각종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서 발군의 피지컬을 보여주기도 했었다.
그래서일까. 팀원들은 인지가 달리기를 잘한다는 사실에 크게 놀라진 않았다.
그러나 앤서는 의외였다.
‘잘 뛰는데?’
다섯 번째 차례를 맡게 된 이연은 저 멀리서 뛰어오는 앤서의 모습을 보면서 놀랐다.
이연만 그런 게 아니었다.
이은솔도, 강의찬도, 그리고 앞서 뛰었던 팀원들도 전부 앤서 쪽으로 시선이 집중되었다.
샤이걸스는 발라드 곡 위주로 활동해서 그런지 ‘운동을 잘한다’라는 이미지가 그렇게 강하진 않았다.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몸 쓰는 걸 거의 못 봤었고 말이다.
기껏 해봤자 안무 있는 무대를 펼칠 때 정도인데. 이것만 가지고 운동 신경이 좋다고 명확하게 구별 짓기가 쉽지 않다.
첫 스타트를 끊었던 인지보다도 훨씬 빠른 속도로 다음 주자에게 바통을 건넨 앤서.
거친 숨을 몰아쉬는 앤서를 향해 팀원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잘했어, 앤서야!”
“선배님, 너무 멋졌습니다!”
의외의 활약상을 보여준 앤서의 모습에 이연도 잘해야겠다는 욕심이 바짝 올라왔다.
앤서 다음 주자를 맡은 강의찬이 이연에게 바통을 건네줬다.
바통을 받은 순간.
이연의 두 발에 힘이 실렸다.
빠른 속도로 질주하는 그녀를 보면서 강의찬은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순식간에 마지막 주자인 이은솔에게 다다른 그녀.
이은솔이 결승점에 통과함으로 인해서 첫 번째 연습이 끝났다.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백팀 A팀이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강의찬이 팀원들의 달리기를 쭉 지켜본 소감을 짧게 압축해 말했다.
“우리가 우승할 수도 있겠어.”
첫 연습부터 자신감이 바짝 붙었다.
* * *
아운대 녹화 당일.
음방 출연 때보다도 더 일찍 기상한 멤버들은 경기장으로 향하기 위해 부지런히 움직였다.
차를 타고 녹화 현장으로 가는 동안, 이연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지면서 오늘의 일정에 대해 떠올렸다.
‘계주는 오후에 다 몰려 있다고 했지.’
하니엘이 참가하는 종목 중에서 유일하게 양궁만 오전 파트로 배정되었다.
이로 인해 리샤는 의도치 않게 오전 내내 멤버들의 응원과 관심을 한 몸에 받을 예정이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는 피곤한 모양인지 안대로 눈을 가린 채 단잠에 빠져 있었다.
리샤만 그런 게 아니었다.
다른 멤버들도 잠깐의 시간 동안 눈을 붙였다.
이연만 멀쩡히 깨어 있었다.
‘오늘 하루 종일 고생하는 날이니까.’
그건 이연도 마찬가지다.
잠시 치워둔 안대를 꺼냈다.
쉴 수 있을 때 쉬어둬야 한다.
이것이 아이돌로서 지켜야 할 철칙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