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제70화. 혼자서도 잘해요(2)
리허설을 위해 무대에 오른 이연의 머릿속에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뭔가 허전하네.’
전생에서는 혼자서 무대에 섰던 경험이 꽤 있었다.
그러나 권이연이라는 여자 아이돌의 삶을 살게 된 이후, 이연은 혼자서 무대를 꾸민 적이 거의 없었다.
SSS 녹화 당시, 유닛 미션을 수행할 때가 유일했다.
그러나 그때에는 은서해와 함께 활동 중인 백댄서들과 같이 무대를 꾸몄기 때문에 사실상 혼자라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넓은 무대 한가운데에 홀로 선 이연은 마이크를 들고 먼저 음향부터 체크했다.
“아아아, 아~!”
음향감독이 오른손으로 동그라미를 만들어 보이면서 문제없음을 나타냈다.
“짧게 1절만 불러보시면 됩니다. 위치 확인하시고요.”
“네, 알겠습니다.”
스태프가 바닥에 붙여놓은 작은 청테이프 위에 올라선 이연.
동시에 반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마이크를 든 이연의 시선이 객석으로 향했다.
리허설 때에는 다른 가수들도 와서 타 가수 팀의 무대를 볼 수 있게끔 허용되어 있었다.
그런 것치고는 뭐랄까.
‘너무 많이 온 거 같은데?’
오늘 녹화 현장에 참여하는 거의 모든 가수 팀들이 다 자리를 채운 듯한 느낌이었다.
이연은 이렇게까지 많은 가수 팀들이 자신의 무대를 보러 올 줄은 몰랐다.
갑작스럽게 마련된 무대이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녀가 여태껏 보여줬던 하니엘의 무대처럼 화려한 퍼포먼스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과 같은 폭발적인 관심들이 이연은 약간 이해가 가질 않았다.
조금 전, 대기실에서 이연을 찾아와 인사했던 후배 그룹인 익스하이 멤버들의 모습도 보였다.
얼굴만 봐서는 응원 도구들을 높게 추켜올린 채 큰 목소리로 호응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그랬다간 리허설에 방해가 될 수 있어서 자중하는 중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이연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첫 소절에 들어가자마자 객석을 지키고 있던 가수 팀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메마른 내 마음에 내린
너라는 이름의 단비.
한 방울, 두 방울.
사랑이 조금씩 스며들어.
안무 없이, 특별한 퍼포먼스 없이.
오롯이 노래 하나만으로 이 넓은 무대와 객석을 채워야 한다.
보기와는 다르게 상당히 힘든 일이다.
민주린처럼 경력이 오래된 가수들도 어려워하는 일이다.
그럼에도 이연은 이 어려운 일을 너무나도 손쉽게 해내고 있었다.
사람의 마음을 따스하게 보듬어주는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가 여기저기 울려 퍼졌다.
그러나 아쉽게도, 리허설에서는 시간 관계상 노래를 완곡으로 들을 수가 없었다.
“네, 좋습니다. 여기까지 들어볼게요.”
스태프의 지시에 따라 이연의 노래가 1절에서 끝났다.
그러자 객석에서 갑자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리허설 무대에서 박수가 나오는 건 오랜만이었다.
그만큼 이연의 노래가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만들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이연은 끝까지 자신의 노래를 들어준 다른 가수 팀들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이면서 고마움을 표현했다.
‘반응이 좋으니까 다행이네.’
이연도 사람이기에 무대에 대한 불안감이 없을 수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리허설 덕분에 큰 용기를 얻었다.
* * *
마침내 본 방송이 시작되었다.
이연은 대기실에 앉아서 모니터를 통해 무대 위의 상황을 지켜봤다.
이 와중에 이연의 스마트폰이 몇 차례 진동했다.
연습실에서 안무 연습 중인 하니엘 멤버들이 홀로 고생하고 있을 이연을 위해 응원의 메시지들을 보내온 거였다.
메시지를 쭉 확인한 이연의 입가에 작은 미소가 절로 그려졌다.
비록 오늘의 무대는 솔로로 설 예정이지만.
멤버들의 응원 덕분인지 혼자라는 생각이 잘 들지 않았다.
같이 대기실에서 모니터를 응시하던 박도수 매니저가 혀를 내두르면서 말했다.
“내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오늘따라 현장에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아?”
“오늘이 100회 특집이잖아요.”
“아, 그랬어? 어쩐지.”
스태프들이 유독 바빠 보이던 이유가 있었다.
오프닝 무대가 끝나고.
미랑을 중심으로 오른쪽, 왼쪽에 각각 두 명의 남자 아이돌 MC가 위치했다.
먼저 미랑이 카메라를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토요일 주말의 현명한 선택! 뮤직 타운! 안녕하세요. 진행을 맡은 미랑!
-세민!
-유연입니다, 반갑습니다!
MC들의 발랄한 자기소개와 함께 객석에서 환호성이 번졌다.
미랑이 새롭게 MC로 합류함으로 인해 뮤직 타운의 시청률이 대폭 상승했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었다.
아이돌계의 슈퍼스타, MAYO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었다.
오늘의 라인업을 소개하던 미랑이 기대치를 높이려는 듯이 목소리 톤을 올렸다.
-오늘, 여러분들이 그토록 기대하시던 스페셜 무대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권이연 씨의 첫 솔로 무대! ‘이슬비’도 준비되어 있으니까 채널 고정!
매번 카리스마 있는 모습만 보여주던 미랑이 저렇게 상큼한 말투로 말하니까 이연은 처음으로 그녀가 귀엽다는 느낌을 받았다.
차례차례로 이어지는 무대들을 보면서 이연은 자신과 경쟁하게 될 팀들을 평가했다.
비시즌이라 할지라도 계속해서 모니터링을 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오늘 처음 보는 그룹들이 꽤나 있었다.
익스하이도 사실 그중 한 팀이었다.
첫 데뷔 무대를 가지는 그녀들을 보면서 이연은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보다 잘하네.’
이연 앞에서 긴장을 많이 하기에, 무대 위에서도 혹여나 실수라도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연이 우려했던 것 이상으로 잘 마무리를 지었다.
노래도, 퍼포먼스도. 다 준수한 편이었다.
그러나 음원 차트 상위권을 노려보기에는 뭐랄까.
‘머릿속에 계속 떠오르게 만들 만한 임팩트가 없네.’
연예계에선 무난하다, 평범하다는 말만큼 박한 평가도 없을 것이다.
기본기만 봐도 그녀들이 얼마나 오랫동안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했는지 알 수 있었지만, 결국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존재가 될지. 이 싸움이 관건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오늘의 익스하이 무대는 아쉬움이 많이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첫술에 배부를 수는 없으니까.’
물론 이연은 배가 부르다 못해 터지기 직전에 다다를 만큼 엄청난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데뷔하긴 했다.
하지만 현실적으로는 모든 신인 걸 그룹들이 다 이연처럼 이런 기회 속에서 데뷔하진 못한다.
열악한 환경에서 출발하는 걸 그룹들이 압도적으로 많다.
그래서 이 업계에서 살아남기가 어려운 것이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
마침내 이연의 차례가 돌아왔다.
MC들이 서로 다른 이야기를 나누면서 무대가 준비될 때까지 시간 끌기에 나섰다.
그사이, 이연은 무대에 올라서서 자신과 카메라들의 위치를 체크했다.
스태프가 사인을 주자, 미랑과 MC들의 소개 멘트와 함께 카메라가 이연 쪽으로 넘어왔다.
“하니엘의 든든한 리더, 권이연의 첫 솔로무대가 준비되어 있다고 하네요. 뮤직…….”
“스타트!”
카메라에 빨간 불이 들어왔다.
여기에 맞춰서 리허설 때처럼 반주가 한발 앞서서 현장을 채웠다.
이연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오자, 방금까지 아이돌들의 댄스곡에 시끌벅적했던 현장은 금세 조용해졌다.
너도나도 제각각 다른 색깔의 빛을 내는 응원봉을 들고서 좌우로 흔들었다.
후렴구에 맞춰서 이연의 뒤에 위치한 커다란 디스플레이 화면이 전환되었다.
노래 제목 그대로, 비가 내리는 듯한 영상이 송출되었다.
소나기처럼 너무 거세게 쏟아지는 것도 아닌, 이슬처럼 슬며시 내리는 비.
무대 위에서 열창하는 이연의 모습과 잘 들어맞았다.
이연이 이끄는 하니엘은 그동안 수준급의 퍼포먼스로 많은 주목을 받았었다.
그래서인지 안무 없이 오직 노래로만 승부를 보는 이연의 모습은 사람들에게 또 다른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원래부터 이연이 노래를 잘 부르는 아이돌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이상으로 그녀의 평가는 수직상승했다.
노래가 모두 끝나고.
리허설 때보다 수백 배 이상으로 큰 박수 소리가 이연을 응원했다.
“감사합니다.”
오늘의 공연 역시 성황리에 끝났다.
* * *
마지막 가수 팀의 차례가 끝나고.
오늘 열심히 무대를 꾸몄던 모든 가수들이 한곳에 모였다.
가운데에 선 미랑과 두 MC가 기운차게 외쳤다.
“1위 후보를 만나보시겠습니다!”
공개된 화면 속 후보들을 보면서 이연은 그럴 줄 알았다는 것처럼 힘 있게 미소를 지었다.
오른쪽에 바로 자신의 모습이 비치고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1위 자리를 두고 경쟁을 펼치게 된 상대 그룹 또한 만만치 않았다.
라스트데이. 최근 인기몰이 중인 7인조 보이 그룹으로, 2집 타이틀곡이었던 ‘Men of men’이 대박을 터뜨리면서 단숨에 대세 보이 그룹 반열에 오른 팀이기도 하다.
쉽지 않은 상대임에는 분명했지만, 그럼에도 이연은 여전히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이런 마음가짐에 보답하듯, 이번 주 1위가 공개되었다.
“뮤직 타운, 1위의 주인공은 바로……!”
“권이연! 축하합니다!”
선후배들의 축하를 받으면서 이연이 무대 가운데로 나왔다.
미랑이 꽃다발을 든 이연을 가볍게 안아줬다.
“이연 씨. 1위하신 소감 부탁드려도 될까요?”
“우선…… 갑자기 성사된 무대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노력해 주신 PD님, 스태프 여러분들, 그리고 오채일 대표님, 저희 회사 관계자분들. 매니저님. 코디님. 전부 감사드립니다. 또 좋은 드라마 만들어주신 윤성준 PD님, 오태현 작가님에게도 이 영광을 돌리고 싶습니다.”
마지막으로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
“그리고 하니유 여러분들, 사랑해요.”
이연이 머리 위로 커다랗게 하트를 만들어 보이자, 자신이 하니유임을 자처하는 하니엘의 팬들은 지금 당장 승천할 거 같은 얼굴이 되었다.
이렇게 이연은 오늘의 무대를 통해서 혼자서도 충분히 잘하는 모습을 보일 수 있음을 증명해 냈다.
물론 아는 사람들은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말이다.
* * *
‘이슬비’ 돌풍은 1주가 지나도, 2주가 지나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덕분에 이연은 방송 이곳저곳에 출연하느라 아침부터 바쁘게 움직여야만 했다.
새벽 1시 반.
잊은 물건을 찾기 위해 잠시 회사를 찾은 이연은 불이 켜진 안무 연습실에 관심을 돌렸다.
설마 하면서 문을 연 순간.
연습실 바닥에 드러누운 채 잠깐 잠에 빠진 멤버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때마침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온 우미가 이연을 보면서 크게 놀랐다.
“깜짝이야…… 난 또. 귀신이라도 나온 줄 알았잖니.”
“미안. 근데 왜 아직까지 연습하고 있어?”
연습 시간은 한참 전에 끝났을 텐데.
그럼에도 멤버들이 왜 여기서 자고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미가 쓴 미소를 지으면서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애들이 너 없는 만큼 우리들이 더 힘내서 연습해야 한다고 해서. 그래서 이 시간까지 여기에 남아 있는 거야.”
“…….”
이연의 시선이 다시 멤버들에게로 향했다.
의자에 등을 기댄 채 새우잠을 청하고 있는 여솜과 시우.
바닥에 대자로 뻗은 채 누운 리샤와 비아.
그리고 책상에 엎드린 자세로 새근새근 잠에 빠진 유키까지.
멤버들을 보고 있자니, 이연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더 열심히 해야겠어.”
우미가 이연의 작은 어깨를 쓰다듬어주면서 말했다.
“지금도 넌 충분히 열심히 하고 있어.”
지금은 비록 혼자서 활동 중이지만, 이연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팀원들이 있음을 절대로 잊지 않기로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