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1화
제70화. 혼자서도 잘해요(1)
한창 미니앨범 타이틀곡을 연습하면서 컴백 준비에 박차를 가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갑자기 이연에게 때아닌 미션 하나가 하달되었다.
오채일 대표가 이연을 따로 불러 미션 내용을 직접 공개했다.
“연아. 물이 제대로 들어온 거 같은데, 보트 엔진에 시동 걸어야지. 안 그래?”
이연이 불렀던 ‘시들지 않는 너’ 삽입곡이 제대로 터진 여파로 인해 여기저기서 섭외 요청이 마구 들어오고 있었다.
드라마 제작진 쪽에서도 이연이 OST곡으로 방송 활동을 어느 정도 해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이연이 여기저기에서 자주 얼굴을 비치면, 그만큼 드라마에 대한 홍보도 대대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드라마든 영화든. 마케팅의 중요성은 수백 번을 언급해도 부족하지 않다.
이연도 물론 잘 안다.
단지.
“설마 이 타이밍에 노래가 터질 줄은 몰랐어요.”
오채일 대표도 허허 웃으면서 이연과 같은 생각을 드러냈다.
“나도 그래.”
삽입곡이 처음 공개되었을 당시에는 지금처럼 큰 호응은 없었다.
그러나 드라마가 회차가 거듭될수록 이연이 부른 삽입곡 ‘이슬비’도 덩달아 재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가요 프로그램에서도 이연이 나와서 ‘이슬비’를 불러줬으면 좋겠다는 요청이 쇄도했다.
덩달아 바빠진 건 박도수 매니저였다.
오늘 아침에도 그는 전화기와 씨름하느라 본인 업무도 제대로 소화하지 못했다.
홍류현 실장을 포함해서 A&R, 마케터, 디렉터 등등. 회사 전체가 바빠졌다.
이연도 미니앨범에 집중해야 하니까 이번에는 보트에 시동 걸지 않겠다고 말할 생각은 없었다.
“해야죠. 드라마도 보니까 시청률 잘 나온다면서요?”
“대박이더라. 공중파도 아니고. 케이블 드라마가 시작부터 시청률 20퍼센트대 나오는 거 오랜만에 봤어.”
윤성준 PD라는 네임밸류가 지닌 영향력. 여기에 드라마의 재미와 감동까지 더해지니, 회차를 거듭해 갈수록 시청률이 상승곡선을 그리는 건 당연한 결과였다.
잠시나마 솔로로 활동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이연을 향해서 오채일 대표는 머릿속에 정리해 둔 계획을 나열했다.
“우선은 가요 프로그램들부터 한번 쫙 순회공연 다니고. 예능하고 라디오도 차츰차츰 일정 잡아보도록 하자. 어때?”
“네, 알겠습니다.”
한창 준비 중인 미니앨범 무대는 거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세부적인 디테일만 잡고 연습하기만 하면 되기에 솔로 활동이 큰 지장을 줄 것 같진 않았다.
오채일 대표가 쓴 미소를 지으면서 다른 이야깃거리를 꺼넸다.
“사실 걸 그룹뿐만 아니라 세상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들이 그런데, 잘나가는 멤버가 있으면 활동이 뜸한 멤버도 있고 그러거든. 물론 하니엘 애들이 너만 솔로 활동 시작한다고 질투하고 그럴 성격들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혹시 불안하면 내가 대신해서 애들한테 말해둘까? 이러이러해서 이연이가 어쩔 수 없이 솔로로 나서게 되었다고.”
“아니요.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 같아요, 대표님.”
확신에 가득 찬 그녀의 목소리에 역으로 오채일 대표가 당황했다.
“왜. 네가 벌써 애들한테 말했어?”
“그전에 저 음원 차트에서 1위했다는 거 보자마자 오히려 저한테 솔로 무대라도 준비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먼저 재촉하더라고요.”
멤버들은 이연의 1위 소식을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따지고 보면 이연이 솔로로 나가서 잘되는 게 장기적으로 봤을 때에는 하니엘에게도 도움이 될 수밖에 없다.
이연이 하니엘의 리더이자 중심축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이연의 작은 어깨에는 드라마뿐만 아니라 그룹 홍보라는 중책도 같이 놓여 있었다.
“나간 김에 음방까지 1위 찍고 와야죠.”
이연의 눈빛에 오랜만에 승부욕이라는 이름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 * *
이연이 불렀던 ‘이슬비’는 안무를 따로 짤 필요가 없는 발라드 장르다.
그렇기에 내일 당장 무대에 선다고 해도 크게 문제가 될 건 없었다.
농담식으로 박도수 매니저에게 그렇게 말을 하긴 했지만.
“정말로 하루 만에 바로 방송 무대 준비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이연의 목소리에 살짝 원망이 깃들어 있었다.
일부러 운전에 집중하는 척 앞만 보는 박도수 매니저가 몇 차례 헛기침을 흘렸다.
이들과 같은 차를 타게 된 최공예 코디가 작게 웃었다.
“마침 무대 자리 하나 빈다고 해서. 도수 오빠하고 홍 실장님이 거기에 너를 딱 꽂아 넣은 거야.”
자리가 비게 되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이연의 머릿속에 오늘 아침에 봤던 기사 제목 하나가 스쳤다.
인기 보이 그룹의 멤버, 황 모씨. 뺑소니 혐의로 입건.
“아침에 나왔던 그 뺑소니 기사 때문이죠?”
“어…… 뭐. 그, 그렇지.”
좋은 이야깃거리는 아니었기에 최공예 코디는 살짝 말을 얼버무렸다.
이연은 그 황 모씨라는 사람의 정체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속한 보이 그룹도 전부 다.
꽤나 인기 있는 그룹이었는데. 갑자기 사회적 물의로 인해 일정이 펑크되어 버렸으니 음방 PD 입장에서는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을 것이다.
때마침 이때, 구원투수로 이연이 마운드에 오르게 되었다.
박도수 매니저가 당시 PD와 나눴던 통화 내용을 떠올리면서 말했다.
“PD님이 나한테 고맙다는 말을 몇 번이나 하셨는지 기억이 안 날 정도였다니까. 아무튼 제작진 모두가 너한테 고마워하고 있으니까 최대한 잘 챙겨주려고 할 거야.”
“좋은 소식이네요, 그거.”
안 그래도 하루 만에 바로 무대에 오르는 신세가 되어서 신경 쓰이는 부분이 적지 않았는데.
제작진이 전폭적으로 이연을 두둔하고 나서겠다고 하니까 마음까지 든든해졌다.
무대에 서는 타이밍도 좋고.
음원 순위도 1위로 등극하고.
‘이 정도면 하늘이 나보고 솔로 활동 한번 해보라고 밀어주는 느낌인데?’
이것도 나쁘지 않다.
* * *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연은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휩싸였다.
평소라면 일곱 명의 멤버들이 동시에 썼던 이 넓은 대기실을 오롯이 이연 혼자서 쓰게 되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휑하면서 약간은 썰렁한 느낌마저 들고 있었다.
무대의상으로 갈아입고 본격적으로 노래 연습에 돌입하려고 하던 찰나였다.
똑똑 소리와 함께 대기실의 문이 열렸다.
미랑이 이연의 대기실을 찾아왔다.
“연아!”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연은 이곳에서 미랑과 마주쳐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는 식으로 침착한 반응을 보였다.
이연이 오늘 출연하기로 한 음방 MC를 맡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이 바로 미랑이었기 때문이다.
“준비할 시간도 없었겠다, 얘.”
“괜찮아요. 가수는 언제, 어느 때라도 무대 위에 올라가서 노래할 준비가 항상 되어 있어야 하니까요.”
촌철살인과도 같은 이연의 말에 미랑은 감탄을 흘렸다.
“오늘도 후배한테 한 방 먹었네. 하여간 방심할 수가 없다니까, 정말.”
두 선후배는 그렇게 서로를 바라보면서 마주 웃었다.
안 그래도 이연은 15분 전, 미랑에게 인사하기 위해서 그녀가 머물고 있는 대기실을 한번 찾아간 적이 있었다.
음방 프로그램에 출연하면, 후배들이 선배 가수들의 대기실을 찾아 일일이 인사하는 무언의 관습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에 미랑은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잠시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그래서 시간을 좀 더 둔 뒤에 다시 미랑을 찾아가려고 했었는데.
그녀가 이렇게 직접 이연을 찾아온 덕분에 목적을 실현할 수 있었다.
미랑과 이번 OST곡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였다.
또다시 대기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네, 들어오세요.”
이연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문이 열렸다.
무대의상을 갖춰 입은 열한 명의 젊은 여성 아이돌들이 이연과 미랑을 마주 보는 형태로 일렬로 나란히 섰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이번에 새로 데뷔하게 된 익스하이라고 합니다!”
“오, 오늘 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마지막에 말하는 멤버는 긴장을 많이 한 모양인지 말을 심하게 더듬는 모습을 보였다.
이연이 선배들에게 인사를 하러 짧은 투어를 다녔던 것처럼, 그녀들 역시 같은 행보를 반복 중이었다.
미랑이 의미심장한 시선으로 이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대선배 다 됐네, 우리 연이.”
“선배님만큼은 아니지만요.”
하니엘에게 있어서 MAYO는 경력으로 따지면 넘을 수 없는 선배 중에 한 팀이기도 하다.
이연에게만 인사하러 왔다가 졸지에 미랑까지 마주하게 되니, 익스하이 멤버들은 더욱 긴장했다.
신인 걸 그룹들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함인지 이연은 최대한 밝은 표정을 유지하면서 먼저 후배들에게 다가갔다.
“저야말로 오늘 잘 부탁드려요.”
이연의 말에 후배들의 눈빛이 반짝였다.
열한 명의 익스하이 멤버들 중에서 유독 이연의 시선을 빼앗는 여성이 있었다.
방금 전, 자기소개를 할 때 심할 정도로 말을 많이 더듬었던 단발의 멤버가 특히나 더 긴장했다.
미랑이 작게 웃으면서 농담을 꺼냈다.
“저 후배님은 연이, 너를 많이 무서워하나 보다.”
그러자 단발의 멤버가 격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그게 아니라요…….”
당황하는 여성을 대신해서 다른 멤버들이 왜 이런 태도를 계속 보이는지 설명해 줬다.
“진아가 권이연 선배님 광팬이거든요.”
“맞아요. SSS 출연하실 때부터 좋아했었어요.”
“맨날 권이연 선배님 나오는 무대 모니터링하고 연습하고 그랬어요. 오늘 이연 선배님 만날 수 있다고 하니까 아침부터 얼마나 꽃단장을 했는지 모르실 거예요.”
존경하고 좋아하는 선배 앞에서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욕망이 외형을 통해 그대로 표출되었다.
진아라고 불린 여성에게 있어서 오늘 이 순간은 일하면서 동시에 덕질도 할 수 있는 최고의 환경이었다.
소위 성공한 덕후, 줄여서 성덕이 된 그녀를 향해 이연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좋게 봐주셔서 고마워요.”
“하, 항상 응원하고 있어요, 선배님……!”
“저도요. 진아 씨라고 했죠? 잘되기를 응원할게요.”
미랑은 이연의 이런 반응이 약간 무뚝뚝하게 느껴졌던 모양인지 한 발 더 나아가서 이런 말을 꺼냈다.
“팬이라는데. 같이 사진이라도 한 장 찍는 건 어때?”
“여기서요?”
“지금 이 순간, 이 기억은 시간이 지나면 과거가 되어버리잖아. 그러니까 사진으로라도 남기는 게 좋지.”
미랑의 말에 묘한 설득력을 느낀 이연은 ‘그럴까요?’라고 말하며 진아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진아가 뭐라고 대답할지, 이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가 다 알고 있었다.
“네! 부디!”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이연과 진아가 나란히 섰다.
사진은 진아와 같은 그룹의 멤버가 찍기로 했다.
하나 둘 셋 신호에 맞춰서 찰칵! 하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선배님, 저도 찍어주세요!”
“저도요!”
한 명이 끝나니까 여러 명한테서 동시에 사진 찍어달라는 요청이 날아들었다.
여기에 추가로 참전 의사를 밝힌 인물이 있었다.
“나도!”
미랑이 손을 번쩍 들면서 자기도 이연하고 같이 사진 찍고 싶다고 어필하기 시작했다.
아직 방송이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이연의 대기실은 벌써부터 북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