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9화
제69화. beyond(2)
이연에게 갑작스러운 숙제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오히려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듯이 쭉 작업을 이어나갔다.
곡의 뼈대가 될 멜로디를 구상하고.
여기에 차곡차곡 살을 채워 넣기 시작했다.
숙소 내에는 작곡에 필요한 장비들이 온전히 갖춰져 있지 않았다.
이연이 가지고 있는 거라곤 사양 낮은 노트북하고 스마트폰, 그리고 태블릿 PC. 이게 전부였다.
그래서 집에서는 아주 간단한 것들만 진행하고.
본격적인 작업은 회사에 출근해서 진세혁 프로듀서와 같이 이어나가기로 했다.
이연이 샘플로 만들어온 멜로디 몇 가지를 접한 진세혁 프로듀서의 입에서 감탄이 연달아 새어 나왔다.
“좋네. 귀에 쏙쏙 박히고.”
후크송 못지않은 중독성을 지닌 멜로디들 앞에서 진세혁 프로듀서는 재능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작곡은 언제부터 배운 거야?”
전생에서부터요.
이런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이연은 가볍게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침착하게 핑곗거리를 둘러댔다.
“가수가 되겠다고 마음먹은 시점부터 작곡도 차츰 배우기 시작했어요.”
“독학이라고 했지?”
“네.”
언제 들어도 이연의 대답은 놀랍다.
독학이라고 보기에는 기대 이상의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본인이 그렇다는데, 제3자인 진세혁 프로듀서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려니 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연이 진세혁 프로듀서에게 의견을 구했다.
“프로듀서님은 어느 게 마음에 드시나요?”
이연이 준비한 다섯 개의 샘플 멜로디 중에서 좀 더 귀에 잘 들어오는 걸 찾아내야 했다.
진세혁 프로듀서의 선택은.
“난 세 번째하고 네 번째 멜로디가 괜찮게 들리던데.”
마침 이연이 가장 자신 있어 했었던 결과물들을 정확히 지목했다.
“그럼 두 곡 중 어느 걸로 갈지는 오늘 내로 정해서 알려드릴게요.”
“아니. 굳이 꼭 정할 필요가 있어?”
진세혁 프로듀서의 주장에 이연은 무슨 소리냐는 식으로 갸우뚱했다.
“내 말은. 둘 다 좋은데, 하나만 앨범에 넣을 필요가 있겠냐는 거지. 그냥 두 개 같이 넣으면 되잖아.”
“한 곡은 프로듀서님이 하시기로 하지 않았나요?”
아무리 미니앨범이라 할지라도 이연 한 명에게 모든 짐을 떠맡기는 건 좀 그랬다.
게다가 이연은 작곡, 작사뿐만 아니라 레코딩, 안무 연습, 방송 준비 등. 해야 할 게 많다.
그래서 딱 한 곡만 맡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연이 준비해 온 결과물들을 접하고 난 뒤.
진세혁 프로듀서의 이런 생각은 완전히 달라졌다.
“원래는 그렇게 하려고 했는데.”
그가 쓴 미소를 지으면서 솔직한 심정을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작업해도 네가 해온 것 이상으로 곡을 잘 뽑아낼 자신이 없어.”
메인 프로듀서가 담당하고 있는 아이돌 앞에서 이런 말을 하기가 결코 쉽지 않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는 것만큼 많은 용기를 필요로 하는 일도 드물다.
그렇기에 이연은 있는 그대로 말해주는 진세혁 프로듀서를 오히려 더 높게 평가하고 싶었다.
“그러면 두 곡으로 준비해 볼게요.”
“그래. 도움이 필요하면 내 번호로 언제든 연락하고. 밤늦었다고 눈치 볼 거 없으니까. 알았지?”
“잠은 안 주무세요?”
“원래 잠은 죽어서 자는 거라고 하더라.”
진세혁 프로듀서는 그냥 웃자고 해본 말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입장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수면은 건강에 많은 영향을 끼칩니다. 나이대별로 달라지긴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하루에 7시간에서 9시간 정도 수면 시간을 유지하는 게 가장 좋아요. 수면 부족은 신체, 정신에 많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구구절절 이어지는 이연의 설명에 진세혁 프로듀서는 뒤늦게 깨달았다.
항상 매사에 진지한 이연을 상대로 자신이 크나큰 잘못을 저질러 버렸다고.
* * *
하니엘이 세 번째로 발표하게 될 미니앨범의 가이드곡 작업까지 모두 마친 이연은 녹음실에서 다른 멤버들을 기다렸다.
멤버들의 얼굴에는 설렘과 기대가 가득 담겨 있었다.
그녀들의 모습에 진세혁 프로듀서가 이해가 잘 안 간다는 어투로 물었다.
“혹시 너희, 연이가 만든 노래 한 번도 안 들어봤어?”
자주 들어봤으면 이렇게까지 크게 기대하는 반응이 나올 리가 없는데.
멤버들은 동시에 그렇다고 답하면서 이연의 만행(?)에 대해 실토했다.
“곡 작업하고 있는 거, 저희한테도 들려줄 수 있냐고 했었는데 죽어도 안 된대요.”
“맞아요. 멜로디조차 못 들어봤어요.”
“요즘은 저희가 몰래 방에 못 들어오게 방문도 잠그고 다닌다니까요?”
멤버들의 원성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이에 대해 이연은 짧은 말로 해명했다.
“보안은 철저해야 하니까.”
진세혁 프로듀서는 이런 이연을 보면서 ‘독하다, 독해’라는 말을 흘릴 뻔했다.
그래도 틀린 말은 아니었기에 마냥 이연 탓만 할 수는 없었다.
곡에 관련된 사전 정보는 절대로 밖으로 새어 나가선 안 되기 때문이다.
물론 하니엘 멤버들이 곡 좀 들었다고 다른 곳에 여기저기 떠들고 다닐 타입들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연은 가이드곡이 나오기 전까지 보안을 유지하는 쪽으로 행동했다.
진세혁 프로듀서가 혹시 몰라서 가이드곡을 재생하기 전에 이연에게 허락을 구했다.
“노래, 틀어도 돼?”
“네.”
작곡가의 허락을 맡고 나서야 진세혁 프로듀서는 멤버들이 부를 타이틀곡, ‘beyond’를 들려주게 되었다.
제목 그대로 나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 나은 내가 된다는 식의 가사로 꾸며진 곡이었다.
이미 그녀들은 SSS와 걸파이트 시즌 2 프로그램을 통해서 그때마다 한계를 뛰어넘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어제보다 더 나은 오늘의 내가 되겠다는 의지를 팬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그래서 이연은 이런 곡을 만들었다.
가이드곡을 한 차례 다 듣고 난 뒤, 가장 먼저 여솜이 이연에게 참았던 궁금증을 꺼냈다.
“가이드곡 부른 거, 연이 너 맞지?”
“응. 맞아.”
본인이 직접 작곡하고 작사까지 다 해서 그런지, 가이드곡도 이연이 부르고 싶었다.
익숙한 목소리 덕분에 노래를 듣는 동안에는 상당히 편하고 좋았는데.
걱정이 하나 있었다.
“음이 더 높아진 거 같은데.”
리샤의 말대로였다.
지금까지 불렀던 곡 중에서 음역대로 따지면 beyond가 단연 탑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이드곡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걱정부터 앞섰다.
이걸 과연 이들이 잘 소화해 낼 수 있을지 어떨지에 관해서였다.
이에 이연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노력하면 다 돼. 우리, 가수잖아.”
짧고 강렬한 말에 멤버들은 함부로 태클을 걸 수 없었다.
이연이 틀린 말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따지고 보면, 높은음들은 대부분 메인보컬 파트에 몰려 있었다.
나머지 서브보컬 파트들은 걱정했던 것만큼 높은 음역대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연은 충분히 할 수 있다고 보는 중이었다.
대신에 멤버들은 이런 생각이 들었다.
이번 미니앨범 준비도 많이 빡셀 거 같다고.
* * *
곡이 나왔으니까.
이제 파트 분배를 하고, 여기에 걸맞은 안무를 짜야 한다.
욕심 같으면 이연이 안무도 한번 짜볼까 생각도 했었지만.
한 곡만 작업하면 될 줄 알았던 계획이 틀어져 버린 탓에 어쩔 수 없이 안무는 은서해와 퍼플피플 크루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녀들의 안무 창작 능력은 이연도 인정하고 있었기에 큰 걱정은 없었다.
그리고 시간적인 여유가 생긴 만큼, 이연은 곡 작업에 더 집중할 수 있으니까.
레코딩을 위해 가장 먼저 우미가 부스 안으로 들어섰다.
이연이 마이크를 켜고서 부스 안에 있는 우미에게 오늘의 목 상태를 물었다.
“언니. 목 컨디션은 어때? 어제저녁에 보니까 기침 많이 하던데.”
“괜찮아. 그때는 목이 약간 건조해서 그랬던 거니까. 너무 걱정 안 해도 돼.”
다행히도 감기나 이런 건 아니었다.
노래가 흘러나오자마자 우미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로 곡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룹 내에선 이연이 리더지만, 최연장자는 여전히 우미다.
맏언니로서 동생들에게 언제나 믿음직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생각을 늘 품고 있어서일까. 첫 스타트를 자처한 우미는 이연이 기대했던 것 이상의 역량을 보이며 순탄하게 레코딩을 이어갔다.
이연과 진세혁 프로듀서가 약간의 디테일만 잡아줘도 충분할 만큼 잘했다.
“다음, 리샤.”
“넵!”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우미와 바통 터치를 한 리샤가 순식간에 물통을 반이나 비워 버렸다.
이연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거, 네 배 채우라고 가져다 놓은 거 아니야.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목 축이는 용도로만 사용해.”
안 그래도 긴장 많이 하고 있는데. 물로 배를 채우면 속도 안 좋아진다.
고개를 한 차례 크게 끄덕인 리샤가 헤드셋을 착용하고 한숨을 깊게 내쉬었다.
행동 하나하나에서 긴장하고 있음이 나타났다.
비아는 리샤가 저렇게 긴장하는 모습을 난생처음 봤다.
“걸파이트 결승 무대 때에도 저 정도로 떨진 않았던 거 같은데.”
이연은 리샤가 긴장하는 이유를 파트 분배 때문으로 보고 있었다.
파트를 나누는 과정에서 약간의 트러블이라고 해야 할까. 비슷한 상황이 몇 개 있었다.
리샤가 이번에 맡은 파트는 메인보컬 다음으로 높은 음역대가 요구된다.
이에 대해 리샤는 많은 부담감을 토로했다.
자신이 없어서였다.
그럼에도 이연은 리샤를 적극적으로 추천했다.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보컬을 소화하려면, 기본적으로 체력이 받쳐줘야 한다.
체력으로 따지면 이연과 리샤가 투톱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리샤가 노래를 못 부르는 편도 아니고.
시도해보지 않았을 뿐, 리샤도 충분히 메인보컬급 능력은 된다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본인은 아직 준비가 덜 된 모양인지, 레코딩을 진행하는 와중에도 바짝 긴장한 모습을 보였다.
목소리도 잘 나오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연은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프로듀서님. 레코딩 순서 바꿀 수 있을까요?”
“리샤를 나중으로 미루려고?”
“네. 지금 노래 불러보라고 해봤자 제 실력이 안 나올 거 같아서요.”
진세혁 프로듀서도 같은 생각이었다.
“그러자. 그러면 다음은 누구로 하게?”
이연이 뒤를 돌아보자, 먼저 녹음을 마친 우미를 제외한 멤버들은 마치 저승사자라도 본 것처럼 리더의 시선을 회피했다.
이연은 그녀들의 반응을 보면서 어이가 없다는 얼굴로 웃었다.
“너희 잡아먹으려고 그러는 거 아니니까 긴장 풀어.”
고민 끝에 이연이 선택한 인물은.
“여솜아. 준비됐지?”
“나, 나?”
“응, 너.”
“…….”
여솜이 맡은 파트도 리샤와 동일한 난이도를 자랑했다.
어차피 레코딩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알았어, 할게.”
먼저 매를 맞을 기회가 왔을 때, 일찌감치 맞는 게 나을 수도 있다.
부스 안으로 들어간 여솜이 ‘아아아’ 소리를 내면서 목을 풀기 시작했다.
이연은 여솜의 긴장감을 풀어주기 위해 다시 마이크를 잡았다.
“너무 긴장하지 말고. 네가 잘하는 모습 보여줘야 다음 멤버들도 힘내서 열심히 할 수 있으니까. 알았지?”
“으, 응. 최선을 다해볼게.”
뒤에서 비아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말이 여솜 언니한테 더 부담 주는 거 같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