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제68화. 새로운 도전(5)
이연은 ‘기사 웬리’에서 남자 주인공이기도 한 웬리 역할을 맡는 동안, 결말에 대한 아쉬움을 늘 품고 있었다.
기왕이면 둘이 행복하게 잘 사는 결말로 이어진다면 좋을 텐데.
아니, 하다못해 둘의 사랑이 잠시나마 맺어질 수 있는 장면이라도 나왔더라면. 아주 조금이나마 미련을 지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무대를 지켜본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이연은 당시 무대 감독에게 이러이러한 장면들을 추가하면 어떻겠냐 하고 주장했지만.
‘그때는 씨알도 안 먹혔지.’
하지만 윤성준 PD는 달랐다.
그는 캐릭터에 몰입하는 배우들의 의견에 최대한 귀를 기울이려고 하는 성향을 지녔다.
그래서 이연이 가볍게 던진 키스신 연출 아이디어에도 깊은 관심을 보였다.
이연은 자신의 양쪽 검지와 중지를 이용해서 카메라처럼 직사각형을 만들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앵글까지 설명해 줬다.
“홍이분하고 황지석, 두 사람의 발만 비추고. 여기서 이분이가 발끝을 드는 모습만 보여주면 될 거 같아요.”
작중에서 홍이분과 황지석의 키 차이는 제법 나는 편이다.
황지석은 183㎝. 홍이분은 163㎝.
20㎝가 차이가 나기 때문에 키스를 하려면 홍이분이 발끝을 들어 올려야 최대한 높이를 맞출 수 있다.
발이 움직이는 모습만 보여줌으로 인해 시청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게끔 만들어준다.
가끔은 직접적으로 장면을 보여주는 것보다 간접적인 연출이 사람들의 마음을 더 두근거리게 만들 때가 있다.
특히나 로맨스 장르의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윤성준 PD가 카메라 감독에게 의견을 구했다.
“황 감독. 어떨 거 같아?”
“괜찮아 보이는데요? 저희가 해본 적 없는 연출이긴 한데. 크게 어려운 건 아니니까요.”
“그럼 황 감독이 한번 카메라 위치 조정해 봐. 나도 모니터링하면서 피드백 줄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연 씨 말대로 장면 추가할 테니까 태현이는 대사 추가하고. 얼마나 걸릴 거 같아?”
오태현 작가가 여유로워 보이는 미소로 화답했다.
“금방이야.”
“오케이. 끝나면 수정된 거 배우들한테도 알려주고. 이연 씨하고 은솔 씨는…… 촬영 좀 딜레이될 거 같은데. 괜찮으시죠?”
이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의견을 제시한 사람은 다름 아닌 그녀 본인이었으니까.
이은솔도 이연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예. 어차피 오늘 이거 말고 다른 일정은 없으니까요. 천천히 하셔도 됩니다.”
“양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방향이 정해졌으니.
이제 다시 부지런히 움직일 시간이다.
* * *
오태현 작가의 말대로, 대사 추가와 수정은 금방 진행되었다.
새로운 대본으로 리딩을 진행하던 이연과 이은솔을 향해서 황 감독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두 분, 조금만 더 거리 좁혀보실래요?”
“이렇게요?”
이연이 먼저 이은솔이 서 있는 곳을 향해 반걸음 앞으로 움직였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이은솔의 넓은 어깨가 크게 움찔했지만, 이연은 신경 쓰지 않았다.
카메라를 주시하던 황 감독이 오른손으로 동그라미 사인을 보냈다.
“네, 좋습니다! 본 촬영 때에도 지금 이 거리감만 유지하시면 됩니다.”
이연이 허리를 숙이면서 근처에 굴러다니는 작은 돌멩이 하나를 집어 들고, 그것을 방금 자신이 서 있던 발 위치에 올려놓았다.
이연만 알아볼 수 있는 나름의 표기 방법이었다.
잠시 후.
“촬영 들어가겠습니다.”
슬레이트 신호와 함께 카메라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까처럼 대사를 읊은 뒤.
“선배님!”
이연이 크게 외치면서 이은솔의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타닷, 타닷.
다급함과 미련이 느껴지는 종종걸음으로 순식간에 이은솔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연.
뮤직비디오 촬영 당시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조성된 적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고 나니 설렘의 크기도 더욱 커졌다.
“저, 선배님 좋아해요. 선배님도 제 마음 아시잖아요.”
홍이분의 고백에 황지석은 망설인다.
이들의 사랑이 훗날 홍이분의 인생을 어떻게 뒤흔들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너무나도 사랑하는 여자지만.
그 여자를 생각해서 자신의 사랑을 포기해야 하는 한 남자의 갈등이 이은솔의 눈빛과 표정을 통해 그대로 드러났다.
“이분아. 우리…….”
이은솔이 말을 이으려고 하던 때에, 이연이 먼저 행동에 나섰다.
타이밍에 맞춰서 카메라가 두 사람의 발밑으로 향했다.
크게 들리는 이연의 발끝에 포커싱을 맞췄다.
두 사람의 연기를 숨죽여 지켜보던 윤성준 PD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대로 촬영 계속 진행하라는 신호였다.
다시 카메라가 두 사람의 얼굴을 담아냈다.
잔뜩 상기된 이은솔과 이연의 얼굴.
이연은 ‘기사 웬리’를 짝사랑했던 귀족 가문의 여인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자 그녀의 눈시울에서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르 흘러내렸다.
대본에는 우는 연기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연기에 너무 몰입한 탓에 나오는 자연스러운 행동이었다.
윤성준 PD와 스태프들 역시 두 사람의 안타까운 이별 장면에 푹 빠져들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이은솔이었다.
“행복해야 해, 이분아. 알았지?”
이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팔을 뻗어 그녀를 살포시 안아준 뒤.
이은솔은 다시 가려던 걸음을 억지로 재촉했다.
사랑하는 이를 놔두고 떠나야 하는 남자의 심경.
그리고 그런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여자의 마음.
이 애절함을 끝으로, 오늘의 모든 촬영이 종료되었다.
* * *
윤성준 PD의 오케이 선언과 함께 이은솔이 이연에게 다가갔다.
“고생했어, 연아.”
“선배님도요.”
이연의 눈가 끝에 아직 눈물이 맺혀 있었다.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는 건 굉장히 낯설었다.
이은솔이 손을 뻗어 여전히 이연의 얼굴에 남아 있는 감정의 잔재를 직접 닦아줬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천만에. 그나저나 울 줄은 몰랐어.”
“제가 너무 연기에 몰입했나 봐요. 죄송해요.”
“죄송할 것까지야.”
이은솔이 직접 이연의 눈물이 마르도록 손으로 부채질을 하며 바람을 불어 넣어줬다.
이 와중에 윤성준 PD가 두 사람을 대견하게 바라봤다.
“두 분 다 너무 잘하셨습니다. 누가 보면 정말로 사귀는 사이인 줄 알겠어요.”
이은솔의 입에서 어색한 웃음소리가 한차례 흘러나왔다.
스태프가 건네준 휴지로 눈물을 다 닦아낸 이연은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온 채로 물었다.
“PD님. 모니터링 아직 안 하셨죠?”
“네. 같이 보실 거죠?”
이연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이 여러 차례 고개를 끄덕였다.
배우들과 함께 옹기종기 모여 방금 촬영한 장면을 모니터로 직접 확인했다.
이연의 눈물 연기는 다시 봐도 백미였다.
오태현 작가가 모니터링 중간에 감탄사를 흘렸다.
“이연 씨, 연기 진짜 잘하시네요.”
이연은 자신이 ‘기사 웬리’를 연기할 때 시절의 기억 때문에 너무 과몰입해서 연기한 건 아닐까 걱정했었는데. 오히려 이 부분이 호평을 받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본인이 모니터링을 해봐도 잘 나왔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하는 여인, 홍이분의 감정을 너무나도 디테일하게 잡아냈다.
카메라워킹도 괜찮았다.
여기에 배경음이 들어가고. 약간의 효과만 추가로 첨가되면 지금보다 더 나은 장면으로 바뀔 것이다.
윤성준 PD가 재차 두 배우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건넸다.
“시간이 많이 늦었고. 피곤해서 감정 잡기가 쉽지 않았을 텐데. 잘하셨습니다. 만약에 다음에도 기회가 된다면, 이연 씨하고 은솔 씨랑 같이 또 작품 만들어보고 싶네요. 이번에는 두 사람을 주연으로 해서.”
은근슬쩍 차기작에 대한 떡밥을 깔아뒀다.
혹시 같이 할 의향이 있냐고 묻자, 이은솔이 먼저 입을 열었다.
“불러만 주신다면, 언제든 달려가겠습니다.”
“이연 씨는요?”
“저도요.”
무엇보다도 현장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이런 제작진이라면, 윤 PD의 말대로 한번 각 잡고 제대로 연기해 보고 싶다는 욕심이 안 들 수가 없었다.
이연의 아이디어도 무시하지 않고 귀담아들어 주기도 하고.
‘이런 기획자는 쉽게 찾아볼 수 없으니까.’
역시 성공하는 사람은 다 그만의 이유가 있었다.
* * *
촬영이 끝났다고 드라마 관련 작업까지 모두 다 마무리된 건 아니었다.
아직 이연에게는 OST 작업이 남았다.
부스 안으로 들어간 이연은 헤드셋을 착용한 채로 목을 가다듬었다.
감독의 신호에 따라 감미로운 발라드 반주가 흘러나왔다.
이에 맞춰서 이연은 천천히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떠날 때가 왔을 때 알게 되었어.
당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그대를 품은 꽃이 될게.
영원히 시들지 않도록.
약속할게.
이연은 마지막 촬영 당시의 기억과 감정을 떠올렸다.
가사를 풀어내는 그녀의 목소리에 짙은 호소력까지 더해지자, 몇몇 스태프들은 조용히 눈물을 훔쳤다.
B파트 녹음을 먼저 끝낸 이연이 부스 밖에 있는 음악감독에게 감평을 구했다.
“어땠나요, 감독님?”
“굉장히 좋았습니다.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요. 지금 그 감정선 그대로 이어가셔도 될 거 같네요.”
“네, 알겠습니다.”
이연이 생각했던 것과 음악감독이 바라던 것이 딱 일치한 덕분일까.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른 시간 내에 녹음이 모두 완료되었다.
“고생하셨습니다, 이연 씨.”
음악감독과 스태프들의 환대를 받으면서 이연은 마침내 부스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믹싱해서 이연 씨한테 보내 드리겠습니다.”
“네. 잘 부탁드릴게요, 감독님.”
이로서 이연이 드라마 내에서 맡았던 모든 역할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드라마가 잘 나오기를 기다리는 일뿐이네.’
시간이 알아서 잘 해결해 줄 것이다.
* * *
드라마 관련 일을 마무리 지은 이연은 다시 본업으로 돌아와 하니엘의 새로운 앨범 작업을 위한 준비에 돌입했다.
정규 앨범이 아닌 미니 앨범으로 기획을 잡았기 때문에 비교적 빠른 속도로 작업을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지만.
“콘셉트가 문제네.”
회의에 참가한 진세혁 프로듀서의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늘 그렇듯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게 가장 어려운 일이다.
그렇다고 앞선 두 앨범과 비슷한 콘셉트로 가기에는 너무 식상하고.
뭔가 괜찮은 게 없을까.
이때, 비아가 조심스럽게 자신의 의견을 꺼냈다.
“댄스 팝 어때요? 걸파이트 때, 저희가 댄스 팝 노래 가져왔을 때마다 성적이 좋게 나왔잖아요. 다음 앨범 때 내심 그런 풍의 노래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팬들도 많은 거 같고.”
걸파이트에서 힌트를 얻은 아이디어임을 강조했다.
원래 이런 회의가 있으면, 비아와 리샤는 늘 쥐 죽은 듯이 앉아 있게 마련이었는데.
오늘따라 적극적으로 의견을 제시하니까, 멤버들 입장에선 비아가 달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더 나아가서.
“괜찮은데?”
이연이 비아의 주장을 지지하기까지 했다.
막내 기를 살려주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로 좋은 아이디어여서 손을 들어준 거였다.
“다른 사람들은 어때요?”
“연이가 괜찮다면, 무조건 오케이야.”
“나도. 비아가 별일이네.”
“그러게. 오늘 뭐 잘못 먹은 거 아니지?”
쏟아지는 의심 속에서 비아의 볼이 화난 복어처럼 잔뜩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