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246화 (246/299)

246화

제68화. 새로운 도전(4)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수많은 스태프들이 이연을 반겼다.

“안녕하세요, 이연 씨!”

“의상팀 지금 대기 중이니까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옷 준비되는 대로 바로 이연 씨 있는 곳으로 가져가도록 말 전해둘게요.”

“아, 이연 씨! 대사 수정된 거 몇 개 있는데, 이것부터 먼저 확인해 주시겠어요?”

예상은 했지만.

그것 이상으로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메이크업을 받으면서 동시에 포스트잇과 형광펜으로 가득 표기된 대본을 건네받은 이연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였다.

옆에서 드라마 작가가 직접 나서서 수정된 대사에 관한 것을 설명했다.

“S#4-3 보시면 이분이가 지석이한테 커피 건네면서 말하는 대사 있잖아요. 어조가 너무 딱딱하다는 의견이 있어서 좀 부드럽게 순화시켰거든요. 이것만 신경 써주시면 될 거 같아요.”

이연이 연기할 극중 여성 캐릭터, 홍이분의 대사를 가리켰다.

수정된 부분만 콕 찍어서 체크해 준 덕분에 확인하기가 쉬웠다.

이연도 수정한 쪽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인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쪽이 홍이분 성격하고 딱 맞아떨어지는 대사 같아요.”

“그렇죠? 이연 씨가 그렇게 말해주시니까 잘 수정했네요. 보시다가 또 걸리는 부분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주세요. 아셨죠?”

“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작가가 바로 근처에서 카메라를 든 스태프를 가리켰다.

“저 카메라는 메이킹 촬영 중이니까 보면 한 번씩 웃으면서 손 흔들어주세요.”

“이렇게요?”

카메라 감독이 이연에게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영화, 드라마 촬영 현장에선 이런 식으로 메이킹 영상을 따로 만드는 경우가 많다.

일종의 팬 서비스 같은 거라고 해야 할까.

작중에서 보지 못한 배우들의 또 다른 단면, 혹은 촬영장 분위기 등을 시청자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수단이다.

이연이 오늘 처음 현장에 합류해서 그런지 메이킹 담당 카메라는 그녀를 향해 뜨거운 관심을 드러냈다.

“이연 씨. 현장에 처음 오셨는데. 어떤 거 같나요?”

“다들 너무 잘해주시고, 분위기도 굉장히 좋아 보이더라고요. 벌써부터 촬영이 기대돼요. 빨리 시작했으면 좋겠어요.”

일부러 목소리를 두 톤 정도 올리면서 잔뜩 흥분된 상태임을 보여줬다.

메이킹 담당 카메라가 다른 곳으로 향하자마자 이연의 표정은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이런 연기는 대본에 없었는데.’

벌써부터 피곤함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 * *

새내기 대학생처럼 옷을 갈아입은 이연은 긴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으면서 마지막까지 자신의 현 상태를 체크하고 또 체크했다.

이은솔도 이연과 마찬가지로 거울로 계속 자신의 얼굴을 확인했다.

머리카락 끝이 살짝 갈라진 것을 본 이은솔이 부랴부랴 손끝으로 임시 처방에 들어갔다.

“어때요? 이제 괜찮죠?”

이런 것까지 일일이 다 메이크업, 헤어 담당을 불러 조치할 수는 없었다.

현장이라는 게 그만큼 바쁜 곳이니까.

게다가 그들이 이은솔 한 명에만 몰두하는 것도 아니고. 다른 배우들도 맡아야 했기에 이은솔은 웬만한 건 스스로 해결을 보려고 하는 편이었다.

권이연도 비슷했다.

그러나 그녀가 미처 보지 못한 게 있었다.

“연아.”

이은솔이 이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손을 뻗어서 이연이 입고 있는 스웨터에 묻은 머리카락 몇 가닥을 직접 떼줬다.

“머리카락 붙어 있어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천만에. 오늘은 어때? 긴장되고 그러진 않지?”

“네.”

이연은 이것보다 더 큰 무대에도 서본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처음 오는 드라마 촬영 현장임에도 불구하고 이연의 표정에선 긴장감이 크게 엿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대범함을 잘 아는 이은솔이었기에 이연의 이런 모습이 낯설게 느끼지 않았다.

오히려 굉장히 익숙했다.

“우재 형 곧 온다고 하니까. 촬영 시작하기 전에 먼저 리딩부터 해볼까?”

“네, 선배님.”

이은솔의 말이 끝나자마자 정우재가 부랴부랴 현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빠르게 준비를 마친 뒤, 리딩을 위해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은 세 사람.

이은솔이야 가끔씩 연기 활동도 펼쳤던 적이 있었기에 잘할 거라는 사실은 정우재도 알았지만.

이연은 의외였다.

“여기, 제가 좋아하는 카페거든요. 애들하고 자주 왔었는데, 오빠한테도 꼭 알려주고 싶었어요.”

수줍어하는 미소까지.

좋아하는 대학 선배를 바라보는 후배 대학생으로서의 감정이 그대로 대사에 실려 있었다.

이연이 이렇게 나오다 보니, 그냥 가볍게 말 정도만 맞춰보려고 했던 정우재와 이은솔도 본 촬영처럼 감정을 실어서 연기를 펼쳤다.

배우들의 연기하는 모습을 바로 근처에서 몰래 지켜보던 윤성준 PD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깃들었다.

사실 이연에게 홍이분 역할을 맡기자고 했을 당시, 스태프들 사이에서 반대하는 목소리가 제법 나왔었다.

가장 큰 걸림돌은 역시 연기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리딩 때 보여준 이연의 역량을 보고 나서 윤성준 PD는 강한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

자신의 안목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 확신은 본 촬영에 들어갔을 때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카페 안에서 단둘이 마주 앉게 된 홍이분과 황지석.

카페 음악과 함께 흐르는 미묘한 기류 속에서 황지석이 어색한 표정으로 물었다.

“다, 다음 계절학기 수강 신청은 끝냈어?”

“아니요. 저는 학점은 충분할 거 같아서 계절학기까지는 안 들어도 될 거 같아요. 선배님은요?”

“나는 하나만 들으려고. 아르바이트하느라 학점 관리에 제대로 신경을 못 써서. 살짝 부족하더라고.”

학자금 대출에, 월세에, 그리고 집에 보내줘야 하는 생활비까지.

오롯이 황지석의 몫이었기에 상대적으로 다른 학생들에 비해서 여유가 많이 없었다.

이연이 미안해하는 표정으로 물었다.

“죄송해요, 선배님. 커피는 제가 샀어야 했는데…….”

“아니야! 이 정도는 뭐. 얼마 안 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그리고 내가 설마 너한테 커피 한 잔 못 사주겠어?”

“저니까…… 사주신 거예요?”

“그, 그게 말이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속마음을 들킨 거 같아 당황했다.

“…….”

“…….”

이연과 이은솔은 서로 시선을 피하면서 쑥스러워하는 연기를 펼쳤다.

카메라는 그런 둘의 모습을 번갈아 비추면서 어색한 분위기를 그대로 담아냈다.

윤성준 PD가 오케이 사인을 보냈다.

“네, 좋습니다. 바로 다음 장면으로 넘어갈게요.”

아침부터 시작된 촬영이 벌써부터 중반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단 한 번의 NG도 내지 않았던 이연 덕분이었다.

그녀로 인해 스태프들은 덩달아 바빠졌다.

그래도 표정은 밝아 보였다.

촬영이 일찍 끝난다는 건, 다시 말해서 그만큼 퇴근 시간이 앞당겨진다는 뜻과도 같았기 때문이었다.

“이연 씨가 계속 나와서 촬영해 줬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지금처럼 빨리빨리 진행되니까 그렇지?”

“응.”

스태프들이 서로 속삭이는 소리가 이연의 귀에도 흘러들어 왔다.

이연은 오히려 너무 빨리 끝내 버리는 거 같아서 눈치가 보였는데.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세상에 조기 퇴근 싫어하는 직장인은 없다.

* * *

정신없이 방송 일정을 소화하다 보니 어느새 이연과 이은솔이 출연하는 ‘시들지 않는 너’ 에피소드 8화 마지막 촬영일이 훌쩍 다가왔다.

현장에 처음 방문해서 연기를 펼친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자신의 마지막 출연 분량을 녹화한다고 하니 이연은 감회가 새로웠다.

‘그래도 나름 재미있었으니까.’

후회는 없다.

마지막 장면은 S#21.

유학을 떠나게 된 홍이분과 황지석의 이별을 다루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연은 대본을 보면서 자신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기사 웬리’ 스토리를 떠올렸다.

‘그것도 여주인공이 다른 나라로 떠나는 이야기로 끝났었는데.’

결국 둘이 다시 이어질지 어떨지는 따로 결말로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더 깊게 여운이 남았다.

윤성준 PD의 작품도 ‘기사 웬리’와 같은 열린 결말 방식을 취하고 있었다.

두 사람의 슬픈 이별을 더 극대화시키고 싶어서 일부러 이런 결말을 채택했다.

그럼에도 이연은 ‘기사 웬리’를 연기했던 배우로서. 그리고 원작을 재미있게 읽었던 팬으로서.

뭔가 아쉬움이 남았다.

한참 대본을 바라보던 와중에 이은솔이 그녀를 찾는 소리가 들렸다.

“연아. 리딩 한번 해야지.”

“네, 선배님. 잠시만요.”

이연은 몸에 걸치고 있던 무릎담요를 치웠다.

오늘 촬영은 실내가 아닌 야외에서 진행되었다.

어둠이 짙게 깔린 한 주택가 거리.

재건축이 예정되어 있는 장소였기에 소음 때문에 민원이 들어올 걱정은 없었다.

작중에서는 실제로 사람들이 살고 있는 민가처럼 연출할 예정이었기에 촬영이 진행될 때에는 스산한 분위기가 덜했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 선 황지석이 먼저 대사를 읊었다.

“유학 가서도 공부 열심히 하고. 알았지?”

이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사를 까먹은 게 아니라. 대본상에서도 ‘홍이분, 심란해하는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인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연은 대본 그대로 따라 했을 뿐이다.

좋아하는 선배와 헤어져야 하는 슬픔을 억지로 참아내듯, 이연은 작은 손으로 주먹을 말아쥐었다.

이은솔이 먼저 걸음을 옮기려고 하던 순간.

“선배님!”

이연이 목소리를 높였다.

“가서도 계속 연락할게요. 꼭! 그러니까 제 연락…… 받으셔야 해요!”

황지석은 알고 있었다.

홍이분이 자신과 계속 만남을 이어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왜냐하면.

두 사람은 비록 같은 대학에 다닐지라도, 사는 세계가 다르니까.

그래서 황지석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닿을 리 없는 이별 통보. 그것을 속으로만 삼킨 황지석은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

“알았어.”

그렇게 리딩을 끝마치려고 하던 순간.

이연은 고개를 크게 갸우뚱하면서 이대로 안 되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PD님. 작가님.”

이연이 두 사람을 급하게 찾았다.

덩달아 이은솔도 이연의 뒤를 따라 같이 움직였다.

“죄송한데, 장면 하나만 더 추가할 수 있을까 해서요.”

“네, 말씀해 보세요.”

윤성준 PD는 오히려 이연의 이런 적극적인 의견을 기다렸다는 듯이 말했다.

이연이 들려준 말은 여러 가지 의미에서 충격적이었다.

“키스신 넣을 수 있을까 해서요.”

뒤에 서 있던 이은솔은 사례라도 들렸는지 계속해서 콜록이며 기침을 흘렸다.

윤 PD와 작가도 당황스럽긴 마찬가지였다.

스킨십, 키스신은 NG라던 이연이 먼저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연이 말한 건 다른 의미에서의 키스신이었다.

“진짜로 입술을 맞대자는 게 아니라요. 홍이분하고 황지석이 둘이 서로 키스를 하는 듯한 장면 연출만 넣자는 뜻으로 한 말이에요.”

“아…… 그, 그렇군요. 나는 또. 두 분이 마우스 투 마우스 하시겠다는 줄 알았네요.”

윤성준 PD는 오해가 풀려서 다행이라며 허허 웃었다.

반면에 이은솔은 아쉬움이 많이 남는 모양인지 몰래 입맛을 다셨다.

윤 PD는 이은솔이 무엇 때문에 저렇게 아쉬움을 드러내는지 굳이 묻진 않기로 했다.

왠지 알 거 같아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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