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5화
제68화. 새로운 도전(3)
오랜만에 리더들 앞에 서게 된 황이전 PD가 밝은 표정으로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동안 잘 지내셨죠?”
리더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황 PD와 짧은 안부 대화를 나눴다.
곧장 본론으로 넘어가기 위해 황 PD가 녹화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다.
“주린 씨가 와서 여러분들에게 이것저것 질문할 테니까 토크쇼 녹화하는 것처럼 임하시면 됩니다. 아셨죠?”
“네!”
토크 예능 프로그램 경험은 다들 가지고 있었기에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
게다가 이미 걸파이트 시즌 2를 수차례 녹화하면서 어떤 방식으로 토크를 진행할지에 대해서도 익숙해져 있었다.
이렇다 보니 긴장감은 상대적으로 덜했다.
마침 앞에 잡혀 있던 스케줄을 마치고 부랴부랴 녹화 현장을 찾은 민주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녹화가 늦게 끝난 탓에 본의 아니게 지각을 하고 말았다.
황 PD는 괜찮다는 말로 민주린을 안심시키면서 그녀를 스튜디오로 바로 인도했다.
“대본은 다 숙지하셨죠?”
“네. 차 타고 오면서 몇 번 더 봤어요.”
“헷갈린다 싶으면 큐시트 보셔도 됩니다. 필요하면 커닝페이퍼도 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PD님.”
녹화 준비를 위해 황 PD가 카메라 뒤로 물러났다.
카메라가 돌기 직전에 민주린은 후배들에게도 늦어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리더들은 단체로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괜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민주린에게 천천히 준비하셔도 된다는 말을 건넸다.
5분 뒤.
“촬영 시작하겠습니다!”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주린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면서 카메라를 응시했다.
180도 달라진 그녀의 표정을 보면서 이연은 속으로 생각했다.
‘확실히. 프로는 프로야.’
정신이 하나도 없는 와중일 텐데도 민주린은 침착하게 멘트를 이어갔다.
“저희, 이렇게 마주 앉는 건 오랜만이죠?”
“네, 선배님!”
“다들 엄청 바빠 보이더라고요. 프로그램, 광고 섭외 요청도 많이 들어왔을 거 같은데. 특히 하니엘이 가장 바쁘지 않나요? 우승팀이잖아요.”
멤버들의 시선이 하니엘 대표로 나온 이연에게 쏠렸다.
미랑이 근처에서 마이크를 들고 말했다.
“기사 봤어. 광고 제의 엄청 들어오고 있다면서?”
“엄청까지는 아니고, 저희가 소화할 수 있는 만큼만 받고 있어요.”
“에이. 또 겸손 차리네. 솔직하게 말해봐.”
미랑이 장난기를 가득 품은 어투로 이연을 독촉했다.
이에 대해 이연은 어색한 미소로 얼버무렸다.
아직 계약 단계이기도 하고. 비밀 유지 조항 같은 걸 생각한다면, 말을 아끼는 게 맞다.
미랑도 그걸 잘 알기에 딱 여기까지만 놀리고 알아서 마무리를 지었다.
민주린은 선후배들이 보여주는 티키타카에 흐뭇한 미소를 흘렸다.
“처음 녹화할 때가 생각나네요. 그때는 다들 서로 어색해서 말도 제대로 못 섞고, 그랬잖아요.”
“그땐 그랬죠.”
“서로 막 친분 있고. 그런 관계는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나 지금은 그 어느 그룹보다도 친한 사이가 되었다.
파이널 미션에서는 어쩔 수 없이 순위가 정해졌지만.
이들의 마음속에는 서로가 다 동등한 1등으로 자리매김했다.
민주린이 혜원에게 물었다.
“혜원 씨는 걸파이트 녹화하면서 언제가 가장 기뻤나요?”
“저는…… 마지막 무대가 기억에 남아요.”
“마지막이요?”
“네.”
민주린은 그녀의 대답에 의외라는 반응을 보였다.
보통은 이렇게 물으면 자기 팀이 1위를 했던 당시의 순간을 언급하는 경우가 많은데.
혜원은 마지막에 하니엘에게 1위 자리를 내줬던 파이널 미션이 가장 기뻤다고 대답했다.
이유가 있었다.
“마지막 무대가 끝난 덕분에 마음의 짐을 다 덜어낼 수 있었으니까요.”
이 말을 듣고 나서야 민주린을 포함해서 다른 후배 그룹 리더들도 깊은 공감을 드러낼 수 있었다.
민주린이 미랑에게 다음 질문을 건넸다.
“미랑 씨는 혹시 아쉬운 순간이 있었나요?”
“저도 파이널 미션 무대요.”
“1위를 아쉽게 놓쳐서요?”
“1위보다는…….”
미랑의 시선이 혜원에게 향했다.
“아이비제이 선배님을 넘어서고 싶었거든요. 근데 그게 무산되어서 아쉬워요.”
혜원이 싱긋 웃으면서 미랑에게 위로인 듯, 아닌 듯한 말을 건넸다.
“순위 경쟁은 걸파이트에서만 이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아이돌들에겐 매 순간 순간이 생존이고 경쟁이다.
다음 앨범으로 컴백하면, 그때부터 다시 새로운 경쟁이 시작될 것이다.
미랑은 혜원의 말에 묘한 미소를 지으면서 답했다.
“아직은 기회가 많이 남아 있다는 뜻이겠네요.”
“그렇죠.”
이들 사이에 다시 한번 스파크가 생성되었다.
혈기왕성한 그녀들의 모습에 이연은 남들 몰래 쓴웃음을 삼켰다.
* * *
인터뷰 촬영을 마친 이연은 윤성준 PD의 드라마, ‘시들지 않는 너’ 미팅을 가지기 위해 곧장 박도수 매니저의 차에 올라탔다.
이동하는 와중에도 이연은 계속해서 대본을 살폈다.
보면 볼수록 ‘기사 웬리’가 떠올랐다.
당시에 희대의 명작으로 소문이 났던 작품인 만큼, 이연이 보기엔 윤성준 PD의 이번 드라마도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시놉시스도 재밌고.’
성공할 드라마에 미리 한 발을 걸쳐두면, 이연의 연예계 활동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렇게 대본에 집중하는 사이.
박도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량이 어느 건물의 지하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박도수 매니저가 이연을 에스코트했다.
“5층이라고 했으니까, 엘리베이터 타고 바로 올라가자.”
“네.”
띵! 소리가 이연과 박도수 매니저가 있는 지하 2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안에 타고 있던 일행이 이연을 보고서 크게 놀랐다.
“어? 연아!”
정우재가 그녀에게 먼저 반가운 마음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윤 PD님 작품 미팅 때문에 오신 거죠? ‘시들지 않는 너’ 드라마요.”
“어떻게 알았어?”
이연이 윤성준 PD와 호흡을 맞추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게 신기하다는 반응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우재가 드라마 내에서 주인공 역할을 맡았다는 건 아직 기사로도 안 나간 일급 기밀 정보였기 때문이다.
소문이 새어 나갈까 봐 일부러 친한 지인들한테도 말해준 적 없었다.
그걸 이연이 알고 있으니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저도 이번에 윤 PD님 작품에 출연하기로 했거든요.”
“배우로? 진짜?”
“네.”
“드디어 연기에도 손을 뻗히는구나. 네 무대 볼 때마다 네가 연기 한번 해봤으면 어떨까 싶긴 했는데.”
현직 배우가 봐도 이연의 가사 표현 능력은 수준급이었다.
한 화에만 나올 단역이라는 게 아쉽긴 하지만, 그래도 정우재는 기대 많이 하겠다는 표정으로 이연의 출연을 응원했다.
“나중에 현장에서 보자.”
“네, 선배님.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중간에 정우재와 만날 거라고는 미처 예상 못 했지만, 그래도 낯선 장소에서 친숙한 얼굴을 만나니까 나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윤 PD와 드라마 제작진이 기다리고 있을 5층으로 향했다.
마침 회의실에 나와서 커피 한 잔을 들고 스태프들과 두런두런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윤 PD의 모습이 보였다.
PD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유명하다 보니 멀리서도 그가 누군지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한발 일찍 회의실에 와서 윤 PD와 인사를 나눴던 홍류현 실장이 둘을 먼저 알아차렸다.
“왔어?”
“안녕하세요.”
홍 실장 덕분에 윤 PD도 두 사람이 도착했음을 알게 되었다.
“윤성준입니다. 이연 씨, 실물로 보니까 더 예쁘시네요. 아이돌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말이 왜 나오는지 알겠습니다.”
이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아니라고 고개를 저었다.
다시 회의실로 돌아왔을 때, 윤성준 PD가 명함을 건네면서 다시 한번 정식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서로 바쁘다는 것을 잘 알아서인지, 길게 시간 끌 것 없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갔다.
“촬영은 아마 다음 달에 바로 시작할 예정입니다. 원래는 에피소드 순서대로 진행하고 싶었는데. 은솔 씨 스케줄 때문에 이연 씨하고 은솔 씨가 출연하는 화부터 먼저 촬영하려고요.”
벡스의 미국 투어 콘서트가 코앞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정을 조율해야 했다.
이연도 차라리 다음 달에 바로 촬영에 들어가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일찌감치 촬영 끝내두고 그래야 3집 앨범 작업에 집중할 수 있을 테니까.
“이연 씨도 괜찮으시죠?”
“네.”
“알겠습니다. 대본은 다 보셨을 테고…… 특별히 문제 될 만한 부분은 없을까요? 눈에 거슬리는 대사가 있으면 언제든 말해주세요.”
윤성준 PD는 배우들의 의견을 자주 듣는 편이었다.
각본 작업은 윤 PD와 작가가 하지만, 캐릭터에 몰입하고 연기를 펼치는 사람은 다름 아닌 배우 본인이다.
이렇다 보니 그 캐릭터에 대해서만큼은 윤성준 PD보다도 배우가 더 이해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윤 PD는 최대한 귀를 열어둔 채 촬영을 진행하려 했다.
이연은 여러 번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네. 그렇게 할게요. 근데 아직까지 크게 수정할 부분은 안 보이더라고요.”
“다행이네요.”
오히려 이연은 수정 없이 이대로 가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 중이었다.
“구체적인 장소하고 시간은 나중에 따로 전달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의제를 꺼내기 위해 윤 PD가 대본을 여러 차례 넘겼다.
아무래도 오늘의 회의는 짧게 끝날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 * *
걸파이트 시즌 2에서 우승한 여파 덕분일까.
이연은 외부뿐만 아니라 소속사 내에서도 스타 취급을 받고 있었다.
특히 LC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연습생들 사이에서 이연은 선망의 대상 그 자체였다.
오디션 출신으로서 유명세를 떨치고, 더 나아가서 쟁쟁한 대선배들과의 경쟁 끝에 하니엘을 우승으로 이끈 주역.
그녀가 지나가는 모습만 봐도 연습생들의 눈빛이 반짝일 정도였다.
그러나 이연은 이 시선이 약간 부담스러웠다.
스마트폰을 꺼낸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으며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니저님. 언제쯤 오세요?”
-잠깐만. 앞 차가 방문 차량인가 본데, 정산하는 데 시간이 좀 걸리네. 금방 갈게.
“알았어요.”
그룹으로 다니면 그나마 이런 시선들을 받는 일도 덜할 텐데.
오늘부터 드라마 촬영이 시작되기에 앞으로 지금처럼 혼자 스케줄을 다니는 경우가 더 많아질 것이다.
‘이것도 운명이려니 하고 감내해야 하나.’
이연의 인지도가 그만큼 날이 갈수록 올라간다는 증거니까.
웬만하면 이 현상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게 좋아 보였다.
마침 박도수 매니저가 이연 앞에 차를 멈춰 세웠다.
차에 오르자마자 박도수 매니저가 문앞에 몰래 숨어서 이연의 뒷모습을 훔쳐보던 연습생들을 가리켰다.
“애들한테 인기 많네?”
“그러게요.”
“안 그래도 대표님이 너한테 애들 관련해서 할 말 있다고 하시던데.”
“저희 멤버들이 아니라. 연습생들 관해서요?”
“어. 아직 논의 단계라서 말은 못 해주겠는데. 나중에 정해지면 그때 들어봐.”
“……?”
박도수 매니저가 던진 물음표 하나가 이연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