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제67화. 피날레(3)
원더존의 마지막 무대를 지켜보는 하니엘 멤버들.
현장은 마치 스포츠 경기를 관람하는 팬들의 반응처럼 뜨거운 함성으로 가득 차고 있지만, 하니엘을 포함해서 다음 차례를 기다리는 팀들의 대기실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도서관에 온 것처럼 조용했다.
정숙, 그리고 고요.
누가 먼저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렇게 4분여 동안의 짧은 시간이 모두 지난 뒤.
가을소녀 때처럼 카메라 감독이 원더존 멤버들을 한 명씩 포커싱했다.
앞의 무대와 마찬가지로 원더존 또한 아쉬움이 가득 느껴지는 표정이었다.
우미가 쓴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저기에 올라가면 다들 아쉬운 마음이 들게 되나 보네.”
이연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마지막이라는 건 어쩔 수 없으니까.”
녹화가 진행되는 동안 몸도, 마음도 힘든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나쁜 기억만 있는 건 아니었다.
내 생에 있어서 언제 이런 프로그램을 만나 이렇게 치열하게 살아볼 수 있는 날이 있을까.
가만히 돌이켜 보면 좀처럼 없는 기회일 수도 있다.
이 생각은 곧 아쉬움으로 이어진다.
사람들의 박수 갈채가 마치 원더존 멤버들에게 ‘고생했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그렇게 마지막 무대를 마치고 퇴장하는 원더존.
다음, CDP가 세 번째로 차례를 이어가게 되었다.
지금까지 경쟁팀들의 무대를 조용히 지켜보던 이연은 문득 어느 공통점 하나가 눈에 띄었다.
기존 무대와 큰 차별점이 없었다.
물론 아예 똑같은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이연의 기준으로 봤을 때에는 약간의 퍼포먼스만 추가되었을 뿐. ‘신선하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극적인 변화는 보이지 않았다.
‘마지막이니까 다들 안전하게 가고 싶어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지.’
CDP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여기서 크게 틀을 바꾼 그룹이 등장했다.
네 번째로 무대에 선 샤이걸스였다.
샤이걸스라면 당연히 자신들이 잘하는 발라드를 선보일 줄 알았었다.
최근에 발매한 곡도 그렇고.
그러나 샤이걸스는 이번에도 이연의 관심을 사로잡는 무대를 펼쳤다.
여솜이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장르를…… 댄스로 바꾸신 거지?”
발라드였던 원곡을 댄스로 새롭게 꾸몄다.
신선하다 못해 과감하다.
비아는 이해가 잘 안 간다는 표정으로 자신의 생각을 흘렸다.
“선배님들은 무조건 발라드 해야 하는 거 아니야? 결승이잖아.”
마지막이니까 자신들이 잘할 수 있는 걸 보여주는 게 좋다.
다시 말해서, 안정적인 무대가 정배라는 뜻이었다.
그래서 가을소녀, 원더존, CDP까지. 최근에 발표했던 곡을 약간만 변형한 형태로 가져와서 무대를 꾸몄던 거였다.
그러나 샤이걸스의 공연은 전혀 다른 곡을 가져온 것 같은 낯설음을 선사했다.
이연은 왠지 알 것 같았다.
“오히려 마지막이라서 그러시는 거겠지.”
“왜?”
“이때 아니면 다음 무대가 없으니까. 그렇다면 못 해봤던 것,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가는 게 좋잖아.”
이전 미션에서 간혹 보여줬듯이 샤이걸스는 자신들에게 굳어진 발라드 그룹이라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 여러 번 시도를 했었다.
지금의 무대 역시 이 시도의 연장선이라고 볼 수 있었다.
‘어차피 평소 하던 대로 해봤자 1위를 넘볼 수 없다는 걸 잘 알 테니까 그러겠지.’
모 아니면 도다.
마지막까지 샤이걸스는 승부사적인 기질을 보였다.
의외성이 가득했던 그녀들의 차례가 끝나고.
드디어 걸파이트 시즌 2의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한 팀이 무대 위에 올라섰다.
MAYO의 등장에 객석은 벌써부터 후끈 달아올랐다.
결승이라서 그런 걸까. 이것보다 훨씬 더 큰 무대에 자주 섰던 경험을 지닌 MAYO 멤버들조차도 앞선 주자들처럼 긴장감으로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시우가 탄식을 삼키면서 말했다.
“저, MAYO 선배님들이 저렇게 긴장하시는 거 처음 봤어요.”
그만큼 오늘의 무대는 압박감이 장난이 아니었다.
MAYO도 파이널 미션이기 때문에 단단히 칼을 갈고 나왔을 것이다.
하니엘의 연습 과정을 보기 위해 견학까지 신청할 정도였으니까.
그녀들이 과연 얼마나 철저하게 준비해 왔을지, 이연은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 * *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대기실.
긴장한 MAYO 멤버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현은 깜짝 놀랐다.
“천하의 MAYO가 긴장을 다 하네.”
지현과 다르게 혜원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했다.
“저기는 그런 곳이니까.”
장소와 시간이 어떻듯, 사람들 앞에 서서 춤추고 노래하는 일은 늘 긴장의 연속이다.
언제 방송사고가 날지, 자신 혹은 팀원이 실수를 저지를지. 아무도 모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MAYO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거는 기대감이라는 게 있다.
심지어 적은 것도 아니고 굉장히 크다.
월드 투어까지 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많은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팀이니까.
이것은 때론 가수에게 부담감으로 작용한다.
지금의 MAYO가 그렇다.
미수가 의자를 끌고 와서 언니들과 거리를 좁혔다.
“잘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해 지현이 되물었다.
“우리? 아니면 MAYO?”
“MAYO요.”
“뭐, 잘하지 않을까? 프로잖아.”
“프로라고 항상 다 잘하란 법은 없잖아요. 우리도 가끔 실수하는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이번 결승은 누가, 얼마나 더 잘하냐의 싸움이 아니다.
어느 팀이 실수를 안 하느냐. 이 싸움으로 판가름이 날 것이다.
어차피 실력은 다들 비등비등하기 때문이다.
녹화방송이라면 상관없다. 한번 끊고 다시 무대를 이어가면 되니까.
하지만 생방송에서는 그럴 수가 없다.
샤이걸스가 자유 미션에서 라이브 도중 실수를 저지른 탓에 순위가 저조하게 나왔던 것처럼, 얼마나 실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끼리 이런저런 추측을 이어갈 때쯤.
-지금부터 MAYO의 무대를 만나보시겠습니다!
민주린이 턴을 MAYO에게 넘기고 무대를 벗어났다.
흘러나오는 전주를 듣자마자 혜원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비트가 다르네.”
“그러게? 원곡보다 반 템포 더 빠른 거 같지 않아?”
원곡도 속도감이 빠른 축에 속하는데. 그것보다 더 빨리 곡을 전개할 줄은 몰랐다.
MAYO가 최근에 발표했던 곡, ‘dash’는 노래, 안무, 그리고 전체적인 곡 콘셉트까지. MAYO가 여태껏 선보였던 곡 중 가장 많은 호평을 받고 있었다.
MAYO 입장에선 이미 검증된 무대에 큰 변화를 주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을 오히려 더 강화하고 보완하는 쪽으로 퍼포먼스를 구상해서 가져오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MAYO의 작전은 과연 성공일까?
일단 현장 분위기만 놓고 본다면 성공적이라고 볼 수 있었다.
지현이 강렬하고 파워풀한 MAYO의 무대를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잘하네. 역시 MAYO야.”
마치 이전 미션에서 보여준 모습들은 예선전에 불과했다고 말하는 것처럼 차원이 다른 포스를 뿜었다.
파워풀한 퍼포먼스에 사람들은 열광했다.
지현과 미수의 어깨마저 들썩이고 있었다.
라이벌 팀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정도로 흡입력 있는 무대를 보여준 MAYO.
공연이 끝나자, 사람들은 손에 불이 나도록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과 대기실에 있던 스태프들 역시 박수를 쳤다.
“너무 잘했다.”
“얼마나 연습했을지 감도 안 잡히네.”
마지막 무대라는 수식어에 걸맞게 MAYO가 가진 모든 것들을 쏟아부은 무대였다.
여기까지 봤을 때, 혜원은 MAYO가 무조건 우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아직 모든 촬영이 끝난 게 아니다.
아직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하니엘이 남았다.
스태프가 대기실을 찾았다.
“다음 무대 준비해 주세요!”
스태프의 외침에 혜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가장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우리도 만만치 않다는 거 보여주러 가야지.”
지현과 미수는 물론이라면서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 *
촬영은 점점 후반부로 접어들고 있었다.
이제 무대를 펼칠 팀은 고작 둘밖에 남지 않았다.
이연은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화면에 비치는 멤버들의 표정은 앞선 팀들과는 사뭇 달랐다.
여솜이 ‘역시 아이비제이 선배님들이야’라고 말하면서 혼잣말을 들려줬다.
“긴장을 전혀 안 하고 계시네.”
“전혀는 아니야.”
이연은 알 수 있었다.
그녀들도 지금 초긴장 상태라는 것을.
겉으로 잘 티를 내지 않을 뿐. 눈빛만 보면 이전 무대들과는 확연하게 차이가 난다.
민주린이 혜원에게 가벼운 질문 하나를 던졌다.
-앞서 후배들의 공연을 보셨을 텐데. 어땠나요?
-후배님들 모두 너무 잘하시더라고요. 보면서 저희도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르겠어요. 특히 바로 앞에 있었던 MAYO 후배님들의 무대는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을 정도더라고요.
-그만큼 부담감이 많이 크시겠어요?
-네. 하지만 무대에 서는 사람으로서 부담감은 늘 가질 수밖에 없으니까요. 상황이 어떻든 간에 늘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벌벌 떨면서 인터뷰했던 원더존과 달리, 아이비제이 트윙클은 너무나도 능숙하게 멘트를 이어갔다.
그동안 축적된 경험에서 나오는 짬의 위엄이 다시금 느껴졌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공연이 마침내 펼쳐졌다.
MAYO와 더불어서 이연이 가장 견제하고 있는 팀의 무대다 보니 관심이 안 갈 수가 없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은 강렬하고 파워풀했던 MAYO와는 다르게 청순 콘셉트의 무대를 지향하고 있었다.
이전 곡도 그랬고 말이다.
초반까지 봤을 때에는 이렇다 할 특별한 점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전 무대를 그대로 카피해서 가져온 걸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1절 후렴구에 들어서기 직전.
갑자기 분위기가 반전되었다.
청순에서 걸스힙합으로 장르가 바뀐 거였다.
1부가 끝나고 2부로 새롭게 들어서는 느낌을 선사했다.
심지어.
“편곡도 잘했네.”
이연이 인정할 정도면, 편곡 수준이 범상치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만약 이 자리에 진세혁 프로듀서가 있었다면, 이연과 똑같은 반응을 보였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녀보다 더 격하게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편곡을 칭찬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반전된 분위기에 따라 관객들의 호응도 커졌다.
하니엘의 대기실 내부 분위기도 떠들썩해졌다.
“원곡보다 훨씬 좋지 않아?”
“그러게. 차라리 이 버전이 더 나은 거 같은데.”
이연도 이 의견에 동의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속한 소속사는 연예 기획사들 중에서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대기업이라 불리는 곳에서 실력파 프로듀서들을 작정하고 여럿 붙였을 테니. 이 정도 퀄리티가 나오는 건 매우 당연한 결과일지도 모른다.
노래, 퍼포먼스, 그리고 한 발 더 나아가서 무대 매너까지 전부 완벽하다.
너무 잘한다. 이런 생각이 그녀들의 공연이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마무리마저 완벽했다.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었다.
엔딩 당시에도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은 울지 않고 끝까지 웃는 모습을 보이면서 그녀들의 여정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연은 그녀들의 마인드 컨트롤에 진심을 다한 박수를 보냈다.
확실히 라이벌 팀으로서 독보적인 존재다.
그러나 이연은 오히려 지금의 상황을 좋게 보고 있었다.
‘경쟁하는 팀이 강해야 이기는 맛이 있으니까.’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우승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