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8화
제67화. 피날레(1)
걸파이트 시즌 2 파이널 라운드 팀 미션이 치러지는 날이 밝았다.
마지막 팀 미션 무대라서 그런 걸까. 하니엘 멤버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긴장한 모습으로 현장에 도착했다.
오늘은 평소에 그녀들이 녹화하던 스튜디오와 다른 곳에서 촬영이 진행될 예정이었다.
걸파이트 시즌 2 파이널 라운드만을 위해 제작진이 준비한 특설 무대로, 이전보다 훨씬 넓은 무대에 다양한 음향, 조명 장치들을 보유하고 있었다.
객석 크기도 넓었다.
팬들뿐만 아니라 SSS 때처럼 프로그램에 참여 중인 아이돌의 가족들, 지인들도 녹화 현장에 참여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객석이 넓으면 넓을수록 당연히 좋을 수밖에 없었다.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이연은 자신들이 곧 서게 될 무대부터 먼저 확인했다.
‘신경 많이 쓴 티가 나네.’
직관적으로 말하자면.
돈 쓴 티가 제법 난다.
예능 부문에서 최고 시청률을 달리고 있는 프로그램답게 상당히 호화스러운 대우를 받고 있었다.
웬만한 공중파 채널보다도 더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으니. 방송국 입장에서는 걸파이트 시즌 2에 투자를 안 할 수가 없을 것이다.
눈으로 빠르게 무대를 훑은 이연은 하니엘 멤버들과 함께 대기실로 걸음을 옮겼다.
복도에는 무대 준비로 인해 정신없이 움직이는 스태프들의 모습을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바빠도 인사는 빼먹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이연 씨.”
“안녕하세요. 오늘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연도 스태프들에게 일일이 인사말로 화답했다.
대기실에 도착하자 멤버들은 무대 의상부터 먼저 확인했다.
최공예 코디가 의상팀과 함께 의상 구석구석을 살피면서 수선이 필요한 곳이 있는지를 점검했다.
“착용감은 어때?”
리샤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요. 움직이기도 편하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이면서 크게 불편한 부분이 없음을 표현했다.
의상뿐만 아니라 메이크업, 헤어 상태도 굉장히 중요했다.
아이돌이니까.
무대에 올라섰을 때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반짝반짝 빛이 나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연은 거울 앞에 바짝 다가가서 속눈썹이 제대로 붙어 있는지를 확인했다.
화장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컨디션도 괜찮고.
그래도 혹시 몰랐기에 사소한 것부터 하나하나까지 그녀가 직접 확인하면서 만반의 준비를 갖추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리샤. 무대 시작하기 전에 너무 많이 먹지 마. 알겠어?”
“먹어야 힘이 나는데.”
“힘 날 때까지만 딱 먹어. 과식하지 말고. 그리고 비아는 물 너무 많이 마시지 마. 저번처럼 화장실 들락날락하다가 무대 올라가야 한다고 하면 큰일이잖아.”
비아가 얼굴을 붉히면서 마지못해 알겠다고 답했다.
그렇게 멤버들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모두 챙기는 사이.
스태프가 멤버들을 불렀다.
“사전 인터뷰 촬영 시작합니다. 준비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무대에 올라서기 전에 멤버들의 심정이 어떤지, 인터뷰를 통해 미리 녹화해 둘 예정이다.
바로 어제 리더들이 대표로 무대에 오르는 각오를 영상으로 담긴 했지만, 팀원들이 다 모여서 인터뷰를 나누는 장면도 필요했다.
그래서 다 같이 모인 김에 촬영까지 덩달아 진행하기로 했다.
늘 그렇듯 하니엘 멤버들은 이연을 중심으로 뭉쳐 앉았다.
카메라가 돌기 전에 황이전 PD가 멤버들의 긴장을 조금이나마 풀어주기 위해 다른 말을 꺼냈다.
“오늘 느낌은 어때요? 무대 잘 될 거 같나요?”
“네!”
“자신 있습니다!”
많이 긴장하고 있을 줄 알았는데.
그럼에도 하니엘은 패기 넘치는 모습을 보였다.
곧바로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황이전 PD는 방금 전에 멤버들에게 물었듯 가벼운 어투로, 최대한 자연스럽게 그녀들에게 추가 질문을 건넸다.
“이제 마지막 무대인데. 그동안 하니엘은 쭉 상위권을 유지해 오던 팀이잖아요. 이번에도 좋은 결과 기대해봐도 괜찮을까요?”
“물론이죠!”
“준비 열심히 했으니까요.”
“팬 여러분들한테 좋은 모습 보일 수 있도록 오늘도 열심히 노력할 예정입니다!”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면서 강한 열의를 드러냈다.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황이전 PD는 걸파이트 첫 녹화 때가 떠올랐다.
“사실 여러분들을 섭외하려고 할 때, 제작진 내에서 우려하는 의견이 꽤 있었거든요. 같이 참가하는 팀들이 아이비제이 트윙클하고 MAYO 같은 대선배들하고 이제 막 데뷔한 하니엘이 과연 게임이 될지. 너무 한쪽으로 치우쳐진 경쟁이 되지 않을까 하고요.”
제작진의 걱정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다.
활동 이력이나 팬덤 규모나.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의미할 정도로 큰 차이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니엘은 매 라운드 미션마다 놀라운 기록을 보였다.
제작진 입장에서 하니엘의 활약은 말 그대로 기적과도 같았다.
지금은 이렇게 쟁쟁한 선배 그룹들을 누르고 강력한 우승후보로 거론될 만큼 성장했다.
“걸파이트가 여러분들의 가수 인생에 있어서 기억에 오랫동안 남을 수 있는 프로그램이 된다면 좋겠습니다.”
PD로서가 아니라 하니엘을 좋아하는 한 명의 팬으로서 하는 말이었다.
멤버들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답했다.
“감사합니다, PD님!”
“열심히 할게요!”
이제 그녀들이 해야 할 일은 하나뿐이다.
우승이라는 이름의 마침표를 찍는 것.
이를 위해 이연과 멤버들은 카메라 앞에서 다시 한번 굳은 각오를 다졌다.
* * *
리허설을 마치고 대기실에서 잠시 시간을 보내고 있던 이연은 동생의 전화를 받기 위해 잠시 밖으로 나왔다.
-누나. 입구가 안 보이는데. 어디로 들어가면 돼?
“근처에 방송국 직원 있으면 붙잡고 물어봐.”
모르면 혼자서 끙끙 앓고 있는 것보다 물어보는 게 최고다.
이번에도 이연의 가족들은 그녀를 응원하기 위해 녹화 현장을 찾았다.
남동생 친구들도 같이.
통화를 마친 이연은 짧은 한숨을 내쉬고선 다시 대기실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이때, 복도에서 누군가가 이연에게 말을 걸었다.
“이연 씨.”
익숙한 목소리에 곧장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향한 곳에 무대 의상을 갖춰 입은 혜원이 서 있었다.
“아까 보니까 잠깐 통화하고 계시던데.”
“네, 선배님.”
“가족들한테서 온 전화에요?”
딱히 숨길 건 없다고 생각이 들어서인지 이연은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이연의 통화 상대방이 누구였는지를 어떻게 알았나가 궁금했다.
이연의 속마음을 꿰뚫고 있기라도 한 모양인지, 혜원이 알아서 그녀의 궁금증을 해결해 줬다.
“중요한 무대를 앞두고 있으니까요. 그래서 가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거든요.”
상당히 예리한 추측이었다.
간혹 보면 혜원은 주변에서 챙겨줘야 할 만큼 덤벙거리는 모습을 많이 보여주는데. 때로는 지금처럼 날카로운 면을 보여주곤 한다.
그래서 이연은 혜원을 항상 방심할 수 없는 상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오늘 치를 마지막 경연 무대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촬영 시작하려면 멀었는데. 둘이서 이야기라도 잠깐 할까요?”
“저하고요?”
“네. 별다른 뜻은 없고요. 그냥…… 걸파이트 끝나기 전에 이연 씨하고 단둘이서 이야기할 수 있는 시간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제 개인적인 욕심이니까 어렵다고 하면 솔직하게 말해도 돼요. 이연 씨가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이런 거 가지고 뒤끝 남기는 성격은 아니거든요.”
이건 사실이다.
이연이 그동안 봐 온 혜원의 모습은 그랬으니까.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연 역시 혜원과 같은 바람을 가지고 있었다.
“네, 선배님. 그럼 자리는…….”
“제가 아는 비밀 공간이 있어요. 그쪽으로 가요.”
“비밀 공간?”
“네.”
혜원이 살며시 윙크를 하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손짓했다.
* * *
오른쪽 복도 끝을 따라 쭉 걷다 보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벤치와 커피 자판기가 있는 작은 휴게실도 마련되어 있었다.
방송국에서 일하는 직원들 사용하라고 만든 공간 같은데.
정작 사람은 없었다.
“여기는 직원분들도 잘 모르는 공간이거든요.”
“선배님은 여길 어떻게 아셨나요?”
“예전에 스케줄 늦어서 급하게 스튜디오로 가고 있었는데 중간에 길을 잃어버렸거든요. 여기저기 헤매다가 찾았어요.”
혜원다운 대답이었다.
당시에는 아찔했을지 몰라도, 그 경험 덕분에 이렇게 조용하고 한적한 나만의 공간을 찾아냈으니까.
오히려 이득이다.
무대 의상이 더러워질까 봐 혹시 몰라서 밑에 손수건을 깔고 벤치에 앉았다.
혜원과 둘이서만 이렇게 나란히 앉아 있으니 어색한 기류가 감돌았다.
이연이 먼저 말문을 뗄까 하던 순간.
혜원이 말을 꺼냈다.
그녀의 첫 마디는 이연에게 귀를 의심하게 할 만한 말이었다.
“미안해요, 이연 씨.”
“네?”
그녀가 이연에게 사과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래서 방금 한 말이 더 이해가 가지 않았다.
혜원이 이연에게 사과의 이유를 알려주기 시작했다.
“걸파이트 녹화 시작하기 전까지 하니엘은 실력이 아니라 서바이벌 프로그램 덕분에 뜬 그룹이라고 생각했었거든요. 그래서 걸파이트 참가팀 명단을 봤을 때 하니엘은 경쟁 상대가 전혀 안 될 거라고 생각했었어요.”
혜원에게 하니엘은 안중에도 없던 그룹이었다.
그러나 막상 녹화가 시작되고 나니까 혜원의 이런 생각은 착각과 오해였음이 밝혀지게 되었다.
하니엘의 유명세는 프로그램빨이 아니었다.
실력이다.
혜원은 미션들을 진행하면서 이런 깨달음을 수차례 넘게 겪었다.
그래서 마지막 녹화가 시작하기 전에 이연에게 하니엘을 얕잡아봤던 자신의 태도에 대해 꼭 사과하고 싶었다.
사실 말 안 하고 그냥 넘어갈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혜원은 그러지 않았다.
“이렇게 솔직하게 다 털어놓고 가야 무대에서 이연 씨를 상대로 전력을 다할 수 있을 거 같거든요.”
승부의 시작은 라이벌을 인정하고 나서부터다.
혜원의 말에 이연은 작게 웃으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저야말로요. 걸파이트에 참가해 줘서 고마워요, 이연 씨.”
그녀와 하니엘 멤버들 덕분에 혜원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4세대 걸그룹의 정상 반열에 올라서 이제 더 이상 위로 올라갈 곳이 없지 않나 생각했던 것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 있었다.
두 여성은 서로를 마주보면서 한동안 짙은 미소를 유지했다.
서로를 인정했으니까.
무대 위에서 누가 더 우위에 있는지 확인해 볼 차례만 남았다.
* * *
무대 순서는 이번에도 역시 제비뽑기로 정해졌다.
하니엘은 맨 마지막으로 결정되었다.
여솜이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자신들의 순번에 대해 의문을 드러냈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어.”
관객들 입장에선 일곱 개의 무대를 쉼 없이, 연달아 봐야 하니까.
이렇게 따지면 오히려 마지막 무대가 안 좋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오늘 이연은 순서에 크게 연연하지 않기로 했다.
“무대 위에서 준비한 것들 제대로 보여주기만 하면 돼. 순서는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만 집중하자. 알았지?”
여솜을 포함해서 모든 멤버들이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녹화 시작을 알리는 스태프의 말과 동시에 멤버들은 서로를 바라보면서 옆에 있는 사람들의 손을 마주 잡았다.
드디어.
파이널 무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