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화
제66화. 여정의 끝자락(3)
걸파이트 시즌 2 파이널 미션 무대를 준비하기 위해 LC 엔터테인먼트의 핵심 인력들이 나섰다.
진세혁 프로듀서와 은서해 트레이너, 그리고 나현아 트레이너에 홍류현 실장, 마지막으로 오채일 대표까지.
물론 이번 회의의 주인공은 누가 뭐라고 해도 하니엘이었다.
회의 중에 권이연은 이들에게 재미있는 제안을 하나 건넸다.
“섞죠.”
“응?”
“뭐를?”
찐 프로와 은서해 트레이너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띄웠다.
이연의 짧은 말은 지나칠 정도로 많이 생략되어 있었다.
더 자세히 말해달라는 요구가 여기저기서 빗발쳤다.
그러자 이연은 리샤가 실제로 시켰던 딸기 쉐이크와 바나나 쉐이크를 자신의 앞에 나란히 세웠다.
“그건 왜?”
진세혁 프로듀서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연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 두 가지 음료를 섞으면 뭐가 될까요?”
“그야 딸기바나나 쉐이크가 되겠지. 달달한 게 땡길 때면 가끔씩 주문하는 음료이긴 한데.”
“음료 맛은 어떤가요?”
“맛있지. 저 딸기의 새콤한 맛하고 바나나의 달달한 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룬다고 해야 할까. 아, 말하다 보니까 침 나오네.”
진세혁 프로듀서의 구체적인 설명 덕분에 몇몇 사람들도 몰래 입맛을 다셨다.
이연의 설명을 듣던 와중에 나현아 트레이너가 ‘아!’ 하면서 짧은 감탄을 토해냈다.
“노래를 섞자고?”
“네.”
나현아 트레이너가 권이연의 퀴즈를 가장 먼저 맞힌 정답자가 되었다.
반면, 노래를 섞는다는 말에 진세혁 프로듀서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뭘 어떻게 섞자는 건지…… 전혀 감이 안 오는데?”
지금 이 말만으로는 아예 추측조차 할 수 없었다.
하니엘 멤버들도 이연이 어떤 아이디어를 떠올렸는지 궁금해 하고 있었다.
같은 차를 타고 오면서 대충 설명은 들었는데, 구체적인 건 말을 안 해줬기 때문이다.
어차피 회의실에 가서 다 같이 모여 있을 때 이야기할 건데. 굳이 입 아프게 또 말을 하기에는 너무 비효율적인 거 같아서였다.
그래서 멤버들은 회의가 어서 열리기만을 학수고대했었다.
이연이 그녀들의 마음속에 던진 수수께끼의 정체를 알아내고 싶어서.
“Tug of war 중간에 간주 파트 있잖아요. 줄넘기 안무 들어가는 부분.”
“그렇지.”
“거기에 HUG의 랩 파트를 좀 더 길게 늘여서 추가하고 싶어요. 비트는 트랩으로 해서요.”
“노래끼리 키가 안 맞을 텐데?”
“Tug of war 음계를 1키 올리면 됩니다. 그러면 어색함은 없을 거예요.”
댄스와 힙합.
잘 어울리는 요소이긴 하다.
이연은 이 힙합 파트를 더 강조하자는 쪽에 의견을 두고 있었다.
나현아 트레이너가 고개를 절로 끄덕였다.
“하긴 HUG 활동할 때 팬들 사이에서 랩 파트가 괜찮다고 호평이었으니까.”
이연이 말한 것을 그대로 응용하면, 같은 Tug of war지만 충분히 신선하고 다른 재미를 선사하는 곡이 될 수 있다.
가능성은 충분하다.
문제가 있다면.
“랩 파트는 시우 혼자서 다 맡을 거야? 그러기에는 너무 많은데.”
골고루 파트를 분배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너무 한 명한테 치중될 가능성이 있다.
이연의 생각은 이러했다.
“저하고 리샤가 나눠서 받으면 됩니다.”
리샤가 자신을 가리키면서 ‘나?’라고 되물었다.
그녀의 반응만 봐도 전혀 협의된 바가 없었음을 알 수 있었다.
리샤는 그렇다 치더라도.
진세혁 프로듀서는 이연도 같이 랩 파트를 분배받겠다는 말에 재차 의문을 드러냈다.
“보컬 파트는 어떻게 하려고?”
“그것도 같이할 수 있습니다.”
“결승 무대는 라이브인데. 괜찮겠어?”
체력이 걱정이었다.
이에 대해 이연은 강한 확신을 담아 답했다.
“네.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불가능할 것처럼 보였던 무대들을 여러 번 성공시킨 전적이 있었다.
권이연. 이 세 글자만 들어도 없던 믿음이 생길 정도였다.
걸파이트 시즌 2는 SSS 때와 다르다.
쟁쟁한 선배 걸그룹들과 붙어서 이기려면.
“이 정도 모험은 해야 우승할 수 있지 않을까요?”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모두의 시선이 오채일 대표에게 향했다.
그의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한번 해보자고. 어차피 우리는 잃을 게 없는 도전자들이니까.”
수장의 허가가 떨어진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 * *
진세혁 프로듀서는 이연이 바라는 대로 곡을 다시 믹싱하기로 했다.
레코딩도 마찬가지로 새로 진행하기로 합의를 봤다.
안무는 어떻게 해야 할까.
이에 대한 회의도 곧바로 이어졌다.
노래 콘셉트가 정해진 덕분인지, 안무에 관한 고민은 의외로 금방 해결되었다.
HUG의 안무를 약간 변형해서 삽입시키면 되지 않겠나. 이런 방향으로 수정하기로 했다.
이러면 멤버들이 안무를 익히는 속도도 빠를 테고.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내에 보다 효과적인 안무 연습을 하는 게 가능해진다.
처음에는 방향성을 잡기 힘들어서 꽤나 고생했었던 하니엘이지만, 한번 나아가야 할 목적지를 설정하고 나니까 이 이후부터는 거침이 없었다.
“원, 투, 쓰리, 포! 대열 바꾸고! 다시 원, 투, 쓰리, 포!”
은서해의 리드미컬한 박수 소리에 따라 멤버들은 그동안 익혔던 안무를 유감없이 뽐냈다.
Tug of war, 그리고 HUG 안무를 약간만 바꿔서 섞은 형태였기 때문에 이연의 예상대로 하루 만에 금방 합을 맞출 수 있게 되었다.
실수 빈도도 다른 경연 무대를 준비할 때보다 훨씬 적었다.
은서해도 멤버들이 선보인 퍼포먼스에 매우 만족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오늘은 비아도 실수 한 번 안 하고. 잘하는데?”
“쌤! 그렇게 말씀하시면 마치 저만 실수 많이 하는 사람처럼 보이잖아요.”
“사실인데, 뭘.”
“…….”
은서해의 팩트 폭행에 비아는 금세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준비 자체는 매우 수월하게 진행되어가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연은 안심할 생각이 없었다.
하니엘이 열심히 준비하는 만큼, 다른 그룹 역시 그 이상으로 무대를 준비하고 있을 테니까.
아이비제이 트윙클이나 MAYO는 원래부터 잘해왔던 팀이고.
원더존은 이번에 제대로 기세를 탄 덕분에 마지막에 1위 탈환을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이다.
샤이걸스와 CDP, 가을소녀 팀도 마찬가지다.
상위권 팀들과 다르게 지금까지는 약간씩 부진한 면들을 보였지만, 마지막이니까 모든 것을 쏟아부을 각오로 시간과 노력을 갈아넣고 있을 게 분명하다.
결승 무대까지 단 3일밖에 남지 않았다.
제작진도 파이널 미션 무대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이연은 수건으로 땀방울들을 빠르게 닦아냈다.
이미 연습을 마치기로 한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지만, 멤버들은 아직 숙소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이연이 먼저 나서서 그녀들에게 물었다.
“한 번 더 맞춰보고 갈까?”
멤버들은 이연의 이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 * *
파이널 미션이 바로 내일로 훌쩍 다가오게 되었다.
오늘 이연은 하니엘을 대표로 마지막 미션에 임하는 각오를 카메라에 담아 시청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해서 걸파이트 스튜디오를 찾았다.
이미 현장에는 이연보다 먼저 도착한 다른 그룹 리더들이 자리를 잡고 기다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막내 그룹인 만큼 이연이 먼저 나서서 그녀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미랑이 그녀의 인사를 받아주면서 자신의 옆에 비어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연이, 이쪽으로 와.”
많이 귀여워해 줄 테니까 얼른 언니한테 오라고 손짓했다.
몰래 한숨을 삼킨 이연은 무거운 발걸음을 억지로 떼면서 미랑의 옆에 앉았다.
의자끼리 너무 붙어 있는 거 같아서 일부러 거리를 벌려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자 미랑이 섭섭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뭐야. 언니하고 같이 붙어 있기 싫은 거야?”
“그러다가 옷에 화장 묻으면 큰일이니까요.”
게다가 미랑이 지금 입고 있는 옷은 화이트 컬러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주 조금만 화장이 묻어도 금세 티가 날 게 분명했다.
아쉬움에 혀를 차는 미랑.
그사이, 황 PD가 리더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와 인원을 체크했다.
“다들 모였죠? 아직 도착 안 한 팀?”
“없어요.”
7개 팀 리더들 전부 다 한 자리에 사이좋게 모여 있었다.
“그러면…… 가만있어 보자. 순번을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미랑이 번쩍 손을 들었다.
“먼저 하고 싶은 사람부터 하면 안 될까요?”
“오케이. 그러면 미랑 씨부터.”
“엑, 저요?”
“하고 싶어서 그런 말 한 거 아니에요?”
“그건…….”
옆에서 혜원이 작게 웃으면서 미랑에게 말했다.
“선배로서 먼저 멋있게 스타트 끊어줘.”
미랑이 짧게 혀를 차고선 마지못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미랑처럼 먼저 인터뷰를 끝내는 게 오히려 속 편할 수도 있다.
카메라 앞에 앉은 미랑이 무엇이든 물어보라는 것처럼 자신감이 넘치는 표정을 지었다.
참고로 그녀들에게 사전 질문지는 지급되지 않았다.
질문이 들어오면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답변을 해달라는 PD의 지시 사항만 있었을 뿐이었다.
난감한 대답을 해도 어차피 편집하면 되니까.
그래서인지 인터뷰 촬영에 임하는 리더들은 큰 부담감을 느끼지 않았다.
황이전 PD가 카메라 뒤에서 미랑에게 먼저 질문을 건넸다.
“프로그램 녹화 시작하기 전에 사람들 사이에서 강력한 우승 후보로 손꼽혔던 팀 중 하나가 아이비제이 트윙클, 그리고 미랑 씨가 속한 MAYO였잖아요. 미랑 씨도 알고 계시죠?”
“네. 물론이죠.”
“지금은 어떤가요? 여전히 미랑 씨 그룹과 아이비제이 트윙클 팀이 유력한 우승 후보라고 생각하시나요?”
지난 몇 달 동안 수많은 일이 있었다.
여러 번의 녹화를 통해 울고, 웃고. 그리고 춤추고, 노래하고.
많은 기회 속에서 미랑의 생각 역시 점점 달라져갔다.
“아니요. 저나 아이비제이 트윙클, 두 팀뿐만이 아니라 프로그램에 참가하는 일곱 개 팀 모두가 다 우승 후보라고 생각합니다.”
미랑의 대답을 들은 그룹 리더들은 순간 헛숨을 삼켰다.
모두가 다 우승 후보.
미랑의 이 말은 진심이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저는 저희 팀이 압도적인 차이로 계속 기세를 이어갈 줄 알았거든요. 경쟁 상대라고 해봤자 아까 PD님께서 말씀하셨던 아이비제이 트윙클 선배님들밖에 없다고 생각했고요. 그런데 녹화를 거칠 때마다 이런 제 생각이 잘못되었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미랑의 시선이 리더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향했다.
“모두가 다 충분히 우승하고도 남을 만한 팀들입니다. 다들 너무 잘하고. 시청자분들 사이에선 상위권, 하위권 팀 여론이 갈리고 있긴 한데, 제가 보기에는 그런 거 다 부질없게 느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결승 미션에서 누가, 어느 팀이 우승하든 ‘왜?’라는 의문보다 ‘모두 고생했어!’라는 말로 축하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평소의 미랑답지 않은 진지한 말에 리더들뿐만 아니라 스태프들 역시 잠시 말을 잊었다.
미랑의 인터뷰를 지켜보던 이연은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면서 멀리 했던 의자 간의 간격을 다시 좁혔다.
미랑이 모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