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8화
제64화. 글로벌 미션(3)
SSS에 출연했을 당시, 이연은 이런 식으로 투명화 버프를 이용해서 자신이 모르는 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에 대한 염탐을 자주 했었다.
그때는 진절혜하고 이석호 트레이너가 내통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러나 걸파이트 시즌 2에서는 딱히 이런 식의 번거로움은 필요치 않았다.
눈에 띌 만한 부정행각은 딱히 없었기 때문이었다.
오늘의 경우에는 혜원이 이연에게 흘려준 정보가 사실인지.
먼저 확인을 해보고 싶어서 오랜만에 투명화 마법을 사용하게 되었다.
모습만 보이지 않을 뿐, 이연이 내는 소리까지 완전히 감춘 상태는 아니었기에 주의해야 했다.
‘저쪽에 몰려 있나 보네.’
다수의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스태프들이 내는 그런 소란스러움과는 뭔가가 달랐다.
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걸음을 옮긴 이연은 자신들이 펼칠 무대가 있는 스튜디오에 도착했다.
객석에 앉아 있는 각양각색의 사람들.
백인, 흑인, 동양인.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면서 앞으로 펼쳐질 아이돌들의 무대에 대한 기대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영어, 일본어, 중국어보다도 더 많이 들리는 언어가 있었다.
바로 한국어였다.
“참가하는 팀 중에서 누가 제일 좋으십니까?”
“아이비제이! 미국 있을 때부터 그 팀 팬이었습니다.”
“전 MAYO 좋아합니다. 그쪽은요?”
“하니엘입니다.”
“아, 하니유(Honey, you)셨군요.”
하니엘의 팬클럽임을 자처하는 서양인을 보면서 중국 계통으로 보이는 동양인이 능숙한 한국어를 뽐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국적은 다를지라도 오늘 이곳에 모인 50인의 외국인 청중평가단은 현재 한국에서 거주 중이었다.
1, 2년 단기간 머무르는 사람들도 있지만, 5년 이상 한국에서 거주하고 있는 베테랑(?)도 많이 있었다.
서로 국적도, 언어도 다르다 보니 차라리 한국어로 말하는 게 더 의사소통이 잘 되는 편이었다.
그래서 이연의 귀에 한국어가 가장 많이 들릴 수밖에 없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개사 없이 한국어로 불렀어도 됐을 뻔했네.’
물론 한국어 이외의 언어로 반드시 개사해서 불러야 한다는 법칙 때문에 그러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이연도 잘 안다.
그냥 아쉬움이 남아서 해본 말이었다.
서양인의 비중이 많은 걸로 봐선.
‘영어를 고른 게 정답이었네.’
혜원의 말이 사실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오자, 의상을 갈아입은 우미가 이연에게 물었다.
“혹시 배 아파? 오래 걸렸네?”
“아니. 중간에 잠깐 다른 선배님들 만나서. 이야기 나누고 오느라 늦었어.”
“나는 또. 너 컨디션 안 좋을까 봐 걱정했네.”
컨디션 관리는 연예인의 필수 덕목 중 하나다.
경연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무대는 무대니까.
관객이 내국인이든 외국이든. 이연은 오늘도 최선을 다해 자신의 기량을 펼칠 생각이었다.
* * *
파이널 라운드라서 그런 걸까.
무대를 펼치기 전에 카메라를 든 스태프들이 각 팀의 대기실을 찾아 간단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전 미션 때에는 없던 과정이었기에 이런 촬영이 멤버들에게는 생소하게 느껴졌다.
메이크업과 헤어 스타일링, 착장까지 전부 마친 하니엘 멤버들은 카메라를 전면에 두고 2열로 나란히 섰다.
앞줄 가운데에는 이연이 위치했다.
황이전 PD가 멤버들에게 먼저 가벼운 질문을 던졌다.
“무대 준비는 어떤가요? 잘할 자신 있나요?”
“자신이야 늘 있죠.”
이연에게 이런 질문은 이젠 무의미하다고 봐도 된다.
누가, 어떻게 물어도 대답은 늘 한결같기 때문이었다.
“개사는 영어로 하셨죠?”
“네.”
“영어를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세계적으로 가장 많이 통용되는 게 영어라고 생각해서 고르게 되었습니다. 특히 가요계 쪽에서는 더 그렇다고 보고 있거든요.”
아이돌들의 노래에도 영어 가사는 상당히 많이 쓰인다.
부르는 가수나, 듣는 팬들이나. 영어가 친숙하다는 점도 선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황이전 PD가 마지막으로 멤버들에게 공통 질문을 건넸다.
“오늘은 어느 팀이 우승할 거 같나요? 본인들을 제외하고요.”
만약 이런 조건을 달지 않으면, 일곱 개 팀 모두가 다 우리가 우승할 거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래서 황 PD는 자신들을 제외한 다른 그룹들 중에서 우승 가능성이 높은 팀이 어디인지에 대해 물었다.
각 그룹의 생각이 궁금했기 때문이다.
하니엘 멤버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그러다가 최종적으로 모든 시선이 이연에게 쏠렸다.
리더가 대표로 대답해 달라는 뜻이었다.
마이크를 든 이연은 길게 고민할 것 없이 어느 한 팀을 지목했다.
“저희를 제외하고 생각한다면, MAYO 선배님들이 우승하실 거 같습니다.”
객관적으로 봐도 이번 글로벌 미션은 MAYO에게 상당히 유리하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내수 시장에서 강세라고 한다면, MAYO의 경우에는 해외 시장을 꽉 잡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외국인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아이비제이보다 MAYO를 더 높게 쳐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MAYO는 순수하게 영어로만 된 곡들도 많이 발표하곤 했었다.
해외 공연 경험도 일곱 개의 참가팀 중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편이고.
그만큼 많은 해외 팬들을 보유하고 있는 팀이다.
외국인 관객들을 상대로 펼치는 무대 노하우, 다수의 경험까지.
MAYO가 강력한 우승 후보로 언급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다.
이때, 비아가 황이전 PD에게 역으로 기습 질문을 가했다.
“선배님들은 어떻게 대답하셨나요?”
비아는 알고 있었다. 하니엘이 인터뷰 순서상 가장 마지막에 배치되었다는 사실을.
이곳에 오기 전에 황이전 PD와 스태프들은 이미 다른 걸그룹들과의 인터뷰를 마치고 온 상황이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선배들의 추측도 과연 하니엘과 동일할지에 대해서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다른 그룹의 인터뷰 내용은 말을 안 해주려고 하는 황 PD였지만.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하는 걸그룹들과 나름 오랜 시간 동안 같이 촬영을 이어나가온 정이 쌓여서 그런지, 비아의 기습 질문에 순순히 응해줬다.
“네. MAYO팀을 제외하고 전부 여러분들과 똑같이 대답했습니다.”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 * *
무대에 오를 순서는 이전처럼 리더들이 나와서 따로 제비뽑기를 통해 결정할 예정이었다.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MAYO의 리더, 미랑이 제비뽑기에 나섰다.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미랑의 표정이 변했다.
그녀가 보여준 숫자의 정체는.
1이었다.
“저희가 첫 번째네요.”
이연의 옆에 서 있던 채미가 장탄식을 흘리면서 ‘망했다’라고 혼잣말을 흘렸다.
혜원과 이연을 제외한 다른 리더들도 이와 같은 반응을 보였다.
안 그래도 MAYO는 모두가 우승 후보로 뽑고 있는 강팀이다.
이런 와중에 MAYO가 첫 타자로 나서서 무대의 기대치를 확 올려버리면. 그다음에 공연할 걸그룹들은 부담이 상당할 수밖에 없다.
MAYO가 첫 번째로 배치됨에 따라 우선적으로 피해야 할 숫자가 정해지게 되었다.
2. 두 번째 순번만큼은 무조건 피하는 게 좋다.
그러나 이연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가 맨 마지막에 뽑아야 했기 때문이다.
한 명씩 차례차례로 번호를 뽑았다.
후 순위 번호를 뽑은 리더들의 표정은 더할 나위 없이 밝아 보였다.
이제 남은 팀은 단 둘.
아이비제이, 그리고 하니엘이다.
그러나 이 두 팀의 전망은 그리 밝은 편이 아니었다.
남은 숫자들이 문제였다.
2, 아니면 3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운도 없네.’
이연은 속으로 혀를 찼다.
어느 쪽을 뽑든, 결말은 순탄치 않아 보였다.
그나마 2번은 피하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혜원이 3번을 뽑는 바람에 하니엘은 강제로 두 번째 순서가 배정되었다.
그래도 크게 절망할 필요는 없었다.
결국 순서보다는 무대를 얼마나 잘 꾸밀지. 이게 가장 중요하니까.
미랑도 이연과 같은 생각이라서 그런지 자신들의 바로 뒤에 하니엘이 위치하게 되었다는 사실에 큰 미안함을 느끼진 않았다.
하니엘은 어느 곳이든 본인들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는 팀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미랑은 이연에게 이런 말을 먼저 꺼냈다.
“오늘도 녹화, 재미있게 잘 해보자.”
“네, 선배님.”
두 사람이 짧게 눈웃음을 교환했다.
* * *
제비뽑기 순서대로 MAYO가 먼저 스테이지에 들어섰다.
그녀들을 보자마자 청중평가단 50인은 일제히 환호성을 질렀다.
첫 무대라는 걸 감안해도, 텐션이 굉장히 높아 보였다.
모니터를 통해 무대 위의 모습을 실시간으로 지켜보던 하니엘 멤버들은 표정이 바짝 굳었다.
그녀들이 얼마나 인상적인 무대를 보여줄지 굉장히 궁금하면서 긴장도 되었다.
MAYO가 선택한 곡은 해외 차트에서도 상당히 높은 순위를 유지했었던 ‘All day’였다.
말없이 무대를 보던 유키가 한숨을 삼키면서 말했다.
“치트키를 가져왔네요.”
MAYO 입장에서 ‘All day’를 픽한 건 당연한 선택이었다.
여긴 단순한 가요 프로그램이 아니니까.
경쟁을 기본으로 깔고 가는 경연 프로그램이다. 이기기 위해선 자신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공연을 펼쳐야 한다.
어중간하게 무대를 준비하면 아무것도 안 되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외국인 평가단의 호응은 최고조에 이르렀다.
심지어 ‘All day’라는 노래도 다 알고 있는 모양인지 중간에 가사를 따라 부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팬들이 자신들의 노래에 저렇게까지 반응을 해주면, 노래를 부르는 가수 입장에선 당연히 신이 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MAYO 멤버들도 이제껏 보여줬던 공연들 중에서 가장 신이 난 표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무대를 즐긴다. 이연은 그녀들을 보고 있자니 이 말이 절로 떠올랐다.
이연은 MAYO가 처음으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뜨거웠던 공연을 모두 마무리 지을 때쯤.
스태프가 하니엘의 대기실을 찾았다.
“다음, 하니엘 분들 무대 올라갈 준비해 주세요.”
그녀들의 차례가 돌아왔다.
MAYO가 워낙 인상에 남는 퍼포먼스를 보여준 탓에 멤버들의 걸음은 무거울 수밖에 없었다.
공연을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가 꺾이고 만 것이다.
그러자 이연이 멤버들의 등을 일일이 토닥여주면서 말했다.
“괜찮아. 벌써 주눅들 필요 없어. 오히려 우리한테도 유리한 점이 있으니까.”
“유리한 점?”
“그런 게 있어?”
이연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어. MAYO 선배님들의 무대는 외국인들한텐 익숙하잖아. 그런데 우리 무대는 많이 접해보지 못했을 테니까. 신선함으로 밀어붙이면, 우리한테도 충분히 승산은 있어.”
이연의 이론 덕분인지 멤버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지기 시작했다.
“연이 언니 말이 맞아.”
“그래. 우리도 해보자!”
“할 수 있다! 파이팅!”
기합을 넣는 멤버들을 보면서 이연은 작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신선함만으로는 승부에 큰 영향을 미치진 못할 것이다.
그럼에도 일부러 이걸 강조해서 말한 이유는 멤버들의 사기를 북돋워 주기 위함이 컸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건 이연이나 하니엘이나. 참가한 모든 그룹 전부 다 마찬가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