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8화
제57화. 시골 식당(5)
아침이 지나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좁은 식당 안에 사람들이 가득 차기 시작했다.
손님들이 많이 몰리는 시간대라고 하긴 했지만, 그걸 감안한다 할지라도 평소보다 지나치게 많이 몰렸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르신들을 잘 대하는 이연의 태도 덕분이었다.
정우재가 잠깐 숨 돌릴 틈을 가지는 우승현에게 작게 속삭였다.
“이연이에 대한 소문이 마을 주민분들 사이에 쫙 퍼졌나 봐요.”
“무슨 소문인데?”
“아까 서빙하면서 슬쩍 들었는데, 여기 엄청 예쁜 아가씨가 친절하게 서빙해 준다는 말 듣고 다들 이연이 보러 오셨다고 하더라고요.”
어쩐지.
그래서 유독 이연을 찾는 목소리가 많았다.
같이 홀을 담당하고 있는 정우재보다도 이연이 더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가릴 것 없이 이연을 보면서 너무 귀엽고 예쁘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게다가 어른들한테 잘 대하기까지 하니까 주민들 입장에선 이연이 복덩이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할머니는 이연한테 맛있는 거 사 먹으라면서 용돈도 주려고 했다.
“괜찮아요, 할머님. 이런 거 안 주셔도 돼요. 이 돈은 저 말고 할아버님하고 같이 외식할 때 쓰세요.”
“영감탱이 살날도 얼마 안 남았는데. 뭐 하러 돈 써.”
어르신들의 농담은 이연이 감당하기 버거울 정도로 매운맛이었다.
그래도 이연 덕분에 오랜만에 마을 전체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정신없이 바빴던 점심시간이 끝나고, 겨우 브레이크 타임을 가지게 되었다.
우승현이 양손으로 이연의 작은 어깨를 주물주물 안마해 주면서 말했다.
“나머지는 우리가 할 테니까 이연이는 가서 쉬고 있어.”
“아니에요, 선배님. 저도 도울게요.”
“괜찮아. 우리 중에서 네가 가장 고생했으니까. 밖에 가서 바람이라도 좀 쐬고 와.”
그렇다고 대선배의 말을 거역할 수 없었기에 이연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이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는 동안, 다른 출연자들은 식당 정리와 함께 저녁 음식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한 가지 걱정거리가 있었다.
“저녁에는 손님이 많이 안 오신다고 하셨죠?”
이은솔이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그의 물음에 우승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 점심때가 제일 많이 온다고 했으니까.”
“일 났네요. 이럴 줄 알았으면 어제 장 적당히 볼 걸 그랬어야 했는데…….”
아직 감이 안 잡히다 보니, 식재료를 너무 과다하게 준비했다.
점심시간 때가 피크라고 들었는데. 그럼에도 재료 소진까지는 아직 남은 양이 턱없이 많았다.
그렇다고 내일까지 재료를 보관해 둘 수는 없었다.
영미 식당의 주인 할머니의 신념이 바로 ‘매일매일 장 보고, 그걸로 음식을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잠시 가게를 맡은 만큼, 원래 주인의 신념과 철칙대로 식당을 운영하는 게 좋다.
그래야 할머니도, 그리고 마을 주민들도. 모두 다 만족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방송이라서 더더욱 할머니와의 약속을 지키고 싶었다.
여솜이 아이디어를 하나 냈다.
“다른 마을 주민분들한테도 저희가 식당 운영하고 있으니까 와 달라고 광고해 보는 건 어때요?”
“글쎄. 거리가 꽤 될 텐데. 여기까지 오려고 하실까?”
고령인 분들도 있다 보니 굳이 마을 너머에 있는 식당까지 발걸음을 하진 않을 것 같았다.
영미 식당 측에서 차량을 대여해서 단체로 옆 마을 주민들을 픽업한다면 모를까.
그러면 시골 식당이라는 느낌이 많이 희석된다.
자연스럽게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그런 공간이 되어야 하는데. 강제로 손님들을 데려와서 영업하는 꼴이 될 테니까.
방송이 나가면, 강매하고 뭐가 다르냐면서 불편러들이 등판할 게 뻔하다.
어려운 문제다.
괜찮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던 순간.
갑자기 이연이 식당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오며 물었다.
“혹시 아직 음식 준비되려면 멀었죠?”
“응? 왜?”
우승현이 출연자들을 대신해서 묻자, 이연이 난색을 드러내면서 말했다.
“근처에 관광 온 분들이 혹시 여기서 단체 식사 가능한지 물어봐서요.”
의외로 문제가 금방 해결되었다.
* * *
사건의 전말은 간단했다.
우승현의 말대로 이연은 잠시 식당 일을 뒤로하고 근처에 나와서 쉬고 있었다.
가볍게 스트레칭을 하면서 몸을 풀던 그녀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관광버스 쪽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이 근처에 관광지로 둘러볼 만한 곳이 있었나?’
이연이 알기론 없다.
물론 괜찮은 장소가 몇 군데 있긴 하다.
그러나 관광 명소와는 거리가 먼 장소들이었기에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없었다.
영미 식당을 지나친 관광버스가 사거리 쪽으로 쭉 직진하더니, 유턴해서 다시 이연이 있는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식당 옆에 있는 공터에 주차한 뒤, 차 문이 열리면서 등산복을 차려입은 40대 여성이 이연에게 다가와 물었다.
“혹시 여기 식당에서 일하시는 분이세요?”
“아, 네. 맞아요.”
“어머, 잘 됐다! 그러면 저희, 혹시 여기서 밥 먹어도 될까요? 마침 밥 먹으려고 식당 찾고 있었는데. 지나가다가 아가씨가 너무 예쁘기에 보다 보니까 뒤에 식당 간판이 보여서요. 운이 좋네.”
이연의 빛나는 미모가 그들을 식당으로 안내한 셈이었다.
다 좋은데, 미리 설명해야 할 게 있었다.
이연이 스태프를 불렀다.
방송으로 나갈 예정이라서, 촬영에 동의한다면 오셔서 식사해도 괜찮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들은 오히려 좋다는 반응을 보였다.
“놀러온 김에 추억도 쌓고, 좋지요!”
“살면서 우리가 언제 연예인처럼 방송에 나와 보겠어?”
“그렇고말고!”
에너지가 넘치는 사람들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미 식당은 생각지도 못한 손님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브레이크 타임이긴 했지만, 재료 소진 문제를 해결하는 게 더 급선무였기 때문에 출연자들은 쉬는 시간을 자진 반납하고 다시 일에 매진하기로 했다.
우승현이 앞치마를 두르고서 주방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연을 불렀다.
“이연아, 잘했어.”
“저는 그냥 밖에 서 있기만 했을 뿐인 걸요.”
“그래도 네 덕분에 저분들이 우리 식당 찾아내셨으니까.”
맞는 말이다.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 이연이 해결사 역할을 한 건 맞으니까.
가게 안은 또다시 손님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등산객들은 그제야 이연이 걸그룹으로 활동 중인 아이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어쩐지. 너무 예쁘더라!”
“사진 좀 찍어줄 수 있어요? 우리 딸아이들이 그…… 하니엘? 아가씨가 있다는 그 그룹 엄청 좋아하거든요.”
“네, 물론이죠. 여솜아. 잠깐 나와 봐.”
기왕 찍는 거, 여솜이까지 부르기로 했다.
하니엘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사람은 우승현이었다.
드라마에 워낙 자주 출연했기에 특히나 어머님들한테 인기 폭발이었다.
우승현이 출연한 작품뿐만 아니라 무슨 역할을 맡았는지까지 줄줄이 꿰차고 있는 어머님도 계실 정도였다.
“나중에 우리 친구들한테 자랑해야겠어!”
텐션이 가득 오른 어머님들을 보면서 우승현은 방긋 미소를 날려 보냈다.
이연과 여솜, 그리고 우승현. 여성 출연자들의 활약 덕분에 영미 식당은 성공적으로 단체 등산객들을 유치하는 데에 성공했다.
또 한 차례 폭풍 같은 시간이 흐르고.
잠깐 쉬는 시간을 이용해서 정산 타임을 가진 정우재가 너털웃음을 터뜨리면서 출연자들에게 말했다.
“오늘처럼만 계속 벌리면, 저희 부자 되겠는데요?”
“오늘이 특별한 날일 뿐이야, 형. 평소엔 안 그럴걸?”
이은솔의 지적에 정우재도 알고 있다면서 웃었다.
방송을 떠나서 장사가 잘 되니까 몸은 힘들어도 마음은 절로 행복해졌다.
이게 자영업자의 기분이구나 하는 것을 이연은 처음 깨닫게 되었다.
* * *
이튿날 아침.
오늘도 이연은 어제와 마찬가지로 러닝을 나서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오늘은 혼자가 아니었다.
“나도 같이 뛸게.”
어느새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이은솔이 이연과의 동행을 자처했다.
“피곤하진 않으세요?”
“어. 괜찮아. 전국 투어 다닐 때에는 어제보다 일정이 더 하드 했으니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연과 같이 사람들 눈치 안 보고 마음껏 아침 운동할 수 있는 기회는 이번밖에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이은솔은 일부러 이른 기상을 했다.
아이돌은 상당한 체력을 요하는 직업이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고. 이걸 계속해서 반복해야 했기에 자기 관리를 철저하게 해야 한다.
이은솔과 이연, 두 사람 다 이걸 알고 있다.
그래서인지 오랜 시간 뜀걸음을 지속해도 두 사람은 지친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어제처럼 카메라 감독과 스태프들만 죽어나갈 뿐이었다.
그들을 위해서 이연과 이은솔은 눈치껏 휴식을 취하기로 했다.
어제 이연이 멈춰 섰던, 바다가 잘 보이는 그 장소였다.
이은솔은 넓게 펼쳐진 바다 풍경을 바라보면서 두 팔을 활짝 펼쳤다.
“시원하고 좋네! 이 근처에 이런 명소가 있을 줄은 몰랐어.”
“저도 어제 뛰다가 발견했어요.”
“너하고 같이 운동 나오길 잘했네. 안 그랬으면 이런 곳도 평생 몰랐을 거잖아.”
“그러게요.”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웃었다.
바다 풍경을 만끽하는 것도 좋지만.
이제 돌아가서 식당 일을 준비해야 한다.
“슬슬 갈까?”
“네.”
해안가를 따라 다시 달리기 시작하는 두 사람.
이연보다 약간 뒤쪽에 서서 달리던 이은솔은 자신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다.
“예쁘네.”
이연이 살짝 뒤를 돌아보면서 물었다.
“바다요?”
이은솔은 대답 대신 의미심장한 미소만 지었다.
그의 눈에는 바다보다 더 예쁜 존재가 앞에 있었다.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카메라 앞이었기에 자중하기로 했다.
* * *
둘째 날에도 출연자들은 문제없이 하루를 마무리 지을 수 있었다.
마지막 셋째 날에는 아침에만 식당을 운영하고, 할머니에게 다시 가게를 돌려준 뒤에 촬영을 끝낼 예정이었다.
셋째 날 이른 아침에도 이연은 이은솔과 둘이서 아침 운동에 나섰다.
구슬땀을 흘리고 샤워를 마친 뒤에 마지막 출근을 서둘렀다.
마지막 날이라서 그런 걸까. 마을 주민들이 보고 싶어서 어떻게 하냐는 말로 아쉬움을 표현했다.
마을 주민들 한 명 한 명과 일일이 작별 인사를 나눈 출연자들은 3일 만에 다시 보게 된 영미 식당의 주인 할머니를 반갑게 맞이했다.
할머니는 이연의 손을 꼬옥 마주잡으면서 고맙다는 어투로 말했다.
“의사 선생님이 그러시더라고. 갑상선 쪽에 의심되는 혹이 하나 발견되었는데, 이거 조금만 늦게 발견했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아가씨 덕분에 살았어. 고마워.”
이연이 본 게 정확했다.
“다행이네요, 할머니. 수술 날짜는 정해졌나요?”
“좀 더 검사 받아보고, 그때 날 잡아보자고 하더라고. 의사 선생님도 신기해하셨어. 하늘이 도와준 거 같다고 그러시더라고.”
하늘까진 아니고.
잘 나갔던 음유시인 정도라고만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촬영 내내 하드 캐리를 한 것도 모자라서 할머니의 목숨까지 구해준 이연.
이번 시골 식당 해남편의 주인공은 권이연, 그녀가 차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