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7화
제57화. 시골 식당(4)
이연과 이은솔이 장보기를 마치고 다시 식당으로 돌아왔을 때, 여솜이 두 사람을 다급히 불렀다.
“선배님! 연아! 여기 와서 이것 좀 골라보세요.”
“이게 뭔데?”
“저희, 내일부터 여기 근처 주민분들에게 판매할 백반 메뉴 정하고 있었거든요. 뭐로 하면 좋을지 쉽게 의견이 안 좁혀져서요.”
방송은 총 3박 4일로 예정되어 있다.
그중 첫날인 오늘은 메뉴 선정과 앞으로 어떤 식으로 식당을 운영할지, 이런 것들을 정하고.
본격적인 장사는 내일부터 시작된다.
2박 3일간의 메뉴를 오직 출연자들끼리만 상의해서 정해야 하다 보니 고민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우승현이 식당에서 일해본 경험이 가장 많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메뉴 선정 일까지 맡아서 해본 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집 백반 메뉴는 날마다 달라지기 때문에 똑같은 음식을 정해서 팔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메뉴 선정이 더 힘들게 느껴지고 있었다.
아침과 점심, 그리고 저녁 메뉴들을 확인하던 이연은 약간 신경이 쓰일 만한 부분을 지적했다.
“둘째 날 아침 메뉴가 오전 식단치고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요. 육전하고 양념게장 대신에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반찬으로 대체하는 게 좋을 거 같은데요.”
우승현이 눈빛을 번뜩이면서 말했다.
“어머? 정말이네. 내 정신 좀 봐. 이 정도면 거의 저녁 식단 메뉴 수준인데. 이걸 못 보고 그냥 지나쳤네.”
처음 하는 일이니까. 그만큼 실수가 잦을 수밖에 없었다.
방금처럼 우승현이 눈치채지 못한 것을 이연이 알아차리는 경우가 종종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이렇게 여러 사람들이 힘을 모아야 한다.
“고마워, 이연아.”
“아니에요. 그거 말고는 크게 문제 될 게 없을 거 같아요. 선배님은요?”
너무 자기 혼자만 말한 거 같아서 이연은 일부러 이은솔에게 멘트를 넘겼다.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조금이라도 프로그램 내에서 자신의 비중을 늘릴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연의 세심한 배려를 이은솔이 그대로 놓칠 리 없었다.
“이건 어떨까요? 아까 저희 마트에 들렀다가 보니까 아이스크림하고 음료 같은 거 대량으로 세일해서 팔더라고요. 식사하러 오시는 손님분들한테 부식으로 하나씩 주면 좋아하실 거 같은데. 마침 사장님이 예전에 슈퍼 운영했다가 처분 못 하고 그대로 남겨뒀다는 아이스크림 냉장고 있지 않습니까.”
“맞아, 그랬지.”
“그거 활용하면 보관도 용이하고. 제가 보기엔 괜찮을 거 같은데.”
우승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는 찬성.”
“저도요.”
“저도 선배님 의견, 괜찮을 거 같아요.”
우승현에 이어 정우재와 여솜이 차례대로 동의를 표했다.
남은 사람은 이연뿐이었다.
“연이는?”
여솜이 묻자, 이연은 두말하면 잔소리라는 듯한 반응으로 답했다.
“나도 좋아.”
선배의 말이니까.
무조건 찬성이다.
* * *
숙소로 돌아오자마자 멤버들은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여자들 따로, 그리고 남자들 따로. 이렇게 두 개의 방으로 나눠서 취침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눈을 뜬 사람은 이연이었다.
가벼운 옷차림으로 집에서 나온 이연은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서 스트레칭으로 몸을 풀기 시작했다.
출연자들이 아직 단잠에 빠져 있는 이른 시간.
추 PD는 혼자서 운동 나갈 준비를 하는 이연에게 다시 한번 확인차 물었다.
“런닝하실 거라고 했죠?”
“네. 해안가 따라서 쭉 뛰고 오려고요. 거기가 뛰기 좋게 코스가 짜여 있더라고요.”
“부지런하시네요, 이연 씨. 시골 식당에 출연한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 부지런한 사람은 아마 강라은 씨 말고 이연 씨가 두 번째일 거예요.”
‘근무 중 이상 무!’ 여군 특집 때에도 강라은에 관한 일화를 몇 개 들은 적이 있었던 이연.
“선배님이 저하고 성향이나 스타일이 많이 비슷하신가 봐요. 나중에 꼭 뵙고 싶네요.”
“요즘은 잠시 방송 활동 쉬고 사업에만 매진하고 계시긴 한데.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만나실 수 있을 겁니다.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거든요.”
그건 이연도 잘 안다.
몸풀기를 전부 마친 이연은 곧장 앞을 향해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이제 막 해가 얼굴을 비추는 시간대였기 때문에 날씨는 제법 쌀쌀했다.
그래서인지 이연은 오히려 체온을 높이기 위해 몸을 더 움직였다.
등산이라든지 예능 추격전 등. 나름 산전수전 다 겪은 카메라 감독이 조깅하는 이연의 모습을 앵글에 담아내기 위해 출동했지만.
“헉, 헉…….”
숨이 턱 밑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체력에는 자신 있던 그조차 이연의 뒤를 따라잡는 게 버거울 정도였다.
아직 이연은 더 속도를 낼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스피드를 올렸다간 카메라 감독이 오늘 아침에 뭘 먹었는지 내용물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가 생겨 버릴지도 몰랐기에 여기서 잠시 멈추기로 했다.
제자리에 서서 발목을 돌리거나 기지개를 쭉 켜는 등의 행동으로 일부러 카메라 감독을 위해 시간을 끌었다.
카메라 감독은 그제야 살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왕 런닝을 멈춘 김에 이연은 넓게 펼쳐진 바닷가를 응시했다.
때라서 그런 걸까. 바다는 파란색이 아닌 약간의 붉은색으로 옷을 갈아입은 상태였다.
‘풍경 좋네.’
전생에서도 이런 비슷한 풍경을 본 적이 있었지만, 옛날 일이라서 그런지 그렇게까지 선명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눈앞에 있는 풍경에 잠시 시선을 빼앗기던 이연은 점점 불어오기 시작하는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다시 뜀걸음을 실시했다.
어제의 경우에는 바닷가에 서 있는 게 영 불편했지만, 지금은 운동 중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바닷바람이 부는 게 더 좋았다.
다시 숙소를 향해 뛰기 시작하는 그녀.
카메라 감독의 미간에 주름이 생기는 건 덤이었다.
* * *
운동을 마치고 샤워까지 끝낸 이연은 드라이기를 들고 이동하다가 이제 막 일어난 이은솔과 딱 마주치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벌써 샤워했어? 몇 시에 일어난 거야?”
“새벽 6시쯤에요.”
“진짜?”
“네. 운동 마치고 와서 바로 샤워한 거예요.”
일찍 일어난 것도 대단한데. 여기에 운동까지 하고 왔다고 하니까 이은솔은 믿을 수가 없었다.
“내일도 하려고?”
“네.”
“……그래?”
이은솔의 머릿속에 어떤 아이디어가 하나 스쳤다.
이 생각을 말하려고 하던 찰나에 두 사람에 이어 세 번째로 눈을 뜬 우승현이 인사를 건넸다.
“잘 잤니?”
“일어나셨어요, 선배님?”
“좋은 아침이에요.”
씻고 바로 식당 가서 아침 식사 준비를 해야 한다.
부지런히 움직여야 했기에 눈을 뜬 사람들은 각자 다른 화장실에 들어가서 외출 준비를 서둘렀다.
화장을 모두 마친 이연은 가장 먼저 차에 올라탔다.
오늘의 운전기사는 정우재로 결정되었다.
다른 출연자들까지 다 탑승하고 난 뒤에 정우재는 ‘출발하겠습니다’라는 말과 함께 차를 몰아갔다.
시골이라서 그런지 아침에도 불구하고 교통량이 많지 않았다.
지나가는 차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주방 팀은 바로 음식 준비에 착수했다.
이연과 정우재는 홀 담당이었기 때문에 청소에만 집중했다.
정우재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오늘은 개미 새끼 한 마리도 안 보이네. 이상하다.”
주변에 논, 밭밖에 없는 시골이라서 벌레 몇 마리는 들어와 있을 줄 알았는데.
전혀 보이지 않았다.
이연이 어제 시간을 할애하면서 새겨둔 해충 박멸 마법진의 힘 덕분이었다.
이런 속사정을 정우재가 알 리 없었다.
한편, 이연은 자신의 마법진이 보여준 효능에 매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였다.
‘성능 확실하네.’
어제의 노력이 빛을 본 셈이었다.
* * *
음식 준비가 모두 끝나갈 무렵.
우승현은 어제 할머니한테서 인수인계받았던 내용 중에 하루 가게를 찾는 손님들의 평균 숫자를 살폈다.
“이연아. 아침에 일곱 분 정도 오신다고 했지?”
“네, 맞아요.”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많은 순서대로 정리해 보면 아침, 저녁, 그리고 점심이다.
작은 규모의 시골 마을인 데다가 젊은 사람은 많이 없는 곳이기 때문에 식당은 주로 단골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다.
단골이 없으면 이 식당도 운영이 불가능하다.
오전 8시 반쯤 되었을 때.
첫 손님이 식당을 찾았다.
“어서 오세요!”
“영미 식당입니다!”
매번 들리던 할머니의 인사말 대신 기운이 넘치는 젊은 남녀의 목소리에 어르신 부부는 깜짝 놀라는 반응을 보였다.
“영미 할미는?”
이연이 직접 설명에 나섰다.
“아프다고 잠깐 요양 중이세요.”
그리고 곳곳에 설치된 카메라를 가리키면서 현재 방송 촬영 중이라는 것도 슬쩍 어필했다.
마을 주민들에게도 방송에 관한 내용이 한 차례 안내된 적 있었다.
그러나 모든 마을 주민들에게 직접 이 내용들이 전달된 건 아니었다.
영미 식당에 어떠한 마법이 벌어졌는지, 아직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첫 손님 역시 이런 경우에 속했다.
“자리 안내해 드릴게요. 이쪽으로 오시면 돼요.”
이연이 웃으면서 안내를 자처했다.
그녀의 미소에 홀린 듯 어르신 부부는 이연이 안내한 자리에 얌전히 착석했다.
“메뉴는 따로 없고, 백반으로 해서 아침 식단 세팅해 드리고 있는데. 괜찮으시죠?”
“옛날부터 쭉 그래왔으니까. 그렇게 줘요.”
“네, 알겠습니다.”
이연이 정우재에게 눈짓을 보냈다.
대기하고 있던 정우재가 주방을 향해 ‘백반 둘이요!’라고 기운차게 외쳤다.
주방을 담당하는 출연자들이 열심히 음식 준비를 서두르는 동안, 이연은 어르신 부부 앞에 물과 식기, 그리고 기타 필요한 것들을 직접 가져다줬다.
“혹시 더 필요하신 거 있으면 언제든 말씀해 주세요.”
“그럼…… 혹시 소주도 있나?”
할아버지의 부탁을 듣자마자 할머니의 잔소리 폭탄이 쏟아졌다.
“이 영감탱이가. 아침부터 뭔 놈의 술이야, 술! 아휴, 됐어요. 아가씨, 소주 필요 없으니까 술 주지 마세요.”
술이 있긴 하지만, 할머니가 워낙 강경하게 말하는 탓에 이연은 아내 쪽 말에 따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방 쪽에 설치되어 있는 작은 종이 ‘띵!’ 소리를 냈다.
음식이 나왔음을 알리는 일종의 신호 같은 거였다.
이연과 정우재가 각각 하나씩 쟁반을 들고서 어르신들 앞에 음식들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콩자반 좋아하신다고 들어서요. 그래서 저희가 직접 만든 거예요. 드셔보시고 어떤지 솔직하게 말씀해 주셔도 돼요.”
가게를 찾는 손님들이 정해져 있다 보니 어떤 음식들을 선호하는지에 대한 데이터도 가득 쌓여 있었다.
이연의 설명대로 할머니는 가장 먼저 콩자반 쪽으로 숟가락을 뻗었다.
달달한 콩자반의 양념이 입안 가득 퍼지자, 할머니의 표정이 금세 미소로 물들었다.
“맛있네.”
“입맛에 맞으셔서 다행이에요. 오징어 젓갈도 있는데, 이것도 한번 드셔보세요. 제가 먹기 좋게 덜어드릴게요.”
“고마워, 아가씨.”
이연의 이런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던 정우재가 이은솔을 불렀다.
“연이가 진짜 어르신들한테 잘하네.”
“그러게. 저런 면이 있는 줄 몰랐어.”
그녀의 유교 사상이 이럴 때 빛을 보게 될 줄은 예상 못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