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화
제56화. 치열한 승부(3)
리허설 때 그대로 각자의 자리에 위치한 하니엘 멤버들.
일곱 명이 전부 다 똑바로 선 채 고개만 아래쪽으로 푹 숙인 자세를 취했다.
심사위원들은 하니엘이 어떤 무대를 준비해 왔을지, 지금 단계에서는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일관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조명들이 번쩍이기 시작했다.
먼저 시선을 사로잡는 조명 빛에 이어서 멤버들이 고개를 들고 지난 몇 주 동안 연습했던 안무 동작을 취했다.
이번 공연은 하니엘이 걸파이트 시즌 2 무대를 준비하면서 가장 격한 안무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연이야 어떤 안무든 소화가 가능한 만능형 아이돌이기 때문에 준비하는 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SSS 때 이후로 오랜만에 힘이 잔뜩 들어가는 안무를 연습해서 그런지 처음에는 많이 헤매는 모습을 보였다.
그래도 연습생 시절 때와 지금의 그녀들은 엄연히 달랐다.
한번 감을 잡기 시작하더니, 지금은 별다른 무리 없이 서로 호흡을 맞춰갈 수 있었다.
댄스만큼 보컬 역시 중요하다.
노래의 첫 소절을 담당한 사람은 이연이었다.
오랫동안 생각했어.
너와의 이별을.
가까웠던 우리 사이.
이제는 recede 돌이킬 수 없어.
카메라를 뚫어버릴 것만 같은 눈빛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이연.
그녀는 걸파이트 참가 멤버 중 가장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여성 아이돌로도 인정받고 있다.
그런 이연이 제대로 각 잡고 시선을 날카롭게 표현하니까 보는 이들은 숨이 턱 막힐 정도였다.
하니엘의 무대 중 대부분은 이렇게 이연이 사람들의 시선을 확 사로잡은 다음부터 시작이었다.
오늘 심사위원석에 앉은 전문가들은 이연의 무대를 라이브로 여럿 봐 왔었다.
SSS에서도 본 적 있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이연 씨 무대는 나날이 갈수록 진화하고 있네요.”
“이제는 신인이라는 딱지 완전히 떼버려도 될 거 같은데?”
아직 무대가 끝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사위원들은 벌써부터 긍정적인 의견을 드러냈다.
그러나 아직 하이라이트가 남아 있다.
1절 후렴구 파트가 끝나고.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같이 무대를 꾸몄던 강의찬과 같이, 이은솔도 중간에 등장해 하니엘의 지원 사격에 나섰다.
다시 내게 기회를 줘.
나를 look back 돌아봐 줘.
아직 끝나지 않았어.
너와 나 사이.
이은솔과 이연이 마치 멀어져가는 인연 사이를 연기하듯 마주 보다가 이내 각기 다른 방향으로 서로를 등졌다.
이처럼 중간마다 가사를 녹여낸 듯한 연기가 더해지니, 라이브 무대를 보는 맛이 더 풍부하게 느껴졌다.
이연의 마지막 파트가 끝나고. 모든 조명들이 가운데에 모여 엔딩 포즈를 취하는 하니엘 멤버들과 이은솔을 비췄다.
두 사람의 합동 무대에 심사위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짝짝짝! 하는 박수 소리가 한동안 계속 이어졌다.
역시 믿고 보는 하니엘.
그리고 여기에 믿고 보는 이은솔이 더해지니, 놓치면 평생 후회할 무대가 완성되었다.
민주린이 다시 무대로 복귀하면서 심사위원들을 가리켰다.
“지금까지 봤던 심사위원분들 반응 중에서 가장 열띤 호응을 보여주신 거 같은데요. 오용하 프로듀서님부터 이번 무대, 어떻게 보셨는지 말씀해주세요.”
“우선 너무 좋았습니다. 이 곡이 원래 이별을 고민하는 남자와 여자의 심정을 담은 노래인데, 이렇게 흥이 날 줄은 몰랐어요. 아주 좋았습니다. 그리고 원곡에서 느꼈던 약간의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던 무대여서 더 좋았고요. 특히 이연 씨.”
오용하 프로듀서가 이연을 지목했다.
“작년에 모 프로그램에서 라이브 무대를 봤었는데, 그때도 제가 심사위원 자격으로 이연 씨하고 연습생분들 무대를 평가했잖아요.”
이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네’라고 짧게 답했다.
“그때에 비해서 표정 연기가 엄청 좋아지셨네요. 감정 표현이 굉장히 풍부해졌어요.”
“감사합니다.”
작년에는 성별이 바뀐 것 때문에 사랑하는 이와의 이별에 아파하는 여자의 감정을 연기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여자의 몸에 점점 적응해 간 덕분에 지금은 많이 발전할 수 있었다.
여성의 사고방식을 점점 이해하기 시작했다고 해야 할까.
물론 아직도 어색한 느낌이 많이 들긴 한다.
그래도 오용하 프로듀서가 말했듯이, 이전에 비해서는 확실히 많이 자연스러워졌다.
다른 심사위원들에게도 호평이 계속 이어졌다.
성공적으로 무대를 마무리 지은 하니엘 팀.
긴장이 풀려서인지 대기실로 돌아와서 소파에 앉은 이연은 작게 하품을 했다.
이은솔이 그녀의 옆에 앉아서 물로 마른 목을 달랬다.
“많이 피곤한가 보네.”
“잠을 별로 못 잤거든요.”
연습생 시절 때에는 SSS에 출연해서 보여줄 방송 무대만 준비하면 됐었는데.
걸파이트는 다른 방송 스케줄을 소화하면서 틈이 날 때마다 연습을 해야 했기에 피곤함이 배가 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이번 곡은 이연이 맡은 파트가 많았다.
그녀가 무너지면 팀 전체가 무너진다.
이런 부담감 때문에 무리를 해가면서 준비를 했더니 그 여파가 이제야 밀려오게 된 거였다.
“피곤하면 한숨 자. 어차피 점수 매기고 순위 정해지기 전까지 시간 좀 남았으니까.”
“……네, 선배님.”
다시 한번 작게 하품을 한 이연은 스르르 눈을 감았다.
이은솔은 그녀가 소파에 누워서 편하게 잘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주려고 했었다.
그전에 이연의 머리가 먼저 이은솔의 한쪽 어깨에 맞닿았다.
그에게 기대서 잠이 들어버린 탓에 이은솔은 옴짝달싹할 수 없는 입장이 되어버렸다.
바로 옆에서 들리는 그녀의 작은 숨소리.
방금 전에 이은솔은 이연의 옆에 앉아서 물을 여러 모금 들이켰었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목이 다시 바짝 타는 느낌이 들었다.
* * *
오늘 준비된 모든 경연 무대가 끝났다.
이제 남은 건 순위발표뿐.
2라운드의 첫 승자를 가리는 자리이기 때문에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게스트를 제외하고, 원래대로 각 팀의 멤버들만 한자리에 모였다.
순위를 발표하기 전에, 민주린은 먼저 그녀들에게 바쁜 와중에도 무대를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다는 말을 먼저 건넸다.
“다들 컴백 일정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을 텐데. 그런데도 퀄리티 높은 무대를 보여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서로에게 고생했다고 한 번씩 박수 보내볼까요?”
“네!”
아이돌들은 마치 선생님의 말을 잘 따르는 어린 학생들처럼 기운차게 대답하면서 고생한 선후배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에게 박수를 보냈다.
모두가 열심히 노력했지만, 모두가 다 1위가 될 수는 없다.
걸파이트에 참여 중인 아이돌들은 이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럼 먼저 7위부터 발표하겠습니다.”
하위권부터 순서대로 공개되었다.
7위는 가을소녀. 보이그룹 원 스텝과 좋은 화합을 보여주긴 했지만, 결과는 냉정했다.
다 합해서 24명이나 되는 멤버들이 한 무대에 올라서니까, 어느 한 곳에 집중할 수가 없었고 난잡했다는 치명적인 단점을 보였다.
이것이 그녀들에게 7위라는 결과를 가져다주게 되었다.
차라리 원 스텝이 아닌, 아이비제이 트윙클이나 하니엘처럼 한 명의 존재감 있는 게스트를 데려왔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이런 아쉬움이 많이 남았다.
6위는 CDP, 5위는 원더존.
그리고 4위의 정체가 의외였다.
“MAYO 팀입니다.”
미국에서도 나름 인지도가 있는 인기 팝 가수를 데려왔지만, 그런 것치고는 무대가 좀 엉성했다.
두 팀의 컬러가 너무 강하다 보니까 서로 조화가 잘 안 된다는 감평이 뒤따랐다.
그래서 심사위원들은 MAYO에게 비교적 낮은 점수를 줬다.
이연도 직접적으로 말만 안 했을 뿐이지, 무대를 보면서 심사위원들과 같은 생각이 들었다.
MAYO 본인들도 큰 불만은 없었다.
자기 무대는 자기가 더 잘 아는 법이니까. 그래서 오히려 4위라는 것만으로도 다행으로 여기는 반응이었다.
“다음 순위 발표를 할 텐데요. 공교롭게도 3위는 없고 공동 2위가 탄생했네요.”
점수가 동일하다는 뜻이었다.
공동 2위 팀이 발표되면, 1위의 정체는 자연스럽게 공개될 것이다.
물론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민주린은 순서를 바꿔서 1위부터 먼저 발표하겠다고 말했다.
모두의 이목이 아직 호명되지 않은 세 팀에게 쏠렸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하니엘.
그리고 샤이걸스.
“아이비제이 선배님들이 1위인가 본데.”
“아니면 하니엘 후배님들이 1위 했을 수도 있어.”
전통강자와 신흥강자. 둘 중 한 팀이 1위가 아닐까.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여기서 이변이 발생했다.
[1위. 샤이걸스]
“……?”
“샤, 샤이걸스요?”
모두가 패닉 상태에 빠졌다.
샤이걸스가 1위를 차지함으로 인해 공동 2위 팀은 아이비제이 트윙클, 그리고 하니엘로 결정되었다.
샤이걸스 멤버들조차도 자신들이 1위를 했다는 사실을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다.
멍한 표정으로 화면을 바라보고 있을 때, 민주린이 그녀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면서 말했다.
“1위를 차지한 소감 한번 들어볼까요.”
“저, 저희가 정말로…… 1등이에요?”
“네.”
“진짜요? 혹시 계산이 잘못됐다든지…….”
“제작진이 심사위원님들한테 여러 차례 확인했어요. 샤이걸스 여러분들이 1등 맞습니다.”
샤이걸스 멤버들의 눈가에 뜨거운 눈물방울들이 맺혔다.
그녀들은 여태껏 단 한 번도 1위를 차지해 본 적이 없었다.
1위뿐만 아니라 상위권에 드는 일조차 매번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랬던 그녀들이 처음으로 1위 자리에 올라서게 되었으니.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샤이걸스의 앤서가 리더답게 겨우 감정을 추스르면서 마이크를 들었다.
“정말…… 감사합니다. 사실 이번에 무대 준비하면서 멤버들도 그렇고, 저도 그렇고. 너무 걱정을 많이 했었거든요. 저희가 걸어온 이 길이, 그리고 앞으로 계속 추구할 이 길이 혹시 정답과 먼 선택지가 아니었을까 하는…… 그런 불안감이 이번에 유독 심하게 들었던 거 같아요.”
그 기분이 어떤지, 이연도 잘 안다.
샤이걸스는 요즘 아이돌답지 않은 독특한 콘셉트를 지닌 그룹이다.
좋게 말하면 개성 있는 그룹이지만.
나쁘게 말하면 대세를 따르지 않는, 마니아틱한 성향만을 보여주는 그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자신들이 고른 결정을 지금까지도 계속 추구해 왔다.
그녀들의 노래를 좋아하는 팬들이 분명 있을 텐데. 그들의 마음을 배신하고 팀 컬러를 버리면서까지 가수 활동을 하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샤이걸스는 걸파이트에 참가하면서도 이런 각오를 다졌다.
“상위권에 들지 못하고, 좋은 성적을 못 내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우리만의 무대를 보여주자, 멤버들하고 이렇게 다짐했었어요. 그래서 오늘의 1위가 저희에게는 너무나도 소중한 보상이 된 거 같아 기뻐요. 정말로…… 정말로 감사합니다!”
참가한 아이돌뿐만 아니라 화면 밖에 있는 스태프들한테도 허리를 꾸벅 숙이면서 인사하는 샤이걸스 멤버들.
무대에 정해진 정답 같은 건 없다.
자신이 만족하고, 자신이 원했던 거라면, 다른 사람한테는 몰라도 스스로한테는 그 무대가 정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이 이연이 바라는 ‘완벽한 무대’의 실체이기도 하다.
어쩌면 샤이걸스는 이연처럼 자신들이 원했던 완벽한 무대를 찾아낸 것일지도 모른다.
‘나도 더 노력해야겠네.’
이연의 결심이 더욱 굳건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