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화
제56화. 치열한 승부(2)
이전처럼 무대 순서를 정하기 위해 이번에도 리더들이 한자리에 모이게 되었다.
평소였더라면 크게 다를 것 없는 과정처럼 느꼈을 이연이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
어디선가 뜨거운 시선이 감지되었다.
아까부터 자신을 쳐다보는 누군가가 있다.
고개를 돌리자, 범인으로 추정되는 여성이 황급히 다른 곳으로 시선을 넘겼다.
혜원이 갑작스럽게 바로 옆에 서 있던 가을소녀 초영에게 말을 붙였다.
“여, 연습은 잘했니?”
“연습이요? 네, 선배님. 열심히는 했는데,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모르겠어요.”
“잘될 거야. 너무 긴장하지 말고. 연습했던 때만큼만 하면 돼. 알았지?”
“감사합니다, 선배님!”
후배에게 조언을 해주는 척 연기하는 혜원이었지만, 이연의 눈썰미를 피하기에는 늦었다.
‘우리가 같은 벡스 멤버를 게스트로 초빙한 게 굉장히 신경쓰이나 보네.’
다 같이 모여서 각자 어느 팀에서 어떤 게스트들을 섭외했는지 소개할 때부터 혜원은 줄곧 하니엘을 신경 쓰는 모습을 보였다.
눈치 빠른 이연이 이걸 알아차리지 못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게스트란 존재는 상당히 중요하다. 예능이나 라디오, 기타 쇼 프로그램의 경우에는 때때론 게스트가 시청률 견인 역할을 톡톡히 할 때도 있으니까.
걸파이트 같은 경연 프로그램도 이와 비슷하다.
누구를 데리고 같이 무대를 꾸미느냐. 여기에서 희비가 엇갈린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입장에선 최고의 용병 카드를 뽑았다고 생각했을 테지만, 그건 하니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혜원은 여태껏 본 적 없을 만큼 하니엘을 견제하고 있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은 이번에도 1라운드 때 보여준 것처럼 안정적으로 1차 미션 1위를 달성하고, 베네핏을 확보한 다음에 마음 편히 2차 미션을 준비하려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안 놔두지.’
이연의 한쪽 입꼬리가 살짝 위로 향했다.
이번에는 어림도 없었다.
그렇게 두 여자가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벌이고 있을 무렵, 조연출이 각 그룹의 리더들을 불렀다.
“와서 아이비제이 트윙클부터 데뷔 연도에 따라 차례대로 번호 뽑아주시면 됩니다.”
“네!”
혜원이 먼저 숫자를 뽑았다.
1번.
맨 첫 번째 무대가 걸렸다.
하니엘의 경우에는 가장 마지막 무대인 7번에 당첨되었다.
다른 그룹 멤버들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번 2라운드 1차 미션의 처음과 끝을 벡스 선배님들이 맡게 되었네요.”
“어머, 생각해 보니까 그러네.”
우연의 일치일까.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었다.
* * *
2라운드 1차 미션, 대망의 첫 무대.
모니터를 바라보던 리샤가 쓴 미소를 머금으면서 자신의 생각을 슬쩍 비쳤다.
“시작부터 어마어마한 분들이 올라서네.”
아이비제이, 그리고 벡스.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나간다는 걸 그룹과 보이 그룹의 연합 무대를 두 눈으로 보게 될 줄은 멤버들조차 몰랐다.
연말대상 시상식이라든지. 이럴 때나 한 번 볼까 말까 한 조합이 현실로 이루어지게 되었는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선곡도 상당히 유명한 곡이었다.
“은미 선배님하고 태정 선배님이 불렀던 곡이었지?”
“응. ‘Give you’라고 들었어.”
요즘은 남녀 혼합 유닛을 찾아보기가 힘들다.
‘Give you’는 각 그룹에 속한 아이돌 둘이 뭉친 일회성 유닛 곡임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유의미한 성적을 거뒀다.
5주 연속 음원 차트 1위!
4년 전의 일이지만, ‘Give you’ 노래를 찾아 듣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을 정도로 인기가 많은 히트곡이다.
유명한 노래를, 유명한 아이돌들이 부른다니까 관심이 안 갈래야 안 갈 수가 없었다.
이연도 궁금했다.
과연 혜원이 이번에는 어떤 무기를 들고나왔을지.
무대가 준비되는 와중에 유키가 이은솔에게 물었다.
“선배님은 무대 연습하시는 거 보셨다고 했었죠?”
“어. 혜원이하고 지현이, 미수가 우리 회사에서 와서 연습했었거든. 지나가면서 몇 번 봤는데…….”
잠시 말을 아끼던 이은솔이 다시 입을 열었다.
“잘해. 보면서 나도 몇 번이나 놀랐는지 모를 정도였으니까.”
이은솔과 같은 그룹인 강의찬이야 실력으로 깔 만한 게 없다.
이미 세계적인 보이 그룹의 멤버니까.
이은솔이 놀랐던 건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의 성장이었다.
아이비제이가 막 데뷔했을 때부터 봐왔던 이은솔이다 보니,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하니엘이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실력이 매우 출중한 걸 그룹이라는 건 이은솔도 잘 안다.
그러나 이번에는 다르다.
“긴장 많이 해둬. 조금 있다가 무대 보면 알겠지만, 오늘의 아이비제이 트윙클은 각오 단단히 하고 왔으니까.”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한 이래로 이렇게까지 각 잡고 무대를 준비한 적은 없었다.
이연은 모니터 너머로 보이는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의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조명이 모두 꺼지고.
거친 드럼 소리와 함께 ‘Give you’ 전주가 펼쳐졌다.
처음부터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은 화려한 퍼포먼스로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백댄서들까지 있어서 그런지 무대가 꽉 들어찬 느낌을 줬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강점은 이런 퍼포먼스뿐만이 아니다.
라이브 실력도 만만치 않다.
아이비제이 메인 보컬인 미수가 속해 있어서 그런지 안정적인 라이브를 뽐냈다.
그렇다고 혜원과 지현이 미수에 비해서 라이브 실력이 부족한가? 그건 아니다.
지현은 그렇다 치더라도. 혜원의 경우에는 웬만한 걸 그룹 메인 보컬들보다도 뛰어난 라이브 실력을 지니고 있다.
실제로 미수가 목 상태가 좋지 않을 때, 혜원이 대신 메인 보컬을 맡아서 무대를 소화한 적 있었다.
퍼포먼스, 비주얼, 그리고 보컬까지.
그녀는 만능이다.
그런 혜원이, 점점 이연과 하니엘을 신경 쓰기 시작했다.
그 어느 때보다도 열심히 무대를 소화하는 혜원을 보면서 이연의 머릿속에 여러 가지 생각들이 교차했다.
간주 부분에 접어들었을 때.
무대 뒤쪽이 좌, 우 방향으로 열리면서 강의찬이 모습을 드러냈다.
최고의 그룹들의 만남.
그들이 펼치는 무대 역시 최고일 수밖에 없다.
이연은 SSS에 출연할 당시, 벡스 멤버들이 펼쳤던 무대를 볼 때의 기분을 오랜만에 느꼈다.
이연은 자신이 원하는 ‘완벽한 무대’를 완성시키기 위해 이곳에 왔다.
처음에는 벡스가 여기에 가장 가까운 그룹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에 약간의 지각 변동이 발생했다.
‘저 조합으로 선보이는 무대도 괜찮네.’
강의찬이라는 이름의 지원군까지 가세하니, 무대의 흥이 두 단계 상승했다.
심사 위원들조차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그러나 영원한 무대는 없는 법이다.
아쉬움을 뒤로한 채,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강의찬은 정면을 향해 엔딩 포즈를 취했다.
심사 위원들의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어떤 심사 위원은 ‘앙코르! 앙코르!’를 외칠 정도였다.
하니엘 멤버들도 박수를 치면서 선배님들에 대한 예우를 표했다.
“역시 선배님들이셔.”
“넋 놓고 보게 되네.”
“근데 이전하고는 확실히 분위기가 다른 거 같아. 뭐라고 해야 되나…….”
우미가 어떤 단어로 표현할지 갈팡질팡하는 동안, 이연이 먼저 해답을 제시했다.
“독기?”
“맞아, 그거. 독기가 느껴지더라고.”
늘 여유로움으로 일관하던 아이비제이 트윙클치고는 상당한 심경의 변화였다.
오히려 이연은 그녀들의 태도가 달라졌다는 사실이 더 좋았다.
‘이제야 싸워볼 만해졌네.’
상대가 강할수록 이연은 더욱 불타오르는 남자(지금은 여자)다.
최고의 무대였다면서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강의찬의 조합을 칭찬하고 또 칭찬하는 심사 위원들을 보면서 이연은 다짐했다.
오늘도 이기고 돌아가겠다고.
* * *
원더존, CDP, 가을소녀, 그리고 MAYO의 무대를 거쳐 이연이 눈여겨보고 있는 걸 그룹 중 한 곳인 샤이걸스의 무대가 시작되었다.
하니엘의 바로 앞 순서라는 것도 있지만.
이전부터 샤이걸스가 무대 위에서 보여준 독특한 시도들은 이연의 관심을 늘 사로잡았다.
‘설마 게스트로 피아니스트를 섭외할 줄은 몰랐지.’
뭔가 참신한 듯하면서도 은근히 계산적인 전략을 자주 펼치는 샤이걸스.
1라운드 때에는 이런 전략들이 ‘시도는 좋았다’ 정도로만 그쳤는데.
과연 2라운드에서는 어떨까.
무대를 지켜보던 하니엘 멤버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자, 잠깐만! 앤서 선배님, 바이올린도 켜실 줄 알아?”
그냥 연주하는 척만 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저것조차 라이브였다.
“우와…….”
“미쳤다, 미쳤어.”
“앤서 선배님, 못하는 게 없으시네.”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앤서가 황채린 피아니스트와 함께 합주를 시작했다.
전주가 끝나자마자.
반전이 일어났다.
갑자기 앤서가 자신의 드레스 치맛자락을 양손으로 움켜잡더니.
그것을 뜯어냈다.
순식간에 짧은 치마로 의상이 바뀌었다.
이에 맞춰서 다른 샤이걸스 멤버들이 마이크를 들고 일렬로 섰다.
피아노 위에 올라가 춤을 추는 황채린의 손놀림 역시 빨라졌다.
발라드지만, 일반 발라드보다 약간 빠른 템포의 곡이었다.
“이거 약간 그 느낌이지 않아? 2000년도 초에 그 소몰이 창법 유행하던 시절 있잖아. 그때 나왔을 법한 노래인데.”
여솜이 자신의 생각을 드러내자, 비아가 손가락을 딱! 소리가 나게끔 튕기면서 외쳤다.
“맞아, 그거!”
옛날의 향수를 불러일으킬 법한 알앤비 곡이 펼쳐졌다.
기존에 공개되었던 곡은 아니었다.
샤이걸스가 이번 무대를 위해 특별히 작사, 작곡한 오리지널 곡이었기에 신선함도 곁들어져 있었다.
이번에도 그녀들이 보여준 무대는 이연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대단한 그룹이야.’
순위는 둘째 치고. 이연은 걸파이트 시즌 2를 통해서 가장 많은 수혜를 보게 될 그룹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단연 샤이걸스라고 대답할 것이다.
그 정도로 그녀들이 보여준 무대는 늘 상상 이상이었다.
심사 위원들도 이연과 같은 평가를 내렸다.
샤이걸스만의 색깔을 부각시키면서, 동시에 옛 향수도 느끼게 하는 무대여서 아주 좋았다고.
호평이 이어지는 가운데에, 마침내 하니엘의 차례가 다가왔다.
스태프의 안내에 따라 그녀들과 이은솔은 다시 한번 파이팅을 외쳤다.
무대로 향하는 길이 이토록 짧게 느껴지는 것도 오랜만이다.
그녀들보다 무대에 먼저 오른 민주린이 다음 차례를 소개했다.
“이제 마지막 순서만 남았죠? 하니엘의 무대를 만나보시겠습니다!”
민주린이 퇴장하고.
하니엘 멤버들이 각자 본인들의 자리에 위치했다.
연습한 대로 이은솔은 중간에 등장할 예정이었기 때문에 그녀들과 함께 무대에 오르진 않았다.
마지막이라는 건 늘 긴장되는 순서다.
마지막 무대가 어땠냐에 따라 무대를 보러 온 사람들의 기억이 좋은 추억으로 남을지 어떨지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여태껏 선배 그룹들이 분위기를 잘 살려줬으니까.
이제 하니엘이 마침표만 잘 찍으면 된다.
전주가 나오기 전에 하니엘 멤버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면서 마음의 준비가 완료되었음을 알렸다.
그리고 마침내.
하니엘의 2라운드 첫 무대가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