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화
제54화. 지원 요청(2)
다음 촬영을 위해 이연과 이은솔은 곧장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사이, 스태프들은 커다란 유리벽을 옮기면서 스튜디오 한가운데에 배치해 뒀다.
이 유리벽이 잠시 뒤에 이루어질 뮤직비디오 촬영 장면에 아주 요긴하게 쓰일 소품으로 활약할 예정이다.
옷을 갈아입은 이연은 결심을 굳힌 듯 물뿌리개를 들고 있는 스태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뿌려주세요.”
이연의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스태프가 그녀의 몸 곳곳에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얼굴, 머리카락, 목, 팔, 허리, 그리고 다리까지.
한 사이즈 크게 느껴지던 긴팔 옷이 물기로 인해 이연의 몸에 착 달라붙었다.
신종 괴롭힘은 아니었다.
이것도 뮤직비디오 촬영을 위한 준비 중 하나였다.
이연과 마찬가지로 이은솔 역시 물에 젖은 듯한 연출을 만들어내기 위해 물뿌리개 앞에서 두 번째 희생을 자처했다.
비를 맞았음을 알려주기 위해서 일부러 이런 수고스러움을 겪고 있었다.
이 와중에 메이크업은 최대한 흐트러지지 않게 신경을 써야 했다.
메이크업 담당 입장에서는 참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도 맡은 연예인들이 이연과 이은솔이라서 살았다.
“두 분은 메이크업 따로 필요 없으실 거 같은데요?”
거의 맨얼굴에 가까운 메이크업을 유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 다 얼굴에서 빛이 나고 있었다.
선남선녀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메이크업 담당들은 오늘 여러 차례 깨닫고 있었다.
특히나 이연의 미모는 업계에서도 굉장히 유명하니까.
그 유명한 이연의 실물을 직접 영접하니, 확실히 소문으로 들었을 때와 느낌이 전혀 달랐다.
모든 촬영 준비가 끝났다.
감독이 유리벽을 사이에 두고 이은솔과 이연을 각각 반대편에 위치시켰다.
“다음 장면 바로 들어가겠습니다. 레디, 액션!”
감독의 신호와 함께 노래가 흘러나오면서 카메라가 돌기 시작했다.
투명한 유리벽을 두고 서로 애타는 시선으로 마주 보는 두 남녀.
잠시 뒤, 이연이 먼저 눈을 감으면서 자신의 입술을 유리벽 위에 가져갔다.
그 모습을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던 이은솔은 이내 이연의 입술이 위치한 곳에 자신의 입술을 맞췄다.
만약에 유리벽이 없었더라면 키스신이 되었겠지만.
두꺼운 유리벽 하나로 인해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뜻하는 연인의 슬픔을 표현했다.
“컷! 방금 나쁘진 않았는데, 더 애절한 느낌으로 표현해 주시면 좋을 거 같아요. 특히 은솔 씨.”
“예!”
“이연 씨가 상대 배역이라고 너무 긴장하고 계신 거 같은데요?”
배우의 긴장을 풀어주기 위함인지, 감독이 이은솔에게 농담조로 말을 흘렸다.
이은솔은 그런 거 아니라고 하면서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지만.
사실 정곡을 찔렸다.
서로 입술이 닿지 않는 키스신이지만, 이연의 얼굴을 이렇게까지 가까이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기에 아까부터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반면, 이연은 딱히 상관없다는 태도를 보였다.
“더 적극적으로 해주셔도 돼요, 선배님.”
“그, 그럴까?”
“네. 어차피 유리벽 때문에 서로 몸이 닿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이연은 유리벽이 있어서 괜찮다.
하지만 이은솔은 달랐다.
오늘만큼은 유리벽이 원망스러웠던 적은 없었다.
* * *
세 번째 복장으로 갈아입은 두 사람이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활짝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이연이 뮤직비디오에 출연할 모든 분량이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허리를 살짝 숙이면서 스태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연과 함께 같이 오랫동안 고생한 이은솔도 잊으면 안 된다.
“선배님도 너무 고생 많이 하셨어요.”
“아니야. 오히려 너하고 같이 뮤직비디오 촬영하게 되니까 재미있더라. 그리고 예전에 비해서 표정 연기도 굉장히 자연스러워졌고.”
원래 이연은 연기 실력도 뛰어난 편이었다.
그러나 남자에서 여자로 적응하는 과도기였기 때문에 연습생 당시에는 표정 연기가 굉장히 부자연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 문제는 나중에 시간이 차차 해결해 줄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는 훨씬 더 매끄러운 연기가 가능해질 거라고 이연 스스로가 그렇게 보고 있었다.
“네가 나 도와줬으니까, 너도 내 도움이 필요할 때가 있으면 언제든 말해줘. 바로 달려갈게.”
“감사합니다, 선배님.”
“오늘 너무 고생했고, 나중에 또 연락하자.”
이은솔과 짧은 작별인사를 나눈 이연은 머릿속으로 바로 계산에 착수했다.
‘도움이라.’
이연의 느낌상.
가까운 미래에 이은솔의 조력이 필요할 때가 올 것 같았다.
* * *
하니엘을 필두로 주 단위로 컴백 중인 걸파이트 시즌 2 참가팀들.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와중에 드디어 2라운드에 접어드는 첫 녹화일이 다가오게 되었다.
한동안 촬영이 없다가 오랜만에 현장으로 복귀해서 그런지, 하니엘 멤버들은 반가움보단 낯선 느낌을 제일 먼저 받았다.
“우리가 촬영하던 곳이 이렇게 넓은 곳이었나?”
“어디 확장공사 한 거 아니야?”
“스튜디오는 그대로야.”
이연이 보기에는 그랬다.
물론 조금씩 손본 곳은 있긴 했지만, 스튜디오 규모 자체가 넓어진 건 아니었다.
녹화에 들어가기 앞서서, 황이전 피디가 리더들을 따로 불렀다.
“입장 순서는 원더존부터 하겠습니다. 그다음 CDP, 가을소녀, 샤이걸스 들어가시면 되고요.”
MAYO, 아이비제이 트윙클, 그리고 마지막에 하니엘이 입장하면 된다는 설명이 이어졌다.
이연과 각 그룹의 리더들은 어떤 기준으로 이런 순서가 정해지게 되었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1라운드 최종 미션 역 순위대로네.’
1라운드의 주인공은 하니엘이었다.
그래서 등장도 주인공처럼 부각시키기 위해 막내 그룹인데도 불구하고 일부러 마지막으로 뺀 것처럼 보였다.
어쩔 수 없다.
경연 프로그램에선 순위가 거의 대부분을 나타내니까.
그렇기에 각 그룹의 리더들도 이에 대해선 딱히 불편해하는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원더존의 채미가 이연에게 다가가서 부러움을 잔뜩 드러냈다.
“좋겠다, 하니엘은.”
“왜.”
“마지막에 등장하잖아. 제작진이 밀어준다는 뜻 아니야?”
“그것도 잠깐이지. 나중에 순위 바뀌면 어떻게 될지 몰라.”
아직 끝이 아니다.
이제 겨우 3분의 1 지점을 통과했을 뿐.
아직 2라운드, 그리고 파이널 라운드가 그녀들을 기다리고 있다.
촬영에 들어가기에 앞서 이연의 머릿속은 오늘도 여전히 미션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미션 내용에 따라 무대를 공략하는 방법이 아예 달라지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이런 방식이 재미있긴 해.’
처음에는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이니 뭐니 하는 게 약간 번거롭게 느껴질 때도 있었는데.
지금은 완벽하게 적응했다.
모든 준비가 끝났다.
대망의 걸파이트 시즌 2, 2라운드 첫 녹화가 개시되었다.
가장 먼저 원더존이 스튜디오에 모습을 나타내면서 본격적인 촬영의 막을 올렸다.
신기한 눈빛으로 스튜디오 곳곳을 이리저리 둘러보는 원더존 멤버들.
“1라운드 때하고 뭔가 달라진 거 같은데.”
“정말? 그대로 아니야?”
“아니에요, 언니. 저기 보세요. 의자하고 뒤에 기둥 디자인 달라졌잖아요. 그리고 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본인들의 자리를 찾아갔다.
그녀들의 뒤를 이어서 CDP 멤버들이 등장했다.
먼저 와 있던 원더존 멤버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선배들에게 허리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CDP 멤버들 역시 후배님들을 향해 정중하게 맞인사를 나눴다.
그래도 확실히 첫 녹화 때보다 지금이 덜 어색했다.
같이 녹화하면서 그동안 알게 모르게 서로 간의 정이 쌓인 덕분이었다.
그동안 어떻게 지냈냐느니, 컴백은 잘했냐느니 하면서 안부를 묻는 그녀들.
가을소녀와 샤이걸스가 나올 때에도 이런 분위기는 계속해서 유지되었다.
MAYO 멤버들도 스스로 먼저 환호성을 지르면서 분위기를 띄웠다.
“오랜만이에요!”
“얼마나 보고 싶었는지 아세요?”
“어머! 다들 저번보다 더 예뻐지셨네.”
미모 칭찬도 잊지 않았다.
MAYO에 이어서 가장 선배 그룹인 아이비제이 트윙클 3인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대선배가 등장하니, 공기가 확실히 달라졌다.
모든 후배 그룹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선배에 대한 예우를 갖췄다.
그러나 정작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은 그렇게까지 격식 차리지 않아도 된다면서 후배들을 편하게 만들어주기 위해 노력했다.
마지막으로 1라운드의 최종 승자를 차지한 하니엘 멤버들이 2라운드 첫 녹화의 대미를 장식했다.
멤버들은 먼저 와서 자리를 채운 선배 그룹들을 향해 인사하고 또 인사했다.
반면, 선배 그룹들은 열렬한 박수와 환호로 하니엘을 맞이했다.
“1라운드 주인공 왔네!”
“우리 막내들, 이제부터 방심하면 안 되겠어.”
여기저기서 장난스러운 어투로 견제의 뜻을 밝혔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두가 다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MAYO만 견제하면 될 줄 알았는데.
갑자기 하니엘이 그녀들을 넘어서 위로 치고 올라갈 줄 누가 알았을까.
막내 그룹의 반란.
하지만 2라운드에서는 하니엘에겐 쉽지 않은 경쟁이 될 것으로 보였다.
그렇게 하니엘 멤버들은 기대와 두려움이 섞인 기분으로 마지막 자리를 채웠다.
참가팀뿐만 아니라 걸파이트 시즌 2의 또 다른 중심인물이기도 한 민주린이 마이크를 들고 스튜디오 한가운데로 향했다.
“걸파이트 시즌 2, 2라운드 첫 녹화네요. 어떻게, 다들 그동안 잘 지내셨나요?”
민주린이 먼저 참가 팀들에게 안부를 물었다.
그녀들의 입가에 어색한 미소가 지어졌다.
잘 지냈다고 말하기에는 어려웠다.
정신없이 바쁘게 지냈다. 이렇게 말해야 정확했다.
다들 프로그램 녹화 일정에다가 컴백 준비까지.
쉴 틈이 없었다.
민주린도 그걸 잘 안다.
“지난번에 가을소녀 컴백 방송 봤는데, 기합이 단단하게 들어가 있더라고요.”
“오랜만의 컴백이라서 그런지 유독 더 힘이 들어갔던 거 같아요.”
“좋네요. CDP도 그렇고, 원더존하고 MAYO도 제가 방송 다 챙겨봤어요. 물론 하니엘도요.”
하니엘 멤버들이 민주린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감사합니다, 선배님!’이라고 답했다.
민주린은 기타 다른 그룹들에게도 차례차례 안부를 묻는 멘트를 건넸다.
이후에 큐시트를 확인하면서 본격적으로 2라운드 첫 번째 미션에 대한 이야기를 언급했다.
“어떤 미션인지, 타이틀부터 먼저 공개하고 시작하겠습니다. 보여주세요!”
1라운드 때처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화면에 미션명만 간단하게 적혀 있었다.
[게스트 미션]
“룰은 간단합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게스트를 모셔서 그 게스트와 함께 무대를 꾸미면 됩니다. 단, 데려올 수 있는 게스트는 한 팀으로 제한하겠습니다.”
솔로면 한 명. 그룹이면 그 그룹 하나만.
이런 식으로 제한을 둔 거였다.
비아와 리샤의 표정이 밝아졌다.
“이건 막 머리 쓰고 복잡한 미션 같은 게 아니라서 다행이네.”
“맞아. 이해하기 쉬워.”
그러나 그녀들은 알지 못했다.
이 게스트 미션에서 어느 한 팀이 시작 전부터 절대적인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는 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