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화
제53화. 컴백(1)
치열했던 걸파이트 시즌 2, 1라운드 미션들이 모두 종료되었다.
고작 세 개의 라운드 중 한 라운드만 끝났을 뿐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숙소에 있는 하니엘 멤버들은 그야말로 녹다운 상태였다.
어제 녹화의 후유증 탓인지, 오늘은 이연의 뒤를 따라 거의 2위로 기상하던 우미조차 해가 머리 위에 떠오를 때까지 꿈나라에서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얘들아.”
박도수 매니저가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면서 멤버들을 불렀다.
점심시간이 다 되어가는 데도 불구하고 숙소 불은 여전히 꺼져 있었다.
“아직 자나.”
원래는 숙소에 들어오기 전에 항상 멤버들에게 들어가도 되는지 확인을 하고 오는 편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연락을 안 받는 탓에 박도수 매니저는 어쩔 수 없이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고서 스스로 도어를 열어야 했다.
그래도 생각지도 못했던 불상사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자신이 왔음을 여러 차례 알리면서 거실로 향하는 기다란 복도에 들어섰다.
“다 자고 있니?”
1인실 방 문 앞을 막 지날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리면서 이연이 등장했다.
“아니요. 깨어 있어요.”
“으악, 깜짝이야―!”
박도수 매니저는 마치 귀신을 본 사람처럼 크게 놀랐다.
하필이면 이연의 머리카락 길이도 길었던 터라 더 놀랄 수밖에 없었다.
“깨어 있었으면 말을 했어야지! 그리고 연락은 왜 안 받았어?”
“어제 스마트폰 충전해 두고 잔다는 걸 깜빡했어요.”
“그, 그렇다면야…….”
잊어버렸다는데. 딱히 할 말이 없었다.
그리고 멤버들은 어제 늦은 시간 동안 걸파이트 시즌 2 녹화를 진행하느라 녹초가 되어 있었다.
승부가 결정되지 않아서 연장전까지 펼칠 정도였으니까 말이다.
“연이, 너도 많이 피곤했나 보구나.”
“약간만요. 멤버들 다 자고 있길래 깨우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방에서 시간 보내고 있었어요.”
“뭐 하면서?”
“여러 가지 하고 있었어요.”
이연의 등 뒤로 마나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을 박도수 매니저가 알아차릴 리 없었다.
방에서 나온 이연이 거실 불을 켰다.
아무리 피곤해도 이제 슬슬 눈을 떠야 할 시간이다.
컴백이 바로 코앞인데, 언제까지 계속 자고만 있을 수는 없으니까.
이연은 방에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슬슬 일어나라고 멤버들에게 압박을 줬다.
그러나 멤버들은 좀처럼 무거운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박도수 매니저가 난색을 드러냈다.
“일 났네.”
“왜요? 오늘 스케줄 없잖아요.”
이연이 혹시 몰라서 다시 한번 하니엘의 스케줄이 정리되어 있는 일정표를 살폈다.
그녀가 말한 대로. 오늘은 비번이었다.
“그게 말이지…… 저번에 YN전자에서 출시한다는 새로운 스마트폰 기종 광고 건 있잖아. 기억하지?”
“네, 알죠.”
잘나가는 걸 그룹이니까 여기저기서 광고 문의가 쇄도하는 것도 당연했다.
YN전자도 그중 한 곳이었다.
이번에는 10대, 20대 젊은 층에 스마트폰 새 기종이 곧 있으면 나온다는 것을 확실히 인식시키기 위해 일부러 하니엘 그룹을 광고 모델로 섭외하기로 했다.
물론 여기에는 양우미를 향한 약간의 사심도 섞여 있을 것이다.
YN그룹의 총수, 양진석 회장의 둘째가 하니엘 그룹에서 아이돌로 활동 중이니까.
결국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다.
오늘이 이 광고 계약 건에 관련해서 미팅을 가지기로 한 날이었다.
회사 관계자들만 나가면 되는 자리였기에 오늘의 하니엘과는 크게 연관이 없을 거라고 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오늘 아침에 완전히 뒤집히고 말았다.
“YN전자 부사장님이 직접 오신대.”
“김정아 부사장님 말씀하시는 거죠? 우미 언니 어머님.”
“맞아.”
지난번에 우연한 계기로 같이 저녁 식사 자리에서 그녀를 만났던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직접 미팅 자리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물론 광고 모델 계약 건에 관한 이야기가 중요하긴 하지만, 부사장까지 출동할 단계는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녀가 왜 오려고 할까.
딱 봐도 의도가 보인다.
“우미 언니하고 저희들 보고 싶으신가 보네요.”
“맞아. 조건도 굉장히 후하게 주시는데. 우리 쪽에서도 정성을 보이는 게 좋지 않겠냐고 대표님께서 그러셔서…… 그래서 너희 모두는 아니더라도, 몇 명만이라도 좋으니까 같이 자리 채워줬으면 하는데.”
“잠시만요. 우미 언니한테 말해볼게요. 언니는 무조건 간다고 할 거예요.”
그녀가 김정아 부사장을 만나기 꺼려 한다는 건 이연도 잘 안다.
그럼에도 이렇게 말을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어머니가 회사에 와서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할지 모르니까. 그래서 감시를 하려고 할 것이다.
이연의 예상대로, 박도수 매니저가 알려준 설명을 모두 들은 우미는 이불을 과감히 걷어내고 곧장 화장실로 직행했다.
이연이 박도수 매니저를 향해 어깨를 살짝 으쓱였다.
“제 말이 맞죠?”
“역시 리더라서 그런지 멤버들 성향을 잘 아네.”
“이 정도는 기본이니까요. 우미 언니하고 저, 이렇게 둘만 가면 될 거 같은데. 괜찮죠?”
“어. 애들도 많이 피곤해하는 거 같으니까. 아무튼 미안하다, 연아.”
“신경 쓰지 마세요.”
어차피 이것도 다 그룹 활동과 연관되는 일이니까.
그렇게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 * *
이연과 우미, 그리고 LC 엔터테인먼트 관계자들을 포함해서 오채일 대표까지 자리를 잡고 YN그룹 측을 기다렸다.
오채일 대표가 다시 한번 자신의 복장을 점검하면서 말했다.
“김정아 부사장님께서 오신다는데. 나도 와야지.”
연예 기획사와 재계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렇다 보니 오채일 대표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YN전자 관계자들이 미팅룸에 모습을 나타냈다.
들었던 대로 김정아 부사장이 직원들과 함께 인사를 건넸다.
여기에 또 한 명의 깜짝 손님이 포함되어 있었다.
바로 양우섭 이사였다.
양우섭이 작게 웃으면서 자신도 같이 오게 된 이유를 짧게 설명했다.
“어머니 감시하려고 왔습니다.”
우미가 온 목적과 완전히 일치했다.
이연은 양우미와 양우섭, 두 남매를 빠르게 훑었다.
‘남매는 남매구나.’
한편, 양우섭의 솔직한 말에 김정아 부사장이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말했다.
“어머? 얘가 정말. 엄마 감시하러 나오는 아들이 세상에 어디 있니?”
“여기 있지 않습니까.”
“하여간 지 아빠 닮아 가지고 말은 잘해요.”
재벌집 가문이라 해도 결국은 똑같은 사람이다.
엄마와 아들의 가벼운 말다툼을 보고 있자니 어색한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러나 이들 중에서 유일하게 단 한 사람, 우미만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들 하세요. 사람들 앞에서 창피하게.”
“딸은 엄마 편 안 들어줄 거야?”
“누구의 편도 들어줄 생각 없으니까 일 이야기나 빨리 하세요.”
우미는 지금 당장에라도 다시 숙소로 돌아가고 싶은 기분이었다.
막내딸의 심기가 더 불편해지기 전에, 같이 온 YN전자 사업부 팀장이 바로 본론 이야기를 꺼냈다.
“이번에 컨펌까지 끝낸 광고 콘티가 나와서요. 미리 한번 보시라고 자료 가져왔습니다. 나중에 저희가 따로 메일로도 보내 드릴 테니까 시간 나실 때 천천히 살펴보셔도 됩니다. 그리고…….”
일 관련 이야기가 오가는 와중에, 김정아 부사장의 시선은 어느 한 여성에게 집중되었다.
처음에 이연은 옆에 앉은 그녀의 딸, 우미를 보는 줄 알았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건 또 아니었다.
‘설마 난가?’
그녀와 눈이 마주친 순간, 김정아 부사장은 이연에게 옅은 미소를 보냈다.
그 미소 덕분에 이연은 자신의 추측이 맞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 * *
미팅이 끝난 이후에는 회사 근처에 위치한 한식당에서 다 같이 식사를 진행하기로 했다.
그러나 김정아 부사장과 양우섭은 다른 볼 일이 있어서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기로 했다.
오채일 대표가 김정아 부사장에게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회장님께도 나중에 제가 꼭 한번 찾아뵙겠다고 말씀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이도 오 대표님하고 만나서 술 마시는 거 많이 좋아하더라고요. 재미있는 분이라고 늘 말하고 다녀요.”
“정말입니까? 다행이네요. 저는 그때 제가 말실수라도 한 거 아닐까 걱정을 많이 했었는데.”
술자리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연은 내막을 모른다.
그래도 무사히 끝난 거 같아 일단은 다행으로 보였다.
뒤이어 김정아 부사장은 자신의 딸을 향해 양팔을 활짝 벌렸다.
우미가 살짝 얼굴을 찡그리면서 물었다.
“뭐예요?”
“뭐긴. 우리 딸, 오랜만에 봤는데 안아보고 싶어서 그런 거지.”
“됐어요. 제가 무슨 애도 아니고. 사람들 다 보는데…….”
“어머? 중학생 때까지도 엄마하고 같이 자고 싶다고 막 떼쓰던 아이가.”
“아아아아악! 제, 제가 언제요!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우미답지 않게 크게 동요하는 모습이었다.
가족이니까. 멤버들이 알지 못하는 우미의 흑역사를 김정아 부사장은 다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우미는 엄마를 만나기가 싫었다.
어쩔 수 없이 엄마의 품에 오랜만에 안기게 된 우미.
계기는 협박(?)이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엄마 품에 안겨 있으니까 기분은 좋았다.
김정아 부사장이 바로 옆에 있는 이연에게도 물었다.
“이연 씨도 안아드릴까요?”
“아니요. 저는 괜찮습니다.”
스킨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연이었기에 정중히 사양하기로 했다.
아쉬움에 살짝 입맛을 다신 김정아 부사장이 자신의 아들을 가리키면서 다른 말을 꺼냈다.
“나중에 광고 촬영 끝나고 우리 아들내미하고 같이 식사라도 한 끼 해요. 아들이 이연 씨한테 예전부터 우미 일로 도움 많이 받았다고, 언제 한번 크게 대접해 주고 싶다고 그러던데.”
뒤에서 양우섭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걸 어머니가 왜 말씀하시는 겁니까.”
“가만히 놔두면 네가 잊어버리고 이연 씨한테 평생 말 안 할 거 같아서. 그래서 엄마가 대신해 주는 거야. 아니면 저하고 우미까지 포함해서 넷이 볼까요? 애들 아빠도 올 수 있으면 초대할게요.”
옆에서 우미가 ‘그러면 전 안 걸 거예요’라고 먼저 선을 그었다.
김정아 부사장은 우미를 향해 눈을 한 차례 흘긴 뒤, 다시 이연에게 환한 미소를 보냈다.
“우미가 저렇게 말해도 우리 그이, 항상 애들 생각하는 착한 남편이에요. 우미는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이연 씨는 꼭 알아주셨으면 좋겠어요. 가족애도 많고. 나중에 우리 아들 며느리 될 사람 생기면, 새아가한테도 매우 잘해줄 거예요. 그것도 꼭 기억해 주세요.”
“네?”
왜 그걸 자기한테 기억해 달라고 하는지 이연은 알 수가 없었다.
양우섭은 뭔가를 눈치챈 모양인지, 자신의 엄마를 반강제로 끌어당기면서 얼른 가자고 재촉했다.
“죄송합니다, 이연 씨. 어머니가 한 말은 제가 대신해서 사과드릴게요.”
“괜찮아요.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이사님.”
“네. 이연 씨도요. 우미도. 나중에 오빠가 또 연락할게.”
우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면서 빨리 엄마 데리고 가라고 손짓했다.
모자가 사라진 뒤, 우미가 이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엄마가 너 엄청 마음에 들어 하나 봐.”
김정아 부사장 나름의 애정 표현이었음을 이연은 뒤늦게 깨달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