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화
제52화. 체인지 미션(6)
시간이 지날수록 하니엘이 펼치는 ‘러브폴리’ 무대는 정점으로 향했다.
피날레의 순간이 찾아오자, 갑자기 조명이 꺼졌다.
처음 무대를 시작할 때처럼, 조명 빛 한 줄기가 무대 한가운데에 서 있는 이연을 비췄다.
또각, 또각, 또각.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힐굽 소리에 맞춰서 앞으로 걸어 나온 이연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어깨 뒤로 넘겼다.
그런 뒤에 마치 관객들을 향해 인사하듯 한쪽 다리를 뒤로 살짝 빼고서 허리를 숙였다.
마무리를 알리는 이연의 동작과 함께 가을소녀 멤버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12명이나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박수를 치니까 박수 사운드 크기가 남달랐다.
스튜디오 밖에서 무대를 지켜본 민주린도 하니엘 멤버들이 선보인 스케일에 놀란 모양인지 계속해서 감탄을 흘렸다.
“와……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간 거 같아요. 무대를 보면서 오랜만에 압도된다는 느낌을 받았네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는 오히려 제가 여러분들에게 해드리고 싶은 말이에요. 너무 잘하셨어요. 가을소녀 분들도 아마 저하고 같은 생각일 거예요. 그렇죠?”
민주린이 묻자, 가을소녀 멤버들은 단체로 고개를 끄덕이면서 깊은 공감을 표현했다.
평점을 매기기 전에 앞에서 펼친 그룹들이 그랬듯이 먼저 소감을 들어보기로 했다.
마이크를 쥔 초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아…… 죄송해요. 저도 모르게 온몸에 막 소름이 끼쳐서. 사실 하니엘 여러분들처럼 저희도 언젠가 한 번쯤은 저희들 곡으로 뮤지컬처럼 무대를 꾸며보고 싶다고 자주 말하곤 했었거든요. 좀처럼 기회가 없어서 아쉬웠는데, 이 아쉬움을 후배님들께서 확실하게 풀어주셨네요.”
하니엘의 오늘 무대 콘셉트는 대리만족이었다.
그녀들이 준비한 콘셉트가 가을소녀에게 제대로 통했음을 알리는 소감이 되었다.
그렇다고 아직까지 안심할 수는 없었다.
‘아직 평점을 모르니까.’
각 걸 그룹들이 매긴 평점은 모든 무대가 끝난 뒤에 한꺼번에 공개될 예정이다.
이에 따라 1라운드 마지막 미션 최종 순위가 결정된다.
그 전까지는 절대로 방심해선 안 된다.
게다가 아직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끝나지도 않았다.
이연은 무대로 내려가면서 벽에 붙어 있는 무대 순서 리스트가 적힌 종이로 시선을 던졌다.
여섯 번째, 그리고 일곱 번째 무대 순서가 바로 아이비제이, 그리고 MAYO로 잡혀 있다.
‘후반전이 볼만하겠네.’
그 전에 하니엘 멤버들이 해야 할 일이 하나 있었다.
스태프가 도중에 그녀들을 향해 대기실이 아닌 다른 방향 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곧 샤이걸스 멤버들 올라갈 거니까 하니엘 여러분들은 대기실로 가지 마시고 바로 평가석으로 이동해 주세요.”
샤이걸스도 CDP처럼 하니엘의 ‘A NEW START’를 골랐다.
체인지 미션 중에서 유일하게 곡이 겹치는 무대다 보니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MAYO 같은 대결 구도와는 다른 의미에서 주목을 받고 있었다.
평가받는 사람에서 평가하는 사람으로 금세금세 위치가 바뀌었다.
‘오늘 녹화는 특히나 더 정신이 없네.’
이연조차도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 * *
방금까지 무대에 있었는데.
이제는 평가석에 앉아 있으니 멤버들은 기분이 묘했다.
잠시 후, 샤이걸스 멤버들이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샤이걸스입니다.”
평소의 그녀들답게 텐션이 평온하게 유지되는 모습을 보였다.
샤이걸스가 가을소녀, CDP에 비해 데뷔 일자는 늦은 편이다.
그러나 무대 경험으로 따지면 두 선배 그룹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
짬에서 오는 침착함.
샤이걸스 멤버 다섯 명은 그렇게 평가석에 앉은 후배 걸 그룹을 바라보고 있었다.
민주린이 샤이걸스에게 먼저 물었다.
“걸파이트 시즌 2가 시작한 이후부터 샤이걸스 분들은 본인들의 콘셉트와 매번 다른 모습들을 보여주셨잖아요. 이번에는 어떤가요?”
“저희가 평소에 안 해본 장르만 하다 보니까 지금까지 성적이 많이 안 좋게 나온 거 같아서요. 이번에는 잘하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발라드인가요?”
샤이걸스의 리더, 앤서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면서 이렇게 답했다.
“직접 무대를 보시면 알게 될 거예요.”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대답이 되었다.
예상대로.
샤이걸스가 준비한 무대는 ‘A NEW START’ 발라드 버전이었다.
다섯 명의 멤버들이 시원시원하게 목소리를 내지르자,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은 귀와 함께 긴장으로 꽁꽁 얼어붙었던 마음까지 뻥! 하고 뚫리는 느낌을 받았다.
샤이걸스는 네 명의 보컬과 한 명의 래퍼로 이루어져 있다.
랩 담당도 싱잉 랩이 주특기다 보니 때에 따라서 코러스를 깔아주는 역할도 소화하곤 했다.
멤버들의 목소리가 하나의 하모니를 이루었다.
무대가 아니라 작품을 접하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이연은 스탠드 마이크 앞에서 열창하는 다섯 멤버들을 보면서 생각했다.
‘확실히 발라드가 주력인 그룹답네.’
보컬 쪽은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본인들이 제일 잘하는 특기 카드를 처음으로 미션 무대에서 꺼낸 거니까.
그래서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편곡도 잘했다.
샤이걸스 멤버들 몇몇이 편곡과 작곡, 작사에 재능을 보인 탓에 발라드 버전 ‘A NEW START’의 완성도 또한 높았다.
그렇게 귀가 즐거워지는 무대가 끝나고.
하니엘 멤버들은 아직도 여운에서 벗어나지 못한 얼굴로 준비하느라 고생한 그녀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무대 위로 올라온 민주린이 하니엘에게 누가 대표로 소감을 말할지에 대해 물었다.
이연은 비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눈치 빠른 비아가 자신을 대신해서 다른 타깃을 지정했다.
“우미 언니가 해줄 겁니다!”
“나?”
우미가 화들짝 놀랐다.
졸지에 소감을 말하게 된 우미였지만, 갑작스럽게 턴을 넘겨받은 것치고는 침착하게 소감을 이어나갔다.
“선배님들의 모습에 깊은 감동과, 그리고 많은 가르침을 받았어요. 저희의 노래를 이런 장르로 해석할 수도 있구나 하고 말이에요.”
이연이 하고 싶은 말과 거의 동일했다.
샤이걸스의 무대 평가를 끝으로, 하니엘의 차례는 모두 끝났다.
이제 이곳에 참가한 모든 걸 그룹들이 궁금해할 바로 그 시간이 찾아왔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VS MAYO.
1인자와 2인자의 자존심 대결이 곧 이곳에서 펼쳐질 예정이다.
* * *
가장 먼저 무대에 오른 팀은 아이비제이 트윙클이었다.
평가할 팀은 예정대로 MAYO.
대기실에서 두 팀의 구도를 지켜보던 유키가 혀를 내둘렀다.
“저희 무대 때보다 더 긴장되는 거 같아요.”
“아마 우리뿐만 아니라 모든 스태프들이 다 그렇게 생각할걸?”
이연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이번 체인지 미션의 하이라이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니까.
마침 서로 인원수도 비슷하다.
그러나 사실 이 싸움은 MAYO에게 많이 불리하다.
왜냐하면 MAYO는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아니라 아이비제이 본가 노래들을 가지고 무대를 꾸며야 했기 때문이다.
아이비제이 원래 멤버들의 숫자는 총 9명이다.
4명이서 9명의 곡을 소화하는 것과.
반대로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 3명이 4인조 그룹인 MAYO의 곡을 커버하는 것은 난이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다.
결국은 어느 그룹이, 얼마나 편곡을 잘했느냐의 싸움이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고른 곡은 MAYO에게 있어서 가장 높은 흥행 기록을 선물했던 노래, ‘shooting’이었다.
걸크러시 콘셉트의 대표곡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노래를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이 어떻게 소화할지가 궁금했다.
이연은 모든 신경을 무대에 집중시켰다.
시작은 무대 아래에서 뿜어져 나오는 화려한 불길부터였다.
고막을 때리는 듯한 강한 비트를 배경으로 지현이 능숙한 영어 발음을 뽐내며 초반 랩을 선보였다.
벡스 멤버의 여동생다운 기량이었다.
‘집안 전체가 다 끼가 있나 보네.’
지현도 지현이지만.
메인 보컬인 미수도 결코 무시할 수 없었다.
혜원이야 말할 필요가 있을까.
멤버 한 명 한 명이 전부 다 거물급이다.
아이비제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멤버들이 뭉쳐 만든 유닛이니까.
그렇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무대도 수준급이었다.
지난 파트너 미션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어나더 클라스라는 단어가 떠오를 정도로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준 아이비제이의 무대를 보면서 하니엘 멤버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우리가 아이비제이 선배님들 이길 수 있을까?”
덜컥 겁부터 났다.
MAYO 정도 되니까 평가석에서 최대한 침착하게 아이비제이의 무대를 보고 있는 거지, 다른 후배 그룹이었다면 평가는 둘째 치고 넘기 힘든 기량 차이에 자괴감과 절망감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연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무대 위에선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아무도 모르는 법이야.”
인기 있는 그룹이라고, 그리고 재능 있는 아이돌이라고.
무조건 그들이 이긴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승부의 세계에서 ‘절대’라는 말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약팀이 강팀을 이기는 게 더 재미있잖아. 그렇지?”
여유가 넘치는 이연의 모습 덕분에 멤버들은 다시 한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한편,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무대를 모두 지켜본 MAYO에게 여태껏 그랬듯이 소감을 묻는 시간이 찾아왔다.
미랑은 마이크를 들고 담담하게 말을 이어나갔다.
-선배님들의 무대를 저희가 평가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감히 말씀드리자면…… 역시 대단하다는 말밖에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보컬, 댄스, 연출, 그리고 전체적인 무대 구성에 선배님들만의 개성까지 ‘shooting’이라는 곡에 잘 녹여내셨다고 생각합니다. 오늘의 무대를 볼 수 있어서 영광이었습니다.
정당한 경쟁은 먼저 라이벌의 능력을 인정하고 난 다음부터 시작이다.
아이비제이가 스타트를 끊었으니.
이제 MAYO의 차례다.
* * *
강력한 우승 후보 중 하나인 MAYO가 체인지 미션의 마지막을 장식하게 되었다.
MAYO의 무대를 보면서 이연은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오늘은 모든 그룹이 다 자기가 잘하는 것들만 가지고 나왔네.’
블라인드 미션, 그리고 파트너 미션의 경우에는 실험적인 무대가 꽤 있었다.
그러나 이번 체인지 미션에서는 샤이걸스 때처럼 자신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입맛과 취향을 내세우면서 안정적인 흐름을 만들어가려는 모습을 보였다.
사실 이게 맞긴 하다.
매 라운드 마지막 미션은 그만큼 중요하기 때문이다.
물론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경우에는 본인들의 색깔보다 원곡의 느낌을 더 살리려고 하는 경향이 보였지만, 그래도 결과적으로는 잘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었다.
MAYO도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라이벌이라 불리기에 손색이 없을 만큼 높은 퀄리티를 지닌 무대를 선보였다.
아이비제이의 노래를 좀 더 인상적이고 센 이미지에 맞게 편곡한 그녀들.
파트 분할도 상당히 잘했다.
9명이 불렀던 노래였기에 4명이 소화하기에는 약간 힘들지 않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MAYO는 실력으로 이 걱정을 불식시켜 버렸다.
무대를 본 소감을 말하기 위해 혜원이 마이크를 찾았다.
MAYO뿐만 아니라 대기실에서 그녀의 소감을 지켜보는 모든 걸 그룹들이 전부 혜원의 입 쪽에 시선이 고정되었다.
혜원의 얼굴에 눈웃음이 번졌다.
“역시 잘하시네요. 이번에는 저희가 질 수도 있겠어요.”
그녀의 말에 모든 사람들이 경악했다.
걸파이트 시즌 2가 시작된 이후로 혜원이 처음으로 내뱉은 약한 소리였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