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제52화. 체인지 미션(5)
CDP와 샤이걸스, 둘 다 하니엘의 데뷔 앨범 타이틀곡인 ‘A NEW START’를 준비했다.
이연은 체인지 미션에서 자신들의 무대를 준비하는 와중에 선배 걸 그룹들이 꾸밀 하니엘의 곡이 어떨지 더 신경이 쓰일 때가 있었다.
누군가가 하니엘 그룹의 곡을 커버한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이제 막 두 번째 앨범을 준비하는 신생 걸 그룹이니까.
그래서 CDP의 무대가 더 궁금했다.
게다가 CDP는 하니엘보다 인원수가 훨씬 많은 그룹이다.
안무, 보컬 파트 분배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할 텐데.
이 문제도 어떤 식으로 해결했을지 관심이 쏠렸다.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CDP 멤버들이 각자 위치에 맞춰서 시작 전 포즈를 취했다.
누가 어느 곳에 서 있는지만 봐도 이연은 대충 CDP 멤버들의 포지션이 어떻게 분배되었는지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CDP 중에서 리더인 리브 다음으로 인기가 많은 멤버가 바로 인지였다.
CDP의 비주얼 담당으로, 데뷔 때부터 지금까지 멤버들 가운데에 그녀가 가장 많은 센터를 차지했었다.
모델로 일하다가 중간에 걸 그룹 스카웃 제의를 받고 들어온 멤버답게 신체 비율이며 미모 등. 외형으로 봤을 때에는 걸파이트 시즌 2 참가자들 중에서도 상위권으로 볼 수 있다.
‘보컬 실력이 약간 부족하다는 게 아쉽지만.’
그래도 데뷔 초기에 비하면 지금은 많이 나아진 편이었다.
물론 이연에게 ‘잘한다’ 소리를 듣기에는 한참 역부족이긴 했지만 말이다.
‘A NEW START’ 전주가 흘러나오기 시작하자, 무대를 펼치는 CDP 멤버들보다 오히려 하니엘 멤버들이 더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전주가 약간…… 아니, 많이 달랐다.
‘편곡했나 보네.’
보통 경연 프로그램에서 타 그룹의 노래를 커버할 때에는 원곡의 소스를 가져다가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말 그대로 커버곡이니까. 원곡을 똑같이 따라 불러봤자 큰 의미가 없다.
자신만의 개성과 색깔을 더해서 원곡을 재해석하는 맛이 있어야 한다.
거기서 자신의 실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CDP 역시 이와 동일했다.
기존에 하니엘이 불렀던 원곡보다 템포를 좀 더 빠르게 끌어올렸다.
안무도 바뀐 부분이 많았다.
7명이 추던 것을 11명이서 춰야 하니까. 당연히 변화가 클 수밖에 없었다.
인지를 중심으로 멤버들이 V자 형태로 흩어졌다.
그러다가 음악에 맞춰서 일자로 나란히 줄을 선 뒤, 앞 멤버를 시작으로 시계 방향 순서에 따라 팔을 뻗었다.
시작부터 꽤나 화려한 퍼포먼스가 펼쳐졌다.
‘준비 많이 했네.’
연습할 수 있는 기간이 매우 짧았을 텐데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CDP의 무대는 나름 준수했다.
라이브 실력도 안정적이었다.
이연이 지금까지 봤었던 CDP의 라이브 공연 중 세 손가락 안에 들 정도였다.
경연 프로그램 무대인 데다가 후배 그룹의 곡으로 공연을 펼치는 거니까.
선배의 자존심이 걸려 있으니 그만큼 더 잘해야지 하는 의지가 강하게 느껴졌다.
다만 아쉬운 부분이 하나 있었다.
이연이 맡은 고음 파트의 키를 약간 낮춰서 불렀다는 점이었다.
‘그래도 이게 마이너스 요소는 아니지.’
사람마다 목소리 톤이 다를 수밖에 없다.
가장 큰 차이는 남자와 여자.
그렇다 보니 개인이 소화할 수 있는 음역대 또한 다르다.
이연이 비정상적으로 음역대의 범위가 넓을 뿐. CDP에서 메인보컬을 맡고 있는 멤버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리고 고음을 소화할 자신이 없다면, 차라리 키를 낮춰서 본인의 음역대에 맞게 노래를 소화하는 게 훨씬 좋다.
괜히 자존심 부렸다가 노래를 망치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자신의 한계를 순순히 받아들이고 고집을 꺾는 것도 용기가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연은 오히려 메인보컬에게 가산점을 주고 싶었다.
4분 남짓했던 CDP의 무대가 모두 끝나자, 하니엘 멤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기립 박수를 보냈다.
“선배님, 너무 멋있었어요!”
“저희보다 훨씬 잘하시던데요?”
선배에 대한 예우도 약간 섞여 있었지만, 그렇다고 이 말들이 전부 내숭에서 우러나오는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잘했다.
멤버들도 무대를 보면서 이연처럼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후배들에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하는 CDP 멤버들.
하니엘 역시 박수를 중단하고 90도 각도로 허리를 숙이면서 앞의 두 팀과 마찬가지로 맞인사를 나눴다.
민주린이 다시 무대 위로 올라옴으로 인해 선후배 간의 예절 타임은 이것으로 종료되었다.
“CDP분들이 준비 많이 하셨네요. 저도 보면서 몇 번이나 감탄했는지 모르겠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쏟아지는 선배의 칭찬에 CDP는 몸 둘 바를 몰랐다.
멤버들의 표정도 뭐라고 해야 할까. 후련함이 느껴졌다.
적어도 후회가 남는 무대는 아니었다.
이것만으로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니엘 여러분들은 어떻게 보셨나요?”
멤버들이 자연스럽게 이연에게 마이크를 떠밀었다.
“저희 리더가 대표로 말해줄 겁니다!”
“연이 언니, 마이크 여기 있어.”
이연은 멤버들을 향해 눈을 흘겼다.
이럴 때에는 또 단합이 기가 막히게 잘된다.
한숨을 몰래 삼킨 이연은 느낀 바를 솔직하게 털어놓기로 했다.
“선배님들만의 ‘A NEW START’를 볼 수 있어서 정말 좋았습니다. 우리들의 곡이 이런 식으로도 꾸며질 수 있구나 하는 걸 많이 느꼈던 거 같아요. 이 곡을 커버해 주신 분들이 선배님들이라는 점이 한없이 기쁘고 또 영광입니다. 좋은 무대 보여주셔서 감사합니다.”
역시 리더. 막힘없이 술술 소감을 풀어냈다.
CDP 멤버들도 이연의 말에 진한 감동을 느꼈는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후배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이연이 좋아하는 예의범절 타임이 한 차례 더 이어졌다.
훈훈했던 선후배의 순서가 끝나고.
다음 후배 그룹이 무대에 올라섰다.
바통 터치를 하듯, 하니엘 멤버들과 짧게 인사를 나눈 원더존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계단을 올랐다.
비아가 멤버들을 재촉했다.
“언니들! 빨리 대기실 가서 원더존 선배님들 무대 보자!”
원더존은 방금 하니엘이 평가했던 CDP의 곡으로 무대를 가질 예정이었다.
원더존 다음 차례는.
‘우리였지?’
하니엘의 순서가 얼마 남지 않았다.
* * *
걸파이트 시즌 2에서 상대적으로 최약체 팀으로 평가받았던 원더존이었으나.
그룹 미션을 거듭해 갈수록 원더존은 비약적인 성장을 보였다.
그 성장세의 정점을 찍었다고 생각했던 게 바로 지난 파트너 미션이었는데.
이번 체인지 미션에서 이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우와…….”
모니터를 응시하던 리샤의 입에서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리샤처럼 직접적으로 표현만 안 했을 뿐이지, 하니엘 멤버 전체가 다 그녀와 비슷한 감정을 품고 있었다.
잘한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무대를 지켜본 CDP도 원더존 멤버들에게 후한 평가를 보냈다.
비아는 원더존이 고평가를 받는 것에 대해서 마치 자기 일처럼 기뻐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마냥 기뻐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이다음이 바로 하니엘의 차례였기 때문이다.
서로 손을 모아 파이팅을 외친 뒤에 무대로 향하는 하니엘 멤버들.
한편, 하니엘이 지명했던 가을소녀 역시 평가석에 먼저 자리를 잡았다.
“으…… 긴장되네.”
“우리가 무대에 선 것도 아닌데.”
가을소녀 멤버들 역시 앞서 평가석에 앉았던 멤버들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하니엘 멤버들이 하나둘씩 무대에 올랐다.
“안녕하세요, 하니엘입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선배님!”
걸파이트 최다 인원을 자랑하는 가을소녀 멤버들도 우르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하니엘 멤버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무대를 시작하기에 앞서 민주린이 하니엘 멤버들에게 어떤 각오로 준비를 했는지에 대해 물었다.
이때, 이연이 리샤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말했다.
“리샤가 말해줄 거예요.”
“제가요?”
리샤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연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아까도 내가 말했으니까. 나만 말하면 재미없잖아. 안 그래?”
“…….”
이연의 작은 복수였다.
졸지에 리더에게 지목을 당한 리샤는 새하얗게 된 머릿속 도화지 위에 멘트라는 검은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여,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선배님들께서는 그저 즐겨주시기만 하면 좋겠습니다! 파, 파이팅!”
누구를 위한 파이팅인지 알 수가 없었다.
리샤의 어설픈 멘트에 가을소녀 멤버들은 입가를 가린 채 작게 웃었다.
후배 그룹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나 잠시 뒤. 무대를 지켜보던 가을소녀 멤버들은 눈을 의심했다.
이연 혼자만 남기고 다른 멤버들이 전부 다 무대에서 내려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
“다 같이 하는 거…… 아니었어?”
설마 이연 혼자서 무대를 꾸미려는 걸까?
그럴 리가 없었다.
왜냐하면 하니엘 모두가 다 같은 무대의상을 입었으니까.
가을소녀가 불렀던 ‘러브폴리’는 오프닝부터 멤버들이 다 같이 모여서 단체 안무를 펼치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러브폴리 하니엘 버전은 시작부터 남달랐다.
스태프가 이연에게 기타를 전달했다.
그것을 건네받은 이연은 다른 스태프가 가져온 스탠드 의자에 앉아 자세를 취했다.
디리링.
기타 줄을 튕기는 이연의 모습에 가을소녀는 또 한 차례 놀랐다.
곧이어 ‘러브폴리’ 전주가 이연의 기타 연주를 통해 어쿠스틱 버전으로 펼쳐졌다.
이연은 키보드, 베이스, 일렉기타, 그리고 드럼까지. 대부분의 악기를 다룰 줄 안다.
기타 역시 마찬가지다.
이미 SSS를 통해서 연주 실력을 여러 차례 뽐냈던 이연이었지만, 두 눈과 두 귀로 그녀의 라이브를 직접 접하니까 굉장히 신선한 기분이었다.
이연은 얼마 전에 이은솔을 만나 중요한 힌트를 접했다.
예전에 그가 가을소녀 멤버들을 대상으로 어느 연예 프로그램에서 직접 인터뷰를 한 적 있었다.
그때 가을소녀 멤버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언젠가 자신들의 노래를 뮤지컬처럼 꾸며서 공연을 해보고 싶다고.
체인지 미션에서 고점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은 사실 아주 간단하다.
평가단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된다.
여기서 평가단은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이 지명한 가을소녀를 뜻한다.
그렇다면.
가을소녀 멤버들이 하고 싶어 했던, 원했던 무대를 자신들이 대리만족시키면 되지 않을까.
그래서 이연은 그녀들의 소원을 간접적으로 이루어주기로 했다.
어쿠스틱 연주가 끝난 뒤, 멤버들이 한 명씩 등장하면서 각자의 파트를 소화했다.
1절 후렴구에 접어들었을 때, 웅장한 오케스트라 합주를 통해 모든 멤버들이 모여 합창을 선보였다.
-사랑하는 마음을 편지에 담아
당신에게 보낼게요.
읽어주세요, 내 고백을.
그리고 답장해 주세요.
Wating for you.
숨을 죽인 채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의 화려한 무대를 지켜보던 가을소녀 멤버들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몇몇 멤버는 손으로 몰래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이은솔이 알려준 힌트가 정확했음을 깨닫자마자 이연의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