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제52화. 체인지 미션(4)
“고생하셨습니다!”
“이연 씨하고 우미 씨, 그리고 은솔 씨도 수고 많으셨어요!”
인터뷰 촬영을 마치자마자 세 사람이 각각 진행자, 스태프들에게 고개를 숙이면서 고생했다는 말을 전했다.
박도수 매니저가 미리 챙겨둔 이연과 우미의 개인 짐을 건네주면서 물었다.
“회사로 바로 갈 거지?”
“네. 가서 연습해야죠.”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하니엘 팀원들은 아직도 안무연습실에 남아서 경연 무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하니엘의 리더와 맏언니만 숙소로 돌아가서 쉴 수는 없었다.
박도수 매니저는 두 사람이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먼저 가서 차 시동 걸어둘 테니까 천천히 와.”
“네, 알겠습니다.”
잠시 시간이 생긴 틈을 노려서 이연은 이은솔에게 다가갔다.
“선배님.”
“어, 연아. 왜?”
“아까 해준 조언,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고민이 해결되었어요.”
“도움이 되었다고 하니까 다행이네.”
“나중에 제가 맛있는 거라도 사드릴게요.”
“좋지.”
이연과의 식사 자리는 늘 환영이다.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들려준 이연은 우미와 함께 먼저 촬영 현장을 벗어났다.
멀어져가는 이연의 모습을 끝까지 바라보던 이은솔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이런 식으로 천천히 호감도를 쌓아 가면 되겠지.”
조급하게 생각할 거 없다고 하면서 스스로를 다독였다.
* * *
다시 찾은 걸파이트 스튜디오 현장.
하니엘에게 있어서 오늘의 녹화는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하다.
컴백을 앞두고 펼치는 마지막 경연 무대이기 때문이었다.
오늘은 무대를 펼치기 전에 어떤 팀부터 먼저 할지 순서를 정하고, 그리고 평가받는 팀과 평가할 팀의 리더가 서로 짧게 각오를 드러내는 대면식을 가질 예정이었다.
이번에는 걸파이트에서 단골로 등장했던 제비뽑기 방식이 다시 도입되었다.
첫 번째 팀은 가을소녀 팀이었다.
하니엘의 순서는 네 번째로. 서로의 무대가 약간씩 떨어져 있었다.
뒤이어 민주린은 각 리더들에게 마이크를 넘기면서 임시 평가단이 될 팀의 그룹에게 한 마디씩 각오를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혜원이 먼저 입을 열었다.
“열심히 준비했으니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미랑과 혜원이 서로를 마주 보면서 나란히 맞인사를 했다.
다른 그룹 리더들도 대부분 혜원의 멘트와 비슷했다.
이연이 마이크를 들자, 초영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이연도 초영과 눈을 마주치면서 마이크를 가까이 가져갔다.
“저희는 선배님들에게 ‘평가를 해야 하는 무대’보다 ‘관객으로서 재미있게 볼 수 있는 무대’라는 생각이 들게끔 만들어드리고 싶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저희와 같이 즐겨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초영의 얼굴에 기대감이 가득 번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짧은 촬영을 끝낸 후, 첫 번째 무대가 준비되는 동안 이연은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을 대기실로 향했다.
이 과정에서 때마침 미랑과 마주치게 되었다.
“선배님.”
“어? 연이구나. 아까 멘트, 멋있었어. 말 잘하더라.”
“감사합니다. 무대도 그만큼 잘 보여줘야 하는데. 걱정되네요.”
“그런 말 하지 마. 난 너희가 잘할 거라고 믿으니까. 그리고 아까 초영이 보니까 너 보는 눈빛이 막 반짝반짝하던데? 기대 엄청 하는 거 같더라.”
그 기대감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무대에 올라서는 자의 숙명이다.
“아무튼 힘내고. 응원할게.”
“선배님도요. 꼭 이기세요.”
“고마워.”
사실 하니엘보다 미랑, MAYO 팀이 가장 힘든 싸움을 하게 될 것이다.
현존 최강의 걸그룹 팀과 맞붙게 되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아이비제이 완전체가 아니라 유닛이라는 점이다.
‘MAYO도 해볼 만하다고 생각하겠지.’
이연도 그렇게 보고 있었다.
오늘은 누가 웃고, 누가 울지 아무도 모른다.
이것이 경연 프로그램의 묘미다.
* * *
첫 번째 타자로 나선 팀은 하니엘이 커버곡 대상으로 골랐던 가을소녀 팀이다.
첫 무대를 통해서 이연과 하니엘 멤버들은 어떤 방식으로 무대를 보여주고 평가를 받는지 알게 되었다.
비아가 호들갑을 떨면서 대기실에 설치되어 있는 모니터 화면을 가리켰다.
“평가하는 팀은 저렇게 앉아서 무대를 직관하나 봐! 몇 점 줄지도 저기서 바로 이야기해주나?”
“그러진 않을걸.”
점수는 따로 합산한 뒤에 참가자들이 다 같이 모인 자리에서 한꺼번에 발표하는 방식으로 진행될 것이다.
여태껏 그래 왔으니까.
이번에도 이럴 가능성이 크다.
가을소녀가 지명한 팀은 CDP다.
두 팀 다 비슷한 컬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서로의 무대에 대해 익숙한 맛을 느낄 것이다.
평가석에 앉아서 무대를 응시하는 CDP 멤버들.
반면, 가을소녀 멤버들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여태껏 많은 심사 무대에 올랐었지만, 동 시기에 활동 중인 걸그룹에게 평가받는 자리는 없었다.
그래서인지 더 긴장하고 있었다.
각자 포지션대로 서자, 무대 조명이 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CDP의 노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연에게도 익숙한 곡이었다.
‘눈이 내리던 날’.
CDP의 대표곡 중 하나다.
가을소녀와 CDP의 팀 멤버 차이는 각각 12명과 11명. 고작해야 단 한 명이다.
그래서인지 안무 파트를 크게 바꿀 필요가 없었다.
가을소녀의 경우에는 원곡에 충실하자는 전략을 사용했다.
‘저게 정석적인 방법이긴 하지.’
이연은 조용히 모니터를 응시했다.
1절 후렴구 파트가 시작되자, 센터를 맡은 미랑이 무대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에 맞춰서 무대 위에 눈이 내려왔다.
물론 진짜 눈은 아니다. 스태프들이 따로 준비한 눈 스프레이를 이용해서 제목 그대로 눈이 내리는 연출을 보여주고 있었다.
CDP 멤버들은 가을소녀가 준비한 소소한 이벤트 연출에 입가를 가리거나 두 손을 모으면서 감동받았다는 액션을 취했다.
걸파이트에 참가하는 다른 팀들이 워낙 개성이 넘쳐서 그렇지, 사실 따지고 보면 가을소녀도 어디 가서 꿀리는 그룹은 절대로 아니다.
탄탄한 기본기를 앞세우면서 초영을 중심으로 안정적인 무대를 이어갔다.
‘예쁘네.’
멤버들의 모습과 목소리도.
그리고 무대도.
모든 것들이 다 반짝였다.
CDP도 매우 만족했는지, 무대가 끝나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면서 박수를 보냈다.
무대 잘 봤다는 뜻과 함께 준비하느라 수고 많았다는 위로의 뜻도 같이 섞여 있었다.
가을소녀 멤버들은 CDP 멤버들을 향해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덩달아 CDP 멤버들도 허리를 깊숙하게 숙이면서 또 한 차례 맞인사하는 풍경이 펼쳐졌다.
‘가을소녀가 CDP보다 선배 그룹이니까.’
선배가 인사를 하는데, 후배가 허리를 계속 꼿꼿하게 세우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연이 좋아하는 유교사상이 가득 넘치는 무대가 끝나자, 민주린이 CDP 멤버들에게 소감을 물었다.
―어떻게 보셨나요?
―어휴…… 저희가 뭐 할 말이 있겠나요. 선배님들이 저희 곡을 커버해주신 것만으로도 영광이고, 또 너무 예쁜 무대 보여주셔서 정말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예쁜 무대. 이연은 이보다 더 적절한 표현법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경연 프로그램에서는 예쁜 무대보단 ‘잘 꾸민 무대’가 필요한 법이다.
CDP가 과연 가을소녀에게 어떤 점수를 줬을지 하니엘 멤버 모두가 다 궁금해했다.
“CDP 선배님들이라면 만점 주시지 않았을까? 가을소녀 선배님들이시니까”
리샤가 먼저 자신의 생각을 들려줬다.
그러나 유키는 이와 정반대였다.
“아니요. 오히려 그래서 더 점수를 낮게 줬을 수도 있어요.”
“왜?”
“생각해보세요. 가을소녀 선배님들하고 CDP 선배님들, 둘 다 추구하는 방향이나 콘셉트, 그리고 컬러에 심지어 인원수까지 전부 다 비슷하잖아요. 만약에 제가 CDP 선배님들 입장이었으면, 오히려 점수를 짜게 줘서 가을소녀 선배님들을 하위권으로 끌어내릴 거예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설마…….”
“여기는 웃으면서 친목이나 다니려고 나온 프로그램이 아니니까요.”
유키다운 대답이었다.
서로 경쟁하는 그룹이 평가 점수를 매기는 시스템이다 보니, 전략적인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점수를 짜게 주려고 할 수도 있다.
체인지 미션의 무서움이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뒷감당은 본인들이 알아서 해야 한다.
이 밸런스를 적절하게 유지하면서 최고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점수를 매겨야 하는 것이 체인지 미션의 핵심이다.
그렇다고 마냥 점수를 낮게 줄 수도 없다.
시청자들도 이 무대를 같이 볼 예정이기 때문이다.
누가 봐도 잘 꾸민 무대인데. 너무 점수를 낮게 줘버리면, 당연히 비난의 화살은 점수를 매긴 쪽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
이 모든 것까지 전부 다 머릿속에 계산해야 한다.
그래서 이 체인지 미션이 어렵다.
가을소녀에 이어서 이번에는 CDP의 차례다.
그러자 스태프가 하니엘의 대기실을 찾았다.
“하니엘분들, 무대 준비 금방 끝날 거 같으니까 스튜디오로 바로 와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CDP가 지명한 그룹이 하니엘이다. 그래서 하니엘은 아직 무대에 오를 순번이 아님에도 스튜디오로 걸음을 옮겨야 했다.
매번 평가받는 입장이었던 그녀들이 이번에는 평가를 하는 자리에 앉게 되어서 그런지, 멤버들의 표정과 손짓, 발짓 전체에서 어색함이 묻어나왔다.
비아가 우미 언니에게 몸을 기대면서 말했다.
“언니. 나, 속이 너무 울렁거려.”
“갑자기? 왜?”
“우리가 선배님들 무대를 감히 어떻게 평가하라고. 부담이 너무 심해서 죽을 거 같아…….”
비아뿐만 아니라 멘탈이 비교적 탄탄한 편에 속하는 시우조차도 눈빛이 크게 흔들릴 정도였다.
이연은 멤버들이 각자 고충을 토로하는 것을 보면서 쓴웃음을 삼켰다.
‘후배 그룹한테는 참 힘든 미션이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나마 덜 부담스러운 원더존을 고를 걸 그랬나 하는 후회도 살짝 들었다.
이연은 가을소녀가 아니라 최고참 그룹인 아이비제이를 자신의 손으로 평가해야 한다고 해도 크게 부담이 없었다.
음유시인으로 활동할 때에도 간혹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오늘의 이 경험이 처음이다.
부담이 안 된다는 게 오히려 말이 안 될 것이다.
평가석에 앉은 것만으로도 벅찬데. CDP 멤버들이 무대에 오르자 이 부담감은 2배…… 아니, 3배 이상으로 늘어나게 되었다.
CDP 멤버들이 나란히 서서 하니엘 멤버들에게 인사했다.
“둘, 셋.”
“안녕하세요, CDP입니다!”
“정말 열심히 무대 준비했으니까 잘 봐주세요!”
하니엘 멤버들도 어느새 일어나서 고개를 깊이 숙였다.
이연의 옆에 앉은 여솜이 자신의 가슴에 손을 올렸다.
“어떻게 해, 연아…… 내가 다 떨려.”
“너무 그러지 말고. 가벼운 마음으로 봐.”
“가볍게라니. 난 절대로 그렇게 못 할 거 같은데.”
이연도 안다.
아는데도 그냥 한번 해본 말이었다.
그렇다고 전관예우 방식으로 무대를 평가할 생각은 없다.
선배든 후배든.
이연은 무대에 관해서만큼은 한없이 냉정해질 수 있는 여자(속은 남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