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화
제52화. 체인지 미션(3)
하니엘 못지않게 아이비제이 트윙클 역시 1라운드 마지막 그룹 미션을 준비하기 위해 새벽부터 부지런히 출근을 마쳤다.
“어흐, 추워라!”
지현이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아직 해가 뜨지 않은 새벽의 공기는 계절을 불문하고 찬기가 가득했다.
회사 안으로 들어온 그녀는 불 켜진 안무연습실을 보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 중에서 항상 지현이 먼저 오곤 했었다.
그래서 누가 먼저 안무연습실을 환하게 밝히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문을 연 순간, 궁금증이 풀렸다.
혜원이 혼자서 스트레칭을 하면서 가볍게 몸을 풀고 있었다.
“별일이네? 나보다 먼저 나오고.”
“빨리 연습하고 싶어서. 미수는?”
“곧 올걸? 톡방 보니까 10분쯤 걸릴 거 같다고 하던데.”
“미수 도착하면 연습 바로 시작하자.”
“오케이, 알았어.”
움직이기 편하도록 머리를 질끈 동여맨 지현은 혜원의 뒷모습을 말없이 지켜봤다.
유연한 몸놀림을 보이면서 스트레칭을 전부 마친 혜원이 제자리에서 가볍게 폴짝폴짝 뛰기 시작했다.
언제든 바로 안무연습에 들어갈 수 있도록 컨디션을 끌어올리고 있었다.
혜원답지 않은 부지런한 모습에 지현은 작게 웃었다.
그녀들은 전략적인 접근 방식으로 일부러 두 번째 그룹 미션에서 꼴찌를 차지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번 미션은 다르다.
1라운드 마지막 그룹 미션이라는 무게감도 있고. 그리고 MAYO와의 정면대결 구도가 형성되었기 때문에 절대로 질 수 없다.
그리고 혜원은 보기와는 다르게 아이비제이 멤버들 중에서 가장 승부욕이 높은 사람이기도 했다.
덜렁이는 성격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아이비제이라는 거물급 걸그룹의 리더를 맡고 있는 이유가 있었다.
지현이 몸풀기를 마친 혜원을 불렀다.
“우리, 이번에 꼭 이기자.”
그녀의 말에 혜원은 힘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조건 이길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 거거든.”
SSS 녹화 당시에 이연이 팀원들에게 자주 들려주던 말과 굉장히 흡사했다.
* * *
한편,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정면대결을 펼치게 된 MAYO는 하루하루가 비상사태였다.
호기롭게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정면대결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저쪽이 확실히 어려운 상대이긴 해.”
노트북 화면을 통해서 아이비제이 멤버들의 무대를 쭉 시청하던 아야가 자신의 생각을 솔직하게 드러냈다.
아이비제이의 무대를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었다.
흠잡을 곳이 보이지 않는, 완벽에 가까운 무대.
적은 멤버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한 명 한 명이 다 눈에 띠일 정도로 밸런스가 잘 잡혀 있었다.
안무 동작도 흐트러짐이 없었다.
더 놀라운 것은.
“이걸 다 라이브로 소화했다는 게 믿기지 않아.”
MAYO의 메인보컬을 담당하는 멤버로서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는 무대였다.
아야조차도 아이비제이처럼 똑같이 무대를 꾸며보라고 하면 자신이 없을 거 같았다.
수년 동안 연습생 시절을 거치면서 다진 탄탄한 기본기가 아이비제이의 주 무기였다.
물론 MAYO 멤버들도 노력을 안 한 건 아니다.
하지만 아이비제이의 무대를 보고 있으면 재능의 차이라는 게 존재한다는 것을 깨닫곤 한다.
이 중에서도 특히 혜원의 존재감은 가히 독보적이다.
한 손에 마이크를 들고 화면을 향해 환하게 웃으면서 노래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이돌이라는 단어를 모범적으로 형상화한 듯했다.
어려운 상대가 될 거라는 건 이미 예상하고 있었지만.
“생각보다 더 힘들 거 같은데.”
아야가 약한 소리를 하자, 오린이 그녀를 찌릿 노려보면서 물었다.
“언니. 아이비제이 선배님들 곡으로 하자고 했던 거, 후회하는 거야?”
“아니. 후회는 아닌데……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뭐.”
자료 조사를 하기 위한 자리인데. 도리어 멤버의 사기만 꺾이게 되었다.
이럴 때 중심을 잡아주는 것이 리더의 역할이다.
“우리도 충분히 할 수 있어.”
미랑이 아야와 멤버들을 한 번씩 훑었다.
“잊었어? 우리가 걸파이트에 참가하기로 했던 목적.”
MAYO가 아이비제이보다 더 뛰어난 그룹이라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고 싶어서였다.
만년 2인자라는 자리에서 벗어나 당당하게 1인자로 거듭나고 싶다.
이것이 MAYO 멤버들의 공통된 생각이었다.
그래서 여태껏 참가해 본 적 없는 경연 프로그램에 발을 딛게 된 거였다.
“어차피 한번은 만나야 할 상대야. 겁먹지 말고 우리가 해왔던 걸 보여주기만 하면 돼.”
미랑의 설득이 통한 걸까.
멤버들의 표정에서 결의가 깃들었다.
* * *
아이비제이와 MAYO. 두 팀뿐만 아니라 다른 그룹들 역시 1라운드의 대미를 장식하기 위해 각자의 위치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었다.
하니엘도 마찬가지였다.
파트를 재분배하고, 은서해의 도움으로 안무도 7명에 맞게 다시 구성하기로 했다.
기존에 짜인 안무가 있었기 때문에 안무를 재구성하는 데에 오랜 시간이 소요되진 않았다.
은서해의 주도로 안무를 맞춰보기 시작하는 멤버들.
워낙 유명한 곡이기도 하고. 하니엘 멤버들 또한 데뷔하기 전에 한 번쯤은 ‘러브폴리’라는 곡으로 연습해본 경험이 있어서인지 곧 잘하는 모습을 보였다.
“잘하는데?”
은서해도 처음 합을 맞춰보는 것치고는 결과물이 나쁘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그러나 이연은 뭔가가 걸리는지 애매한 표정이었다.
은서해가 이연의 이런 반응에 관심을 보였다.
“연아. 왜?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어?”
“있긴 한데, 지금 당장은 제가 받은 느낌이 맞다고 확신이 안 들어서요.”
“그래? 그러면 연습 좀 더 진행해 볼까?”
계속하다 보면 문제점이 느껴질 수 있다.
이연은 은서해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도 계속해서 안무 연습이 진행되었다.
이때도 이연의 고민은 계속 이어졌다.
다들 실수 없이 잘한다.
잘하는데.
“무난한 거 같아.”
이연의 한 마디에 멤버들의 이목이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괜찮긴 한데, 나쁘게 보면 우리들이 굳이 이 곡을 고른 이유가 없는 거 같아. 너무 원곡을 따라 하려고만 하고 있다고 해야 할까. ‘러브폴리’를 좀 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번 체인지 미션의 숨겨진 의도가 있을 것이다.
이 핵심을 알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러나 이연은 쉽게 대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고민하다 보면 나올 거 같은데.
빽빽하게 잡혀 있는 방송 일정이 그녀를 쉽게 놔주질 않았다.
박도수 매니저가 연습실 문을 열면서 이연과 우미를 찾았다.
“연이하고 우미, 슬슬 촬영 가야 하니까 준비해.”
“네, 알겠습니다.”
그룹의 리더와 맏언니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며 매니저의 부름에 답했다.
오늘 그녀는 이은솔과 함께 짧은 인터뷰 촬영에 참가할 예정이었다.
얼마 전에 한 케이블 방송국에서 진행했던 한 해 최고의 예능 프로그램상에 SSS가 1위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진행을 맡았던 이은솔과, SSS의 우승자이기도 한 이연과 우미가 하니엘 멤버들을 대표해서 같이 이에 관한 수상 소감 겸 인터뷰를 진행하기로 했다.
다른 멤버들은 연습실에 남아서 은서해의 주도하에 계속 안무 연습을 이어나갈 예정이었다.
“언니들, 조심해서 잘 갔다 와.”
“가서 말실수하지 말고. 알았지?”
“연이하고 우미 언니가 말실수할 사람들로 보이니?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이것이 두 사람이 대표로 뽑히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박도수 매니저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향하는 동안에도 이연의 고민은 깊어졌다.
스마트폰을 만지작하면서 시간을 떼우고 있던 우미가 옆에 앉은 이연에게 고민의 내용에 대해 물었다.
“‘러브폴리’ 안무 때문에 그러는 거야?”
아까 나누던 이야기의 연장선이었다.
우미는 이연이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SSS 녹화 당시에는 상대가 누구든 자신감 있게 몰아붙이던 그녀였는데.
“걸파이트는 SSS에 출연할 때보다 더 힘든 거 같아.”
우미의 말은 마치 이연의 속내를 대변하는 듯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같은 연습생들과 경쟁하는 것과, 업계에서 내로라하는 선배 걸그룹들과 대결하는 것은 하늘과 땅 차이니까.
그럼에도 이연은 끝까지 자신감을 잃지 않았다.
이번에도 이연은 어떻게든 해답을 찾아낼 것이다.
우미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 * *
먼저 도착한 이연과 우미가 메이크업을 받는 동안, 밖에서 이은솔이 스태프들과 인사를 나누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도 일어나서 선배에게 인사를 하려고 했지만, 이은솔이 먼저 나서서 두 사람을 만류했다.
“괜찮아. 우리 사이에 그렇게 딱딱하게 인사하려고 하지 마. 오히려 내가 더 불편해.”
그리고 메이크업 받는 도중에 일어났다가 앉았다가 하는 게 영 불편할 테니까.
두 사람을 위한 이은솔 나름의 배려였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감사까지야. 요즘은 어때? 컴백 준비는 잘되어가고 있어?”
이연과 우미는 사이좋게 ‘네’라고 대답했다.
컴백 준비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곡이며 안무며. 다 잘 뽑혔으니까.
아직 팬들의 반응을 직접 확인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회사 자체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데뷔 앨범 그 이상의 성적을 기록하지 않을까 하는 예상도 심심치 않게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은솔은 하니엘의 다음 앨범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기대감을 드러냈다.
“음반 나오면 나도 그거 들고 SNS에 인증할게.”
“음반은 저희 쪽에서 선배님한테 따로 선물로 보내드릴 거예요.”
“나한테?”
이은솔이 이연의 말에 고개를 갸우뚱했다.
“네. 이번에 저희 컴백 쇼케이스 진행을 선배님께서 맡아주기로 하셨잖아요? 그때 저희가 사인까지 적어서 따로 챙겨드릴게요.”
“고마워. 소중히 간직할게.”
이연이 주는 선물이라면, 이은솔은 뭐든 땡큐다.
우미가 잠시 화장실에 가 있는 동안, 이연은 이은솔에게 마음에 담아뒀던 말을 꺼냈다.
“선배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어. 말해봐.”
“선배님은 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순간 사레가 들린 모양인지 이은솔은 계속해서 기침을 토해냈다.
평범한 질문이 나올 줄 알았는데.
예상치도 못한 직격타를 맞아버리고 말았다.
“너, 너에 대해서?”
“네.”
“…….”
이은솔은 이미 답을 알고 있었다.
이연을 후배가 아니라 한 명의 여자로 보고 있다.
어쩌면 이연도 이 대답을 원해서 일부러 물어본 게 아닐까?
그러나 주변에 왔다 갔다 하는 스태프들도 보이고. 그래서 이은솔은 일단 두루뭉술하게 말을 꺼내기로 했다.
“뭐든지 다 잘하고, 열심히 하려고 하고…… 조, 좋은 후배라고 생각하지.”
모처럼 기회가 왔는데. 용기를 내지 못한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러나 이 후회는 이연의 다음 이어지는 말에 의해 다행으로 바뀌었다.
“그럼 저희 멤버들은 어떻게 보세요?”
“멤버들까지? 아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다른 여자들을 동시에 그렇게 생각하진 않는데…….”
“무슨 생각인데요?”
“아, 아니야. 내가 오해했었나 보네.”
하니엘이라는 그룹에 대한 인상을 묻는 거였음을 이은솔은 뒤늦게 알아차렸다.
“열심히 하는 그룹…… 일까. 아까 했던 말 하고 비슷하네. 근데 이건 왜?”
“이번에 저희가 가을소녀 선배님들 노래를 커버해서 부르기로 했거든요. 평가도 가을소녀 선배님들이 직접 하실 거고요. 근데 무대를 어떻게 꾸밀지 고민 중이라서요.”
“아, 그거였구나.”
이은솔의 입꼬리가 위로 향했다.
“그런 거라면, 내가 너한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를 알고 있는데.”
이연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