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제50화. 파트너 미션(1)
마침내 걸파이트 시즌 2, 1라운드 두 번째 그룹 미션을 수행할 날이 찾아오게 되었다.
차를 타고 방송국으로 이동하면서 이연은 다시 한번 머릿속으로 오늘 진행될 경연 방식에 대해 떠올렸다.
하니엘과 MAYO,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CDP, 샤이걸스와 가을소녀, 그리고 원더존과 밀크티. 이렇게 네 팀이 한 번의 무대를 펼치게 될 예정이다.
순위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특별 평가단이 매긴 점수에 의해 결정된다고 했다.
‘그래도 블라인드 미션 때처럼 정체를 숨기고 무대를 펼쳐야 하는 부가적인 임무 같은 게 없어서 다행이네.’
사실 멤버들에게 말만 안 했을 뿐이지, 이연은 블라인드 미션 무대를 준비하는 데에 꽤나 고생했었다.
자신의 존재감을 숨긴다는 건 이연에게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음유시인이나 아이돌이나. 둘 다 스스로의 존재를 어떻게든 드러내고 알려야 하는 게 기본 바탕이지 않은가.
이걸 수십 년 동안 업으로 삼아 왔던 이연인데, 이제 와서 그것과 반대되는 걸 하라고 하니까 솔직히 속으로 많이 헤맸다.
그래서 2위라는 결과가 더 아쉬웠다.
그렇게 고생을 하면서 무대를 펼쳤는데, 아쉽게도 한 끝 차이로 지고 말았으니까.
반면, MAYO의 경우에는 어떻게든 오늘 1위를 차지하고 싶을 것이다.
‘지난번에 실격 처리 당했었으니까.’
두 번 연속 꼴찌는 안 된다.
머릿속으로 대충 시뮬레이션을 돌리려고 할 때쯤, 리샤가 이연에게 오늘의 촬영에 관해서 물었다.
“연아. 네가 보기엔 어떤 팀이 가장 무서울 거 같아? 아이비제이 선배님하고 CDP 선배님 팀 빼고.”
그쪽은 모두가 말하지 않아도 강적이라고 인정하는 팀이다. 그래서 리샤는 일부러 그쪽 팀은 따로 제외시켰다.
이연은 고민 없이 바로 답했다.
“밀크티, 원더존 선배님들.”
“어? 왜?”
리샤뿐만 아니라 근처에서 두 사람의 대화에 몰래 귀를 기울이고 있던 이연과 여솜도 관심을 보였다.
“우리는 둘 중에 샤이걸스, 가을소녀 선배님들 쪽이 더 강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맞아. 특히 샤이걸스 선배님들. 경연 프로그램 무대 처음인데도 엄청 잘하시던데? 저번에 블라인드 미션 때에도 완전히 허를 찌르는 전략을 들고 나오셨잖아.”
여기에 가을소녀의 탄탄한 팀워크까지 생각해 본다면, 아무래도 그쪽이 더 견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연이 밀크티, 원더존 팀의 손을 들어준 이유는 간단했다.
“그쪽 팀은 어떤 무대가 나올지 전혀 예상이 안 되니까. 그것 때문에 그래.”
복병 같은 느낌이다.
원더존이 상대적으로 다른 팀들에 비해서 기량이 많이 부족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대로 얕잡아볼 만한 팀은 아니다.
게다가 밀크티는 연예계에서 산전수전 공중전에 우주전까지 다 겪은 베테랑 중에서도 베테랑이다.
수많은 경험을 했을 그녀들인데. 걸파이트 시즌 2 같은 경연 방식의 프로그램에서도 어떻게 해야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분명 알 것이다.
신인의 패기와 백전노장의 경험이 아우러진 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사실 어느 팀이 어쩌고저쩌고하는 걸 논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우리 무대에만 집중하면 돼. 너무 다른 팀 의식하지 말고.”
가장 견제해야 할 상대는 다른 팀이 아닌 나 자신이다.
* * *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먼저 팀원들은 무대 의상부터 살피기로 했다.
대기실에 나란히 진열되어 있는 의상을 보자마자 아야가 ‘엑!’ 하는 소리를 냈다.
“우리, 스커트로 통일하기로 한 거 아니었어? 길이 짧게 해서.”
아야가 자신의 허벅지 반 정도 되는 위치를 직접 손으로 가리키면서 미랑에게 따졌다.
무대 의상도 팀원들 몇몇이 직접 의상팀과 논의해서 결정했기 때문이다
그 몇몇 중 한 명이 바로 미랑이었다.
“바지도 나쁘지 않잖아. 길이도 네가 방금 말한 것하고 비슷하고.”
“아니, 숏팬츠도 괜찮긴 한데…… 길이가 동일하다고 치마하고 바지는 느낌이 아예 다르잖아. 살랑살랑하면서 보일 듯 말 듯한 그 아슬아슬함이 좋은 건데. 왜?”
이유는 있었다.
이연이 미랑에게 걸었던 세 번째 조건이 바로 이거였기 때문이다.
이연은 MAYO가 주로 노출이 많은 의상을 즐겨 입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특히 아야가 자신의 몸매를 드러내는 의상류를 많이 좋아한다.
그래서 이연은 미랑에게 미리 이야기를 해두기로 했다.
웬만하면 그런 노출은 자제했으면 좋겠다고.
그리고 살결이 다 보여야 꼭 섹시하게 느껴지는 건 아니니까.
지금 무대 의상만으로도 여성의 성숙미를 충분히 발산해낼 수 있었다.
이제는 이연도 조금씩 여성스러운 의상에 적응하긴 했지만, 아직까지 초미니 스커트에 대한 거부감은 남아 있었다.
미랑이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는 아야와 달리, 하니엘 멤버들은 전부 알고 있었다.
이연의 입김이 세게 작용했다는 것을 말이다.
비아가 말을 아끼고 있는 이연 쪽으로 눈을 흘겼다.
“내가 언젠가 연이 언니만 엄청 짧은 치마 입히고 무대에 세울 거야.”
비아의 원대한(?) 계획 앞에서 이연은 여전히 강경한 태도를 유지했다.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당하진 않겠다고.
* * *
배가 살짝 드러나는 무대 의상을 보면서 이연은 마지막으로 자신의 전신을 체크했다.
하이힐은 이제 많이 익숙해져서 그런지 평소에도 신고 다니는 데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다.
“매니저님. 저, 잠깐 화장실 좀 갔다 올게요.”
“어, 그래. 갔다 와. 아직 녹화 시작하려면 멀었으니까.”
대기실을 나서기 직전, 미랑이 이연을 불렀다.
“연아. 나도 같이 가자.”
“네, 선배님.”
미랑이 먼저 춥다면서 자연스럽게 이연과 팔짱을 꼈다.
주변 여자들이 하도 이런 식으로 스킨십을 시도하니까 이연은 이제 자포자기 심정이 되었다.
반면, 미랑은 이연의 체온 덕분에 기분이 좋아진 모양인지 헤헤 웃었다.
“나, 보기와는 다르게 추위를 많이 타거든.”
“그러면 머리를 기르시는 게 더 좋지 않나요?”
오늘따라 미랑의 짧은 단발이 더 춥게 느껴졌다.
미랑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발로 머리를 자른 이유가 있었다.
“지금 작업하고 있는 앨범 타이틀곡 때문에. 내가 센터 맡기로 했는데, 긴 머리보다는 짧은 머리가 곡에 더 잘 어울리지 않겠냐는 의견이 많아서 과감하게 잘랐어.”
곡에 맞는 이미지를 위해서라면 외형 변화쯤은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이것이 미랑이 품은 가수로서의 마음가짐이다.
하니엘의 막내즈 멤버, 유키도 어떻게 보면 미랑의 이런 점과 닮았다.
“연이, 너는? 머리 자를 생각 없어? 길면 관리하기도 불편하고 그렇잖아.”
“저는 오히려 지금 머리가 더 편해요.”
“그래? 다른 애들은 머리 한번 자르고 나니까 너무 편해서 다시 기르기 싫다고 그러던데.”
이연은 남자였던 때에도 장발을 유지했었다.
오히려 짧게 자르면 많이 어색할 거 같았다.
이연을 지그시 바라보던 미랑이 금세 고개를 가로저으면서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을 철회했다.
“지금 모습도 충분히 예쁘니까. 안 잘라도 되겠다.”
미랑이 손을 뻗어서 이연의 앞머리를 직접 정리해 줬다.
이때, 한 남자가 그녀들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착한 선배네, 미랑.”
이연의 귀에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고개를 뒤로 돌린 미랑이 남자의 정체를 확인하자마자 크게 놀랐다.
“이은솔! 네가 왜 여기 있어?”
“나도 요 근처 스튜디오에서 오늘 촬영 있어서. 걸파이트 스튜디오가 바로 옆쪽이라고 들어서 설마 했는데 이렇게 딱 마주치네.”
“누굴 만나려고 온 건데. 설마 나야?”
“글쎄다.”
“어머? 빈말이라도 ‘맞아’라고 말해줘야지. 여자 마음을 너무 모르네.”
“농담으로 한 거야.”
벡스가 MAYO보다 선배 그룹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이은솔과 미랑은 서로 편하게 말을 놓고 있었다.
모 예능 프로그램을 통해서 둘이 동갑이라는 걸 알게 된 이후부터 지금까지 쭉 친구처럼 지내오는 중이다.
미랑과 인사를 겸해서 짧게 대화를 나누던 이은솔의 시선이 바로 근처에 있는 이연에게 향했다.
무대 의상을 입고 풀 메이크업을 한 그녀의 모습에 이은솔은 넋을 잃을 정도였다.
이연이 먼저 고개를 숙이면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몸을 숙이자 상의 안쪽이 살짝 보였다.
이은솔은 다급히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면서 말했다.
“어! 아, 안녕. 오늘…… 예쁘네. 메이크업 잘 됐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
“…….”
곧바로 침묵이 이어졌다.
미랑은 두 사람 사이에 흐르는 수상쩍은 기류를 감지한 모양인지 갑자기 이연의 팔을 좀 더 강하게 붙잡으면서 자기 쪽으로 끌어왔다.
“안 줘.”
“응? 뭐를?”
이은솔이 물음표를 띄웠다.
그러자 미랑이 이은솔을 찌릿 노려보며 말했다.
“너한테 연이 안 줄 거라고.”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나하고 연이하고…… 아직 그런 관계 아니라고.”
“‘아직’이라고?”
“아니, 그런 뜻으로 한 말이 아니고. 그러니까…… 아무튼 이상한 오해하지 마.”
여자 아이돌에게 스캔들 기사 하나하나가 얼마나 치명적인지 이은솔도 안다.
물론 이건 보이 그룹도 마찬가지다.
괜히 근처에서 기자가 들을 수도 있으니까. 서로서로 입조심을 하는 게 좋다.
마침 벡스의 매니저가 이은솔을 찾기 시작했다.
“나 먼저 갈게. 오늘 무대 힘내고. 연이도…… 파이팅이야. 응원할게.”
“네. 열심히 할게요.”
이연이 다시 한번 고개를 숙이면서 그에게 짧은 작별 인사를 건넸다.
황급히 걸음을 옮기는 이은솔을 보면서 미랑이 혀를 빼꼼 내민 채 메롱을 보냈다.
“연아. 남자들은 다 늑대니까 항상 조심해. 알았지?”
“네, 선배님.”
그렇게 따지면 이연도 과연 늑대에 속하는 걸까?
애매한 문제다.
* * *
무대가 시작되기 전에 각 팀의 리더들이 다시 한번 스튜디오에 올랐다.
오늘의 무대 순서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숫자가 적힌 카드를 뽑으면 된다.
미랑이 작은 목소리로 옆에 서 있는 이연에게 물었다.
“한 명만 가서 뽑으면 될 거 같은데. 누가 뽑을까?”
“제가 양보할게요. 선배님이 뽑으세요.”
“그래, 알았어.”
이연의 눈에는 어느 카드에 어떤 숫자가 적혀 있는지 다 보이긴 했지만, 굳이 먼저 나서진 않았다.
어차피 1, 2, 3, 4번밖에 없기도 하고. 펼쳐지는 무대 숫자가 적은 만큼 어떤 순서든 큰 차이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에는 그냥 마음 가는 대로 뽑는 게 좋다.
미랑이 고른 숫자 카드는 바로.
“3번이네요.”
그녀가 직접 카드를 확인시켜주면서 자신이 뽑은 숫자가 3이라는 걸 알려줬다.
첫 번째 무대는 샤이걸스와 가을소녀 팀으로 정해졌다.
두 번째는 아이비제이 트윙클과 CDP.
마지막이 밀크티, 원더존의 무대다.
‘가장 기대되는 팀이 맨 마지막에 걸려버렸네.’
이연은 여전히 밀크티와 원더존의 조합이 어떤 무대를 만들어낼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여러모로 걱정도 들었다.
윤채미와 원더존 멤버들이 대선배님인 밀크티를 많이 어려워했기 때문이다.
‘그런 것치고는 오늘 표정은 좋아 보이는데.’
그래서인지 그녀들의 무대가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