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제49화. 선배와 후배(3)
파트너 미션 때 사용될 ‘이별이라 말하지 마’ 하니엘, MAYO 버전을 녹음하기 위해 진세혁 프로듀서가 부스 앞에 자리를 잡았다.
각 멤버들이 자신의 파트별로 번갈아 가면서 부스 안과 밖을 왔다 갔다 했다.
“오케이, 다음은 미랑이가 해볼까?”
“네.”
진세혁의 말에 미랑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처럼 거침없이 부스 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방금 전에 녹화를 마친 비아와는 차원이 다른, 당당함마저 느껴지는 그런 모습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비아가 자신에게 손부채질을 해주는 시우 옆에 바짝 붙어 앉으면서 말했다.
“난 사람들 많아서 엄청 긴장되던데. 미랑 선배님은 확실히 다르시네.”
물로 목을 축인 뒤에 헤드셋을 끼고 부르르르르 소리를 내면서 입을 풀었다.
미랑은 MAYO에서 리더와 랩을 맡고 있다.
이번 ‘이별이라 말하지 마’ 레코딩에서도 그녀는 시우와 함께 랩 파트를 소화할 예정이다.
그래서일까. 같은 래퍼 포지션이라서 그런지 다른 멤버들에 비해 유독 시우가 미랑의 레코딩 과정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옆에서 리샤가 이런 시우의 허벅지를 가볍게 찰싹 터치했다.
“선배님이 하는 거 보고 잘 따라 해봐.”
“따라 할 수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시우가 랩을 배울 때 봤었던 영상 중 하나가 바로 눈앞에 있는 선배, 미랑이었다.
그녀의 영상을 보면서 걸스힙합이라는 장르에 푹 빠졌던 적도 있었다.
동경의 대상이 눈앞에서 직접 라이브로 노래를 소화한다는데. 시우는 마치 마라톤을 뛴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미랑이 손으로 오케이 사인을 보내자, 스태프가 반주를 흘려보냈다.
리듬을 타듯 어깨를 주기적으로 들썩이던 미랑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사랑을 기대했어.
영원할 거라고 믿었어.
하지만 네가 준 건 despair.
내 앞에서 당장 꺼져.
Get lost.
포인트를 줄 수 있는 부분은 확실히 힘을 주면서 또박또박 가사 전달력까지 챙겨가는 미랑의 모습에 진세혁 프로듀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미랑이 확실히 잘해. 그렇지?”
“4세대 걸그룹 아이돌 중에서는 거의 원탑일걸요?”
힙합을 하는 사람들 중에서 아이돌을 싫어하는 래퍼들조차도 미랑의 실력은 인정하는 편이었다.
이연도 미랑의 라이브 랩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접하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잘하네.’
확실히 실력이 있는 리더다.
이다음은 바통을 이어서 메인보컬을 맡게 된 아야가 마이크 앞에 서게 되었다.
그녀는 미랑보다도 더 빠르게 준비를 마쳤다.
흘러나오는 반주에 맞춰 곧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사랑이 어떻게 그렇게 변하니.
아름다운 이별이라 말하지 마.
너와의 기억을 추억으로 남기고 싶지 않아.
아야 또한 미랑보다 더 잘하면 잘했지, 절대로 뒤처지는 실력은 아니었다.
사실 하니엘 멤버들은 내심 이연이 메인보컬을 맡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러나 라이브를 소화하는 아야를 보고 있으니 남아 있던 아쉬움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두 사람의 차례가 끝나고.
“다음, 연이 순서지?”
“네.”
가사가 적힌 종이를 들고 부스 안으로 들어간 이연도 선배들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목을 풀었다.
“음악 주세요.”
이연의 지시에 따라 스태프들이 손을 움직였다.
너의 일방적인 이별 통보가
오늘도 내 마음을 울려.
cry cry.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
너를 만나기 전으로.
이별의 아픔에 울부짖는 여성의 속내를 표현하듯, 이연은 가사에 감정을 담아 노래했다.
듣는 이들 모두가 다 이연이 노래를 부를 때에는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노래가 아니라 마치 리얼함이 가득 느껴지는 연기를 접하는 그런 기분이었다.
사랑, 이별, 그리고 헤어짐에 대한 슬픔을 노래하는 곡인 만큼, 이연은 평소보다 좀 더 감정을 살리고 싶었다.
슬픈 곡인데 웃으면서 담담하게 노래를 부르면 보는 사람들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레코딩 단계에서부터 굳이 이렇게 혼신의 힘을 다할 필요는 없지만, 이연은 생각이 달랐다.
노래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그곳이 곧 무대다.
무대 위에서는 늘 최선을 다한다. 이것이 가수로서 이연의 신념이다.
진세혁 프로듀서가 쓴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너무 잘 불러 버리면, 내가 할 일이 없어지는데.”
맡고 있는 가수가 재능과 실력이 넘쳐서 탈이다.
* * *
레코딩을 포함해서 오늘의 일정을 모두 마친 두 그룹.
MAYO는 본인의 회사로 돌아가기 전에 하니엘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오늘 고생했고. 내일은 우리 회사에서 보자.”
“네. 들어가세요, 선배님!”
“내일 뵐게요!”
떠나기 전에, 아야가 MAYO 멤버들에게 ‘잠깐만’이라고 말했다.
그런 뒤, 갑자기 이연에게 손짓했다.
“가까이 와 봐.”
“저요?”
아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연이 그녀 쪽으로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아야가 이연의 귓가에 어떤 말을 속삭였다.
무슨 말을 했는지,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오직 이연만 알고 있다.
그녀는 아야를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선배님.”
“…….”
입을 꾹 닫은 채 몸을 돌려 다시 MAYO 멤버들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온 아야.
미랑이 그녀를 보면서 농담조로 말했다.
“네가 이연이 대놓고 괴롭히려는 줄 알고 바짝 긴장했었어.”
“나 그렇게 나쁜 선배 아니거든?”
물론 미랑도 잘 안다.
틱틱대는 면이 있어도, 본성은 절대로 나쁜 아이가 아니다.
그래서 MAYO가 오랫동안 큰 문제 일으키지 않고 그룹을 유지할 수 있던 거였다.
예지가 팔꿈치로 아야를 한 차례 찌르면서 물었다.
“우리 연이한테 뭐라고 한 거야?”
“우리 연이? 언제부터 이연이가 ‘우리 연이’가 됐어.”
“내 명예 여동생 삼기로 했으니까.”
아야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예지가 MAYO의 앨범 활동으로 한창 바쁜 와중에 꼭 챙겨보던 티비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게 바로 SSS, 스페셜 스타 스테이지였다.
거기서 예지는 이연이 최애였다.
그래서 미랑이 처음에 하니엘과 파트너 미션을 수행하고 싶다고 멤버들에게 말했을 때, 예지는 누구보다도 적극적으로 찬성했다.
레코딩 과정에서도 예지는 빼놓지 않고 이연에게 관심을 보였다.
뭐 먹고 싶은지. 최근에 재미있게 보는 영화나 드라마는 뭔지. 이런 것들을 계속해서 물어봤다.
그럴 때마다 아야가 눈을 흘기면서 그녀를 만류했다.
“네가 자꾸 그렇게 달라붙으려고 하니까 애들이 부담스러워하잖아.”
“거짓말. 애들도 내가 먼저 다가오는 거 좋아한다고 그랬단 말이야.”
“야. 그러면 선배들 앞에서 설마 ‘싫은데요’라고 말하겠니? 응? 생각을 좀 해 봐.”
“아니라니까. 연이도 분명 나 좋아할 거야.”
“아주 제대로 착각하고 있네.”
“뭐?”
또다시 시작된 두 사람의 투닥거림에 막내 오린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만들 좀 해, 언니들. 내가 다 창피해 죽겠어.”
멤버들 중에서 유일하게 둘만 동갑내기인데. 어쩜 서로 이렇게 생각이 다른지, 오린은 매번 신기할 따름이었다.
미랑은 예지의 후배 사랑은 둘째치고, 아야가 이연에게 뭐라고 말했는지가 궁금했다.
“연이가 웃는 거 보니까 나쁜 말은 아니었던 거 같은데.”
아야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그냥…… 노래 잘한다고 말했을 뿐이야.”
아야가 노래 실력으로 누군가를 인정하는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그만큼 그녀도 자신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한 편이었다.
게다가 후배를 상대로 이런 태도를 보인 것은 미랑이 알기엔 처음이었다.
역시 하니엘에게 먼저 동맹 제안을 맺기를 잘했다. 이런 생각이 미랑의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 * *
파트너 미션을 하루 앞둔 날.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하는 각 리더들이 다시 한번 스튜디오에 모이게 되었다.
내일 무대에 임하는 포부를 담은 짧은 인터뷰 영상을 촬영하기 위함이었다.
파트너 미션이다 보니 이번에는 두 팀의 리더의 모습이 한 화면에 같이 담길 예정이었다.
미랑과 함께 나란히 메이크업을 받던 이연은 바깥에서 들려오는 스튜디오의 소리에 잠시 귀를 기울였다.
“네. 이번에도 저희가 무조건 1위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려고요.”
아이비제이의 리더, 혜원의 목소리였다.
미랑도 앞에서 녹화하고 있는 사람이 혜원임을 알아차렸는지 살짝 긴장하는 모습을 보였다.
미랑은 아이비제이에 강한 라이벌 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과 진지함으로 얼굴을 물들이고 말았다.
그러자 메이크업 담당이 화장품을 들고서 미랑 본인도 눈치 못 채고 있는 것을 지적해 줬다.
“미랑 씨. 미간에 살짝 주름지고 있어요.”
그제야 미랑은 다시 표정을 풀었다.
겨우 메이크업을 마무리 지은 두 사람은 아직도 진행되고 있는 아이비제이 트윙클, CDP 팀의 인터뷰 촬영을 카메라 뒤에서 조용히 지켜봤다.
황이전 PD가 두 사람에게 공통 질문을 건넸다.
“서로 간의 호흡은 어떤가요?”
혜원이 리브를 바라봤다.
먼저 말해도 괜찮다는 뜻이 담긴 시선이었다.
리브가 CDP 멤버들을 대표해서 말했다.
“선배님들께서 저희가 어떻게 연습하면 좋을지, 큰 틀을 잡아주신 덕분에 무대 준비가 엄청 수월했어요. 만약에 선배님들 안 계셨으면 저희는 아직도 갈팡질팡하고 있었을 걸요?”
황이전 PD가 하하 웃으면서 물었다.
“바로 내일이 녹화날인데, 설마 그럴까요.”
“농담이 아니라 정말이에요. 저희 애들이 특히 많이 산만한 편이어서 사소한 거라도 뭐 하나 정하려면 며칠이 걸리거든요. 그런데 선배님들이 딱 ‘이거 하면 돼’라고 해주시니까 오히려 좋았어요.”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인터뷰를 마친 혜원과 리브는 스태프들에게 고생했다는 말을 잊지 않고 건넸다.
도중에 혜원이 다음 인터뷰 차례인 이연과 미랑의 모습을 뒤늦게 발견했다.
“어머, 연이 씨! 미랑이도 왔네?”
혜원이 미랑과 가벼운 포옹을 나눴다.
미랑은 어색한 미소를 띠면서 그녀에게 물었다.
“선배님. 무대 준비는 잘 되어가고 있어요?”
“응. 근데 언제까지 선배님이라고 부를 거야? 그냥 편하게 말 놓아도 되는데.”
비록 데뷔 연도는 아이비제이가 빠르지만, 미랑은 혜원과 같은 기수로 연습생 시절을 보냈다.
그래서 혜원은 미랑의 이런 존댓말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사람들 보는 앞에서는 존댓말 써야죠. 선배님이시니까요.”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혜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좀 더 미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했지만.
“선배님! 저희, 이제 가야 되는데…….”
리브가 그녀를 찾는 소리에 무거운 발걸음을 떼야 했다.
“미안, 나 먼저 가볼게.”
“괜찮아요. 그럼 내일 뵐게요, 선배님.”
“미랑이도. 파이팅!”
종종걸음으로 현장을 벗어나는 혜원을 보면서 미랑은 가볍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연아.”
“네, 선배님.”
“나, 내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이기고 싶어.”
이벤트성 무대라 할지라도 상관없다.
아이비제이를 넘어서고 싶다.
이것이 미랑과 MAYO가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한 주된 목적이다.
이연이 닫았던 입을 다시 열었다.
“그렇게 될 거예요. 반드시.”
마침 이연과 하니엘도 아이비제이에게 갚아줘야 할 게 있었다.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는 두 팀.
이연은 내일 사람들에게 보여줄 그녀들의 합동 무대가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