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환생했는데 걸그룹이 되었다-175화 (175/299)

175화

제48화. 동맹 제안(7)

그 많고 많은 인물 중에 하필이면 장고윤이 직접 음료 심부름을 하게 될 줄은 이연도 미처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하니엘이 렛플 엔터테인먼트를 찾아온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장고윤이 일부러 자신이 허드렛일을 맡겠다고 지원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이연과 장고윤의 재회가 성사되었다.

장고윤은 이연을 향해 슬며시 눈웃음을 보내면서 말했다.

“하니엘분들을 이렇게 직접 보게 되니까 너무 좋네요. 다들 실물이 훨씬 예쁘고 귀여우세요.”

멤버들이 옅은 미소를 지으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차례로 건넸다.

말문이 트인 김에 미랑이 멤버들에게 장고윤을 소개했다.

“우리 회사 캐스팅매니저님이셔.”

“어머, 그래요?”

“전혀 몰랐어요!”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리기 위함인지 미랑이 장고윤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나갔다.

“만약에 장 실장님이 너희 데뷔하기 전에 길거리에서 마주쳤다면 무조건 말 걸으셨을걸? 장 실장님, 예쁘고 귀여운 여자들 엄청 좋아하거든.”

장고윤의 취향이 가득 반영된 걸 그룹이 렛플 엔터테인먼트에 꽤나 많았다.

눈썰미도 좋은 편이었기에 그녀가 캐스팅해서 성공한 아이돌도 업계에서 꽤 되는 편이었다.

이연도 장고윤의 눈썰미는 인정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가치를 먼저 알아봐 준 사람이니까.

그러나 지금은 장고윤과의 재회가 영 달갑지 않았다.

표정 관리를 하고 있는 사이에 장고윤이 이연의 앞에 미리 준비한 음료 잔을 내려놓았다.

“안녕하세요, 이연 씨.”

“……안녕하세요.”

MAYO 팀에서 메인보컬을 맡고 있는 아야가 장고윤에게 농담조로 말했다.

“실장님. 이연 씨 노리고 계시는 거예요?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지시는데요.”

노리고 계시냐는 단계가 아니라, 이미 과거에 이연한테 자신의 전화번호가 적힌 명함까지 줬다.

여기서 짧게나마 미팅도 했었고 말이다.

이연은 장고윤이 뭐라고 대답할지 주시했다.

의미심장한 미소를 한 차례 흘리던 장고윤은 아야에게 이렇게 답했다.

“마음 같으면 우리 쪽으로 데려오고 싶지. 근데 이연 씨하고 오늘 ‘처음’ 만났는데, 내가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그리고 하니엘로 승승장구하고 계시는 분인데. 그러면 큰일 나지.”

유독 처음이라는 단어를 강조해서 말했다.

이연은 사람들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

사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다.

장고윤이 이연과 예전에 접선을 가진 적이 있다는 게 이곳에서 밝혀지면, 그녀에게도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이미 LC 엔터테인먼트에 소속되어 있는 연습생을, 단지 잘나간다는 이유만으로 중간에 가로채 오려고 한 셈이니까.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려 했다는 걸 장고윤 본인도 잘 알고 있다. 그러니 이연이나 장고윤이나, 이전의 일은 없던 셈으로 치는 게 본인에게도 득이다.

쟁반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기 직전, 장고윤은 이연에게만 들릴 수 있도록 아주 작게 속삭였다.

“나중에 또 봐요, 이연 씨.”

“…….”

이연을 향한 장고윤의 집착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 * *

이연 혼자에게만 해당되는 잠깐의 소란이 끝나고.

카메라가 돌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파트너 미션에 대비한 아이디어 회의가 시작되었다.

그 전에 파트너 미션에 관한 추가 룰을 다시 한번 짚고 넘어가기로 했다.

“2개의 팀이 하나의 무대를 꾸미면 된다고 했지…… 선곡은? 우리 마음대로였나?”

미랑의 물음에 우미가 빠르게 답했다.

“네, 선배님. 저희 팀 노래도 괜찮고, 타 그룹 노래도 상관없다고 들었어요.”

“그러면 우선은 콘셉트부터 정해야겠네. 콘셉트가 나와야 여기에 어울리는 곡을 고를 수 있으니까. 혹시 아이디어 있는 사람?”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비아가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저요, 선배님!”

“비아는 늘 적극적이어서 좋더라. 말해봐.”

“MAYO 선배님들처럼 센 곡으로 해보고 싶어요!”

걸스힙합의 선두 주자라 할 수 있는 MAYO.

한 번쯤은 그녀들처럼 센 언니 캐릭터로 무대에 서보고 싶다는 욕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MAYO와 같은 팀이 되었으니, 비아는 이 기회를 잘 살려보고 싶었다.

그러나 여기에 반대되는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었다.

MAYO의 서브보컬이자 가장 연장자인 예지였다.

“나는 하니엘하고 모처럼 같은 팀 되었으니까 청순 콘셉트가 가장 잘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MAYO가 못 해본 콘셉트였다. 그래서 기회가 왔을 때 한번 시도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주장이 갈릴 때가 가장 난감하다.

이럴 때에는 중심을 잡아주면서 의견을 조율해 줄 역할을 맡는 사람이 필요하다.

평상시에는 이연이 그걸 맡았을 테지만.

이번 그룹 미션은 선배 그룹과 같은 팀을 짜서 행동해야 했기에 이연이 먼저 미랑에게 의견을 구했다.

“미랑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글쎄. 그럼 세부 항목으로 나눠서 투표해 볼래? 장르별로 구분 지어서 하는 게 명확하고 좋겠지?”

선배라는 이점을 내세우면서 충분히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무대를 꾸밀 수 있었을 텐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MAYO는 하니엘의 의견을 최대한 존중해 주려는 태도를 보였다.

카메라 앞이라서 일부러 그런 건지, 아니면 원래부터 MAYO 멤버들의 성향이 이랬는지는 잘 모른다.

그래도 서로 합의점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건 긍정적인 자세였다.

가장 대중적이라 할 수 있는 댄스를 시작으로 디스코, 록, 로큰롤, 발라드, 심지어 트로트까지도 넣었다.

장르가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그만큼 선택의 폭이 넓어지니까.

그래서 떠오르는 걸 최대한 적어서 넣기로 했다.

총 11명의 멤버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투표용지를 작성했다.

무기명 투표인 만큼 누가 어떤 장르에 투표했는지 감추는 게 중요했다.

투표가 끝난 뒤에 MAYO에서 막내 포지션을 맡고 있는 오린이 화이트보드 판을 끌고 왔다.

투표는 이연과 미랑, 두 리더가 나와서 진행하기로 했다.

미랑이 용지를 확인하고, 이연이 그것을 받아 기록하는 역할을 나눠서 맡았다.

첫 번째 용지를 확인한 미랑이 직접 종이를 보여주면서 말했다.

“댄스 1표.”

글씨체를 보자마자 하니엘 멤버들은 누군지 눈치챈 모양인지 어느 한 명을 집중적으로 바라봤다.

시선이 쏠린 곳은 바로 시우였다.

멤버들끼리 알고 지낸 지 오래된 건 아니지만, 그 짧은 기간에 워낙 밀도 있게 지내서 그런지 이제는 필기체만 봐도 누가 누군지 알 정도였다.

곧바로 두 번째 표가 공개되었다.

“디스코 1표.”

이번에는 MAYO 멤버들의 시선이 아야 쪽으로 움직였다.

시우에 이어서 지목을 당한 아야가 볼멘소리를 냈다.

“이거, 무기명으로 한 의미가 있어?”

어차피 이런 식으로 누가 누군지 다 알게 될 텐데 말이다.

모든 투표용지가 공개된 결과.

“댄스가 다섯 표로 가장 많네.”

사실 댄스 장르가 제일 무난한 선택지였다.

MAYO와 하니엘, 두 그룹에게도 댄스가 가장 편했다.

장르가 정해졌으니, 이제 선곡 회의에 들어갈 차례다.

“걸미츠걸 선배님들 노래는 어때? 인원이 딱 우리하고 맞는 11명이라서 안무 짤 때 편할 거 같은데.”

“그러면 ENB도 있지 않아요? 여기도 11명으로 기억해요. 그리고 장르도 댄스 고정이라서 곡 찾기도 쉽고.”

“유스풀 선배님들 노래는요? SSS 때 저희가 무대 꾸밀 때 선배님들 노래 다 들어봤거든요. 근데 좋은 노래가 엄청 많았어요.”

“웬만하면 멤버 숫자가 11명인 그룹으로 하는 게 좋지 않을까? 준비할 수 있는 기간이 넉넉한 것도 아니니까.”

회의에 참가하는 사람이 11명이나 되니까 다양한 의견들이 나왔다.

서로 의견이 갈릴 때에는 역시 아까와 같은 민주주의식 절차가 필요했다.

“그럼 투표하자.”

“또?”

미랑의 제안에 아야가 질색팔색을 했다.

제일 확실한 수단이긴 하지만, 아야는 투표로 정하자는 미랑의 말을 좋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이유가 있었다.

“난 걸미츠걸 선배님 노래로 하는 게 무조건 좋아 보이는데.”

본인의 의견이 너무 확고해서였다.

만약에 투표로 들어가면, 아야의 의견이 채택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으니까. 그래서 그녀는 그냥 여기서 정하는 게 낫다고 보고 있었다.

보이지 않는 선배의 압박이 펼쳐졌다.

하니엘 멤버들은 서로 눈치를 보느라 바빴다.

이연은 문득 원더존의 윤채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데뷔 연도 차이가 심하게 나는 선배 그룹과 같은 팀을 하게 될 경우, 의견 충돌이 벌어졌을 때 후배 입장에서 제대로 말을 못 하게 될 거라고.

그 일이 시작 단계에서부터 벌어지게 된 셈이었다.

이연도 물론 이런 일이 한 번쯤은 일어날 거라고 예상했었다.

그럼에도 아이비제이에 이어 가장 선배 그룹인 MAYO를 택한 이유가 있었다.

그 이유를 증명하려는 듯이 미랑이 입을 열었다.

“투표로 할 거야. 그리고 여기서 미리 말해두겠는데, 선배라고 무조건 내 말대로 따라야 한다는 건 적어도 우리들 사이에선 없었으면 좋겠어. 11명 모두가 다 공평하게, 평등하게 가는 거야. 알았어?”

MAYO 내에서 미랑의 입지는 이연과 거의 비슷했다.

미랑을 중심으로 해서 추가로 멤버들이 합류하는 형태로 MAYO 팀이 결성되었기 때문에 그녀의 영향력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확실하게 무게중심을 잡는 미랑의 말에 아야는 고집을 꺾어야만 했다.

다시 미소를 되찾은 미랑이 하니엘 멤버들에게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단다’라고 말하듯이 다시 활짝 미소 지었다.

“그럼 우리, 다시 투표해 볼까?”

하니엘 멤버들은 생각했다.

고집을 부리는 아야보다 웃는 얼굴로 말하는 미랑이 더 무섭다고.

* * *

기나긴 회의 끝에 ENB의 노래 중에서 하나를 택하기로 결정했다.

오늘의 일정을 마치고 다시 차에 올라탄 하니엘 멤버들.

리샤가 시트에 몸을 묻으면서 방금 겪은 회의에 대한 소감을 짧고 굵게 말했다.

“음방보다 더 힘들었어…….”

멤버들도 리샤의 생각에 공감하는 모양인지 고개를 끄덕끄덕 움직였다.

선배들과 같은 팀을 꾸린다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일 줄은 몰랐던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이런 경험은 오늘이 처음이었을 테니까.

다만 이연은 아니었다.

이전에도 선배 음유시인들과 같이 무대를 꾸몄던 경험이 많았기에 방금 있었던 기획 회의가 힘들다는 느낌은 거의 받지 않았다.

맨 뒤에 앉은 유키가 미랑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근데 미랑 선배님 덕분에 그나마 낫지 않았어요? 미랑 선배님 아니었으면 저희, MAYO 선배님들한테 이리 끌려다니고 저리 끌려다니고 그랬을 거 같은데.”

아무리 한 성질 하는 유키라 할지라도 선배들 앞에서 내숭 가면을 대놓고 벗을 순 없었다.

그래서 미랑이 중심을 잡아주는 역할을 자처한 게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멤버들은 아직 모르고 있었다.

이연과 미랑이 나눴던 비밀 협약에 대해서.

파트너 미션이 공개되고 잠시 녹화가 중단되었을 때.

원더존과 CDP가 이연에게 동맹 제안을 하러 온 다음에 미랑이 그녀를 찾았다.

미랑은 여전히 하니엘과의 동맹 관계를 원하고 있었다.

이때 이연은 미랑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만약 오늘처럼 의견 조율에 난항을 겪을 때. 미랑이 나서서 공평함을 유지하는 역할을 맡아달라고.

이것이 이연이 내건 조건 중 하나였다.

이연은 절대로 손해 보는 동맹은 맺지 않는다.

그녀가 미랑에게 걸었던 조건은 총 셋.

‘아직 두 개 남았네.’

과연 미랑이 그걸 지킬 수 있을지.

이연은 당분간 조용히 지켜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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