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2화
제48화. 동맹 제안(4)
방송이라는 건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전혀 알 수가 없다.
그래서 연예계 관계자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게 바로 생방송이다.
실시간으로 방송이 나가는 와중에 어떠한 사건 사고가 벌어지는지 전혀 예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촬영이 시작되자마자 사고라도 난 줄 알았었다.
하지만 잠시 뒤.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태연한 얼굴로 등장하는 민주린을 보며 이연과 각 팀 멤버들은 속았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큐시트를 든 민주린이 크게 웃으면서 말했다.
“제작진분들이 분위기 너무 축 처져 있는 거 같다고 해서 준비한 서프라이즈예요. 다들 긴장 풀고. 너무 딱딱하게 굳어 있잖아요.”
서프라이즈치고는 너무 본격적이라서 문제였다.
이연은 무의식적으로 모았던 마나 덩어리를 다시 없애느라 바빴다.
만약에 정말로 사고였다면, 이연은 놀이공원에서 아이를 받아낼 때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시선이 많든 적든 마법의 힘을 사용하고 볼 생각이었다.
사람의 목숨보다 중요한 건 없으니까.
‘그래, 차라리 한번 놀래킴 당하고 마는 게 낫지.’
금세 평소의 이연으로 돌아온 것과 달리, 멤버들은 아직도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바빴다.
현장이 어느 정도 정리되고 난 이후에 민주린이 각 멤버들에게 그간의 근황을 묻는 토크를 이어갔다.
블라인드 미션에서 당당하게 1위를 차지한 팀, 아이비제이 트윙클부터.
“아이비제이 분들은 어땠나요? 들어보니까 블라인드 미션 1위 한 날에 다른 멤버들이 세 분을 위해서 축하 파티 열어줬다던데.”
민주린은 아이비제이 트윙클로 데뷔할 셋뿐만 아니라 다른 멤버들과도 두루 친분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정보를 흘려줄 사람은 많았다.
세 사람은 민주린의 물음에 사실대로 답했다.
“네. 숙소 들어가니까 멤버들이 케이크하고 먹을 거 다 세팅해 뒀더라고요.”
“그날 오랜만에 폭식했어요!”
“트레이너분들 입장에선 별로 좋지 않은 날이었겠네요.”
민주린의 마지막 말에 세 멤버는 어색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다음으로 2위를 차지했던 하니엘을 만나볼까요. 블라인드 미션에서 간발의 차이로 1위 자리를 놓쳤는데. 많이 아쉬웠죠?”
이연이 대표로 마이크를 들었다.
“아쉽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그래서 이다음 미션에 반드시 1위 해서 이 아쉬움을 풀 생각입니다.”
“오, 파이팅 넘쳐서 보기 좋네요. 저도 항상 응원할게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에서는 베네핏의 유무가 굉장히 중요하다.
어느 팀이 먼저 유리한 고지를 선점할 수 있느냐가 갈리기 때문이다.
이 사소한 차이 하나가 순위 변동을 일으킬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무조건 열심히 할 수밖에 없다.
하니엘뿐만 아니라 다른 팀들 역시 1위를 향한 의욕을 불태웠다.
한번 서로 경합을 벌이고 난 다음이라 그런지 확실히 스튜디오 공기가 처음과 많이 달랐다.
“그럼 지금부터 여러분들이 가장 궁금해할 두 번째 그룹 미션 내용을 공개하겠습니다. 그전에 여러분들에게 물어볼 게 있는데요.”
민주린의 멘트에 따라 참가자들 각자의 머릿속에 물음표가 피어올랐다.
“여러분들은 ‘파트너’라는 단어를 들으면 무슨 생각이 먼저 드나요?”
“파트너…….”
이때, 이연이 뒤에 앉아 있는 비아의 다리를 강하게 쿡! 하고 찔렀다.
“손들고 말해. 이럴 때 자기 비중 챙겨야지.”
이연은 리더다 보니 팀을 대표해서 말할 기회가 많았다.
하지만 다른 멤버들은 그렇지 못했다.
프로그램 내에서 멤버들의 병풍화를 막기 위해 이연은 막내에게 조금이라도 더 방송에 나올 수 있는 기회를 양보했다.
사람들 앞에서 기운차게 나서는 건 비아의 특기다.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인 비아가 ‘저요!’라고 외치면서 손을 들려고 하던 사이.
가을소녀 팀 멤버와 때마침 타이밍이 겹치고 말았다.
저쪽에서도 이연과 같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있었나 보다.
민주린이 직접 교통정리에 나섰다.
“비아 씨가 좀 더 빨랐네요. 비아 씨 이야기 들어본 다음에 연하 씨 말도 들어볼게요.”
먼저 발언권을 넘겨받은 비아였지만.
“어, 그러니까…… 저기…….”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라고 말할지 생각하는 것보다 손이 먼저 움직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럴 때 필요한 건 팀워크였다.
근처에서 시우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믿음직한 친구, 신뢰할 수 있는 동료, 이런 거.”
“믿음직한 동료, 신뢰할 수 있는 친구가 떠오릅니다!”
단어 순서들이 좀 바뀌긴 했지만, 그래도 얼추 뜻은 통했으니까 됐다.
“연하 씨는요?”
“저는 회사끼리 파트너 협약 맺었다는 기사 날 때 보던 그 단어가 먼저 떠올랐어요.”
“네. 상거래에서도 사용되는 용어죠. 두 분 다 맞아요.”
가을소녀 리더, 초영이 연하에게 ‘잘했어’라는 뜻으로 엄지를 추켜세웠다.
두 사람을 다시 자리에 앉힌 민주린이 방금 언급한 파트너를 두고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아이돌 활동에서도 파트너란 요서는 굉장히 중요하죠. 팀과 소속사, 더 세밀하게 들어가서 멤버들 간의 파트너십도 그렇고요.”
신뢰할 수 있는 자들의 존재는 인생에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그만큼 파트너란 단어의 필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이번 두 번째 미션 역시 이것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름하여…….”
민주린이 말끝을 흐리는 사이, 그녀의 뒤에 위치한 화면에 커다란 글자가 새겨졌다.
[파트너 미션]
블라인드 미션에 이어 두 번째 그룹 미션의 정체가 마침내 공개되었다.
그럼에도 이연은 첫 번째 그룹 미션 때처럼 이번에도 어떤 내용일지 감이 잘 안 잡혔다.
다른 사람들도 추측이 잘 안 된다는 반응을 보였다.
단체로 고개를 갸우뚱하는 그녀들을 위해서 민주린은 미션에 관한 내용을 바로 공개했다.
“여러분들은 지금부터 자신의 팀 이외에 다른 팀과 파트너십을 맺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이번 파트너 미션은 2 대 2 대 2 대 2. 팀전입니다.”
다른 팀과 협업하라.
생각지도 못한 내용에 아이돌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 와중에 이연은 MAYO의 미랑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난번에 미랑이 농담으로 한 말이 있었다.
다음 2라운드 그룹 미션은 2팀씩 짝을 지어서 팀 대항전으로 할 수도 있지 않을까.
미랑도 본인이 말하고 놀란 모양인지 양 손으로 입을 틀어막은 채 눈만 수차례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이연은 헛웃음을 삼켰다.
‘요즘은 아이돌 하려면 예언 능력도 익혀야 되나.’
이연의 마법 실력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 * *
미션에 대한 내용이 공개된 것도 좋지만.
중요한 건 어떤 식으로 서로 팀을 짜느냐에 대한 과정이다.
게다가 이번 파트너 미션에는 중대한 하자가 있었다.
“저요! 질문 있습니다!”
원더존의 윤채미가 손을 번쩍 들었다.
“네, 채미 씨. 말씀하세요.”
“저희 팀은 총 일곱인데, 한 팀이 부족하지 않나요?”
마침 이연도 그 점을 지적하고 싶었다.
2팀씩 짝을 맺으려면 참가팀이 짝수여야 성립이 된다.
그러나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하는 팀은 총 일곱이다.
팀 하나가 모자란 상황이다.
그러자 민주린이 곧바로 해결책을 내놓았다.
“짝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특별히 게스트 팀을 모셨습니다. 준비되셨나요?”
민주린의 외침에 호응하듯, 무대 조명이 꺼지면서 노래가 흘러나왔다.
귀에 익은 노래였다.
곡을 접하자마자 아이돌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니엘 멤버들도 마찬가지였다.
여솜이 설마 하는 표정으로 이연에게 확인 차원에서 물었다.
“이거, 밀크티 선배님들 노래 아니야?”
“맞아.”
밀크티. 민주린이 속한 걸 그룹 명칭이다.
2세대를 대표하는 걸 그룹으로, 아직도 그녀들의 노래가 회자가 될 만큼 가요계에 어마어마한 파급력을 행사했다.
전설적인 그룹의 노래가 걸파이트 촬영 현장에 다시 한번 울려 퍼지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혹시나 하는 기대감에 부응하듯, 두 명의 멤버가 스튜디오에 모습을 나타냈다.
밀크티 원년 멤버인 수은, 그리고 보람이었다.
두 사람은 민주린을 보자마자 격한 포옹을 나눴다.
한편, 대선배님들의 등장에 아이돌들은 다시 한번 패닉 상태가 되었다.
반주에 맞춰서 수은과 보람이 가볍게 안무를 펼쳤다.
동시에 노래까지 소화하는 모습을 보였다.
중간에 수은이 민주린에게 손짓했다.
“언니도 같이 불러요!”
“나도?”
“네!”
대본에 없는 깜짝 참전이었다.
그래도 민주린은 오랜만에 밀크티 멤버들과 같이 무대를 꾸미고 싶었는지 거절하지 않고 바로 걸음을 옮겼다.
이 리듬에 너의 모든 걸 맡겨.
자유로움과 함께 춤을 춰.
Shake It, Shake It!
가사에 맞게 밀크티 멤버들이 안무 동작을 펼쳤다.
오랜 세월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들은 자신의 20대 초 시절에 불렀던 노래와 안무들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갑작스레 펼쳐진 대선배님들의 공연을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후배는 없었다.
모두가 다 같이 일어나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대선배들의 공연에 열띤 호응을 보냈다.
무대가 끝난 뒤에도 앙코르 요청이 쇄도할 정도로 분위기가 후끈 달아올랐다.
민주린과 수은, 보람도 마음 같아선 자신들의 무대를 계속 이어가고 싶지만, 여기는 밀크티의 콘서트 현장이 아니었기에 참아야 했다.
민주린이 다시 마이크를 들었지만, 바로 멘트가 나오지 않았다.
그녀도 사람인지라 숨 돌릴 시간이 필요했다.
“우리가 나이를 먹긴 했나 봐. 옛날에는 이거 잠깐 했다고 힘들어하진 않았는데.”
“어머, 얘 좀 봐. 나이 이야기를 여기서 왜 하니? 후배님들 다 보고 있는데.”
연수은이 민주린을 가볍게 찰싹 찰싹 때렸다.
그 와중에 나보람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깜짝 무대가 끝난 이후의 여파는 꽤 컸다.
무엇보다도 더 충격적인 것은, 제8의 팀이 밀크티라는 점이었다.
물론 아이비제이 트윙클처럼 밀크티도 완전체는 아니었다.
현역으로 활동 중인 멤버가 있는 반면, 가수 활동을 관두고 연예계를 은퇴한 멤버들도 있기 때문이었다.
“여덟 번째 팀으로 연수은 씨, 그리고 나보람 씨. 이렇게 밀크티 멤버 둘이 참여하게 될 겁니다. 그러면 딱 숫자가 맞죠?”
민주린의 물음에 아이돌들은 ‘네!’ 하며 큰 목소리로 대답했다.
모든 멤버들이 공개되었으니.
이제 다음으로 중요한 게 남았다.
팀 선정 방식이다.
“서로 어떻게 파트너를 정할지에 관해서 많이 궁금해하실 텐데. 방식은 간단합니다.”
민주린이 밀크티 멤버들과 잠시 쉬는 동안, 스태프들이 미리 세팅해 둔 책상으로 향했다.
책상 위에는 총 여덟 장의 카드가 뒤집어져 있었다.
“1부터 4가 적힌 카드가 네 장, 그리고 ‘꽝’이라고 적혀 있는 카드가 네 장. 이렇게 총 여덟 장이 있습니다. 여기서 숫자 카드를 뽑으시면 됩니다. 숫자에 따라서 차례대로 파트너가 될 팀을 먼저 지명할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베스트는 숫자 1을 뽑는 것.
이연이 마침 자신 있어 하는 방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