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제48화. 동맹 제안(2)
원래 하니엘이 숏토크에 출연하기로 예정되어 있던 게 아니었기에 허락된 시간이 짧을 수밖에 없었다.
다음 촬영 일정도 잡혀 있었기에 샌디는 아쉬운 마음을 억지로 끌어안으면서 이만 하니엘 멤버들과 작별 인사를 나눠야 했다.
“컴백하면, 그때 꼭 우리 프로그램도 나와야 해. 알았지?”
“네, 물론이죠!”
“언제든 불러만 주세요, 선배님!”
유키가 멤버들과 함께 기운차게 답했다.
끝까지 웃는 모습을 유지하는 유키를 보면서 이연은 없던 존경심이 생길 정도였다.
샌디가 멤버들에게 일일이 쪽쪽 소리를 내면서 손키스를 날렸다.
그런 뒤에 촬영팀과 함께 다음 촬영 장소로 이동했다.
샌디가 사라지자마자 유키는 금세 감정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무표정이 되었다.
“아, 어울리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네.”
“어? 뭐야. 너, 샌디 선배님하고 잘 맞는 거 아니었어?”
옆에서 비아가 깜짝 놀라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자 유키가 눈을 흘기면서 답했다.
“끔찍한 소리 하지 마. 난 샌디 선배님하고 상극이라고.”
자세한 내막을 모르는 사람이 들으면 거짓말인 줄 알 것이다.
그 정도로 유키와 샌디는 찰떡궁합을 보여줬었다.
과연 유키의 내숭이 어느 정도까지 진화할 수 있을지, 이연은 내심 궁금해졌다.
그렇게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후에 다시 식사를 하려고 하던 순간.
이번에는 다른 쪽에서 이연의 식사를 방해했다.
멤버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홍류현 실장과 함께 밥을 먹던 박도수 매니저의 스마트폰의 벨 소리가 기세 좋게 울렸다.
“네, 박도수입니다…… 아, 네. 그거요? 이번 주 목요일이요? 네, 알겠습니다. 제가 그렇게 전하겠습니다. 예.”
급하게 통화를 마무리한 박도수 매니저가 이연이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연아. 저번에 내가 말했던 거 있지?”
“어떤 거요?”
“걸파이트 제작진 쪽에서 팀 리더들만 따로 모아서 찍은 사진이 필요하다고 했던 거. 그 사진 촬영, 이번 주 목요일로 일정 잡혔다고 하니까 그때 너만 따로 나하고 같이 움직이면 돼.”
“목요일…… 네, 알겠습니다.”
어차피 컴백 전이어서 다른 방송 일정이 잡힌 상태도 아니니까.
시간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었다.
단지 신경 쓰이는 게 좀 있을 뿐.
‘별문제 안 생기겠지?’
다들 한 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사람들이니까. 서로 알아서 처신을 잘하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뒤를 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 이연에게도 좋아 보였다.
* * *
1라운드 첫 번째 그룹 미션을 마치고 난 이후에 오랜만에 뭉치게 된 걸파이트 참가 멤버들.
리더들끼리만 모인 건 제작발표회 이후로 이번이 두 번째였다.
그래서인지 이연은 현장의 공기가 그리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각 팀의 리더들이 모인 자리답게 묘한 기류가 흐르긴 했지만, 그 이상의 신경전은 벌어지지 않았다.
얼마 전에 샌디를 만났던 유키처럼, 다들 가면을 쓰고서 상대 팀을 의식하는 그런 낌새를 보였다.
촬영용 무대의상으로 갈아입고 나온 이연은 서로 떨어져 앉아 있는 팀 리더들을 보면서 속으로 쓴 미소를 삼켰다.
‘제작발표회 때에는 그래도 나름 화기애애했었는데.’
첫 번째 그룹 미션 이후 평화적이던 분위기는 어느 정도 상쇄되었다.
이것은 경쟁이다.
카메라 앞이든, 뒤든.
상대팀은 늘 적이라는 생각을 굳히고 있어야 한다.
그것이 서바이벌 프로그램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리더들이 냉전 체제를 유지하고 있던 건 아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리더, 혜원은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가을소녀 소속 초영에게 다가가서 일부러 말을 계속 붙였다.
“어머, 초영아! 오늘 의상 너무 예쁘다! 나도 그거 입었으면 좋았을 텐데.”
“마음에 드시면 서로 바꿔 입을래요?”
“아니야. 내가 입으면 안 어울릴 거 같아.”
“에이. 그게 무슨 말이에요, 선배님. 혜원 선배님은 뭘 입어도 예뻐요.”
“정말? 고마워!”
혜원을 볼 때마다 이연은 뭔가 이질적인 느낌을 받곤 했다.
이 세계로 넘어온 이후 줄곧 봐 왔던 여자 아이돌들 중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케이스에 속했다.
굉장히 순진무구하게 보이지만, 무대 위에서 보여주는 압도적인 재능과 카리스마는 이연도 바짝 긴장할 정도다.
그러나 다시 무대 아래로 내려오면, 저렇게 순둥이가 된다.
‘신기한 사람이라니까.’
그리고 가만히 놔두고 볼 수만은 없는 사람이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왼손에 들고 있는 텀블러를 예로 들 수 있었다.
보다 못한 초영이 혜원에게 경고를 줬다.
“어어? 선배님! 뚜껑 제대로 안 닫혀 있잖아요! 커피 흘러나오는 거 봐. 어휴!”
“미안. 전혀 몰랐어.”
“기다려 봐요. 제가 물티슈 가져올 테니까.”
초영이 스태프한테서 물티슈를 구해 온 다음에 혜원의 손에 끈적끈적하게 묻은 커피를 직접 닦아줬다.
마치 철없는 딸아이를 돌보는 엄마의 모습을 보는 듯했다.
혜원과 같이 있으면 반강제로 엄마 캐릭터가 될 수밖에 없다.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걸 그룹들, 그리고 그 그룹들의 팀원들을 하나하나까지 다 분석을 마친 이연이었지만.
그럼에도 아직 혜원에 대해서는 아직 완벽하게 파악해 내지 못했다.
오랜 고민 끝에 이연이 혜원에 대해 내린 결론은 이러했다.
알 것 같다가도 모를 사람.
그래서 더 무서운 적이다.
말없이 혜원과 초영을 바라보던 이연에게 누군가가 불쑥 다가와 말을 붙였다.
“이연 씨가 혜원 선배님을 보고 있는지, 아니면 초영이를 보고 있는지. 내가 맞혀볼까?”
MAYO의 리더, 미랑이 이연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물었다.
그걸 굳이 알아맞힐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그래도 상대는 선배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체했다.
미랑의 손가락 끝이 정확히 혜원에게 향했다.
“혜원 선배님, 맞지?”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나요?”
“여기에 참가하는 모든 팀들이 다 혜원 선배님을 바라보고 있으니까. 물론 그 시선에 시기와 질투가 담겨져 있을지, 아니면 순수한 동경심만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거야.”
“적어도 미랑 선배님이 어떤 시선으로 혜원 선배님을 바라보고 계신지는 알 거 같아요.”
“어머, 그래?”
미랑이 이연의 말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한번 자신의 속내를 맞혀보라는 의미를 담은 눈짓을 하자, 이연은 지체 없이 자신의 생각을 읊었다.
“반드시 넘어서고 싶은 벽 아닌가요.”
“벽이라는 표현, 마음에 드네.”
이연이 제출한 답안지는 100점 만점이었다.
미랑의 속내를 아주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내가 왜 미랑 선배님하고 아이비제이에 이렇게 목을 매는지, 이것까지 알고 있어?”
“아니요. 모르겠습니다.”
이연은 신이 아니다.
아이돌이다.
그렇다 보니 그녀도 모르는 게 많을 수밖에 없었다.
특히 사람과 사람간의 관계에 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미랑은 이전에도 한번 아이비제이 멤버들에게 강한 경쟁심을 불태운 적 있었다.
여기에 대한 해답은 오직 미랑만이 알고 있었다.
어떤 대답이 나와도 놀라지 않을 거라고 다짐했던 이연이었지만, 이 결심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사실 나, 예전에 아이비제이 데뷔조에서 최종 탈락했거든.”
* * *
아이돌로 데뷔하기 위한 과정은 상상 이상으로 복잡하고 힘들다.
소속사 오디션에 붙어서 연습생으로 오랜 기간을 몸담는 동안 월말평가 등으로 자신의 실력을 꾸준히 보여줘야 하고. 인정을 받으면 이제 또 데뷔조에 들기 위한 경쟁을 벌여야 한다.
데뷔조에 들었다고 무조건 데뷔! 라는 것도 아니다.
까딱 잘못하다간 어렵게 확정 지은 데뷔 기회 자체가 무산될 수도 있다.
이처럼 마지막까지 방심할 수 없는 게 아이돌 데뷔다.
이 과정에서 미랑은 씻을 수 없는 기억을 머리와 가슴속에 새기게 되었다.
이연은 미랑이 아이비제이를 단순히 질투한다고 보고 있었는데.
그런 감정이 아니었다.
‘복수심이었네.’
어쩐지. 미랑이 아이비제이를 잡는 일에 그토록 목을 매는지, 이제야 알 수 있었다.
“아이비제이 데뷔조에 들기 위해 오랜 시간을 바쳤는데, 정작 코앞에서 떨어지니까 맨정신으로 버틸 수가 없더라고. 그날 이후로 아이돌이고 뭐고 다 때려 치울까 했었다니까.”
그러다가 우연한 기회에 지금의 소속사를 알게 되었고. 그렇게 그녀는 미랑이라는 새로운 예명과 함께 MAYO로 데뷔했다.
그리고 지금은 대한민국을 넘어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고 있는 4인조 걸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사실 걸파이트에 나오게 된 것도 사람들에게 깨닫게 해주고 싶어서였어.”
“무엇을요?”
“날 떨어뜨린 게 굉장히 어리석은 짓이었다는 것을.”
미랑의 눈에 독기가 가득 내포되어 있었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던 이연은 넌지시 이런 말을 흘렸다.
“이미 후회하고 있을 거예요. 그만큼 MAYO 선배님들의 활약상도 대단하니까요.”
“…….”
미랑은 말없이 잠시동안 이연을 응시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미랑의 입가에 옅은 미소를 새겨졌다.
“이연 씨는 사람의 마음을 강하게 뒤흔드는 능력이 있나 봐. 데뷔조에서 떨어진 이후부터 어떤 일을 겪든 절대로 흔들리지 않을 거라고 수차례 다짐했었는데.”
예상치도 못했던 말에 미랑은 진한 감동을 느꼈다.
누군가가 자신의 노력과 흔적의 가치를 인정해 주는 일만큼 행복한 것도 없을 것이다.
“좋아, 정했어.”
뭔가를 결심한 것처럼 미랑이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이연 씨. 나하고 동맹 맺지 않을래?”
“동맹…… 이요?”
“타도 아이비제이 연합. 어때?”
농담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미랑의 말속에는 진심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이연은 이런 미끼를 덥석 물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7개 팀이 서로가 경쟁하는 시스템인데. 동맹이 큰 의미가 있을까요?”
“있을 수도 있잖아. 혹시 모르지. 다음 2라운드 그룹 미션은 2팀씩 짝을 지어서 팀 대항전으로 할 수도.”
“그럼 한 팀이 남잖아요.”
“……그러게?”
아이비제이에게 크게 한 방 먹여주고 싶다는 기세는 좋지만.
이연은 미랑도 혜원처럼 약간 허당끼가 보이는 느낌을 받았다.
미랑이 아이비제이로 데뷔했다면, 혜원과 굉장히 잘 어울렸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뇌리를 스쳤다.
자신이 말을 꺼낸 거니까 어떻게든 수습은 할 모양인지 미랑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아, 아무튼 뭔가 힘을 합치는 그런 미션이 나올지도 모르니까. 서로 서로 돕는 것도 나쁘지 않잖아. 안 그래?”
“선배님이 말씀하신 그런 미션이 나온다면 생각해 볼게요.”
이연은 말도 안 된다고 보고 있었다.
그래도 선배의 말이니까. 적당히 어울려주면서 넘어가기로 했다.
마침 타이밍 좋게 촬영감독이 확성기를 들었다.
“아아-! 5분 후에 사진 촬영 시작할 테니까 아이돌분들은 미리 준비해 주세요.”
“네!”
이연도 준비를 위해서 미랑과 짧은 작별 인사를 나눴다.
“조금 있다가 뵐게요, 선배님.”
“알았어. 나도 화장실이나 한 번 더 갔다 와야겠다.”
촬영감독 덕분에 살았다.
이연은 미랑 몰래 안도의 한숨을 삼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