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제48화. 동맹 제안(1)
걸파이트 시즌 2 첫 촬영, 그리고 대망의 첫 번째 그룹 경합 미션이 끝난 뒤에도 각 팀들은 정신없이 움직여야만 했다.
일곱 개 팀 전부 다 비슷한 시기에 컴백을 준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지난번 아이비제이, 하니엘 때처럼 이틀 단위로 각각 컴백, 데뷔 일자가 겹치는 일은 없었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에게 신경이 쓰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일곱 개 팀 다 같은 경연 프로그램에 출연 중이니까.
걸 그룹들 간의 기 싸움이라는 게 없을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막내 그룹인 하니엘은 걸파이트 시즌 2 녹화를 마치자마자 그다음 날 쉴 틈도 없이 바로 안무 연습실로 출근했다.
걸파이트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녀들에게는 그것보다 훨씬 중요한 게 있었다.
바로 컴백 무대다.
첫 번째 데뷔 앨범이 팬들에게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만큼, 두 번째 앨범에 들어가는 기대 역시 컸다.
블라인드 미션 당시에는 하니엘과 같이 임시 멤버에 가입했었던 은서해가 오늘은 다시 트레이너로 돌아와 멤버들의 안무 자세를 봐줬다.
“비아, 팔 왼쪽으로 똑바로 뻗고. 리샤는 쓰리, 포 단계에서 자꾸 반 발짝 늦게 움직이는 경향이 있어. 주의해.”
“네, 알겠습니다!”
“그럼 한 번만 더 맞춰보고 난 다음에 쉬자. 똑바로 서고!”
은서해의 날카로운 외침에 멤버들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두 번째 앨범, Tug of war 노래에 맞춰서 멤버들은 미리 배워둔 안무를 열심히 펼쳤다.
데뷔 앨범 준비할 때보다도 훨씬 나아진 모습을 보이는 하니엘 멤버들.
연습생 시절 때부터 쭉 그녀들을 봐왔던 은서해는 속으로 뿌듯함을 느꼈다.
그러나 이 뿌듯함을 지금 당장 겉으로 표출할 수는 없었다.
지금은 당근보단 채찍이 필요한 시기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컴백일이 이제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사람들은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크게 하는 법이다. 그래서 그 기대감을 저버리지 않도록 은서해는 더 빡세게 그녀들을 봐줄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하니엘 멤버들을 위하는 길이라는 걸 알고 있기도 하고 말이다.
“좋아. 점심시간 끝나고 1시까지 다시 이곳으로 집합해. 알았지?”
“네!”
“수고하셨습니다, 은 쌤!”
“너희도 고생 많았어.”
멤버들을 한 번씩 안아준 은서해는 보컬 레슨 담당인 나현아 트레이너와 따로 약속이 있는 모양인지 먼저 연습실을 나섰다.
수건으로 흐르는 땀을 닦아낸 이연이 현재 시간을 살폈다.
오전 11시 45분.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 샤워를 하러 가고 싶지만, 어차피 오후에 또 이런 식으로 땀을 흘릴 게 뻔했기에 잠깐만 참기로 했다.
식사 시간만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기운을 되찾는 멤버가 있었다.
멤버들 사이에서 식탐 대마왕이라 불리는 리샤였다.
“밥 먹으러 가자!”
우미가 그런 리샤의 말을 듣고 쓴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쉬었다가 가. 밥 먹을 체력 정도는 회복하고 가야지.”
“먹으면 회복되는 거 아니야?”
“그건 너만 그렇고. 다른 사람들은 안 그래.”
숟가락 뜰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비아와 유키가 우미의 말에 깊이 공감하듯 고개를 수차례 끄덕였다.
묶었던 긴 머리를 풀고서 어깨 뒤쪽으로 넘긴 이연도 우미의 편을 들어줬다.
“언니 말이 맞아. 열 좀 식히고. 그러고 난 다음에 먹으러 가도 늦지 않으니까 너무 안달 내지 마.”
시간은 충분하다.
그리고 LC 엔터테인먼트 내부에 마련되어 있는 뷔페식당의 경우에는 자리가 늘 여유로운 편이었기 때문에 초조해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우미와 이연의 주장대로 10분 정도 잠시 쉰 다음, 슬슬 식당으로 이동할 준비에 나섰다.
식당 아래로 내려간 그녀들은 못 보던 문구에 관심을 보였다.
[점심시간에 식당에서 숏토크 촬영 예정입니다.]
숏토크라는 단어가 이연과 유키에게는 낯설지 않았다.
유키가 이연의 팔을 살짝 터치하면서 물었다.
“언니. 샌디 선배님이 진행하는 그 프로그램 아니에요?”
“맞아. 오늘은 여기서 촬영하시나 보네.”
가끔 연예인들이 LC 엔터테인먼트로 와서 촬영을 진행하는 경우가 있긴 했다.
그렇다고 자주 있는 편은 아니었다.
회사 사정이라는 게 있으니까.
그럼에도 숏토크 촬영이 무사히 성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아무래도 샌디가 예전에 LC 엔터테인먼트에 몸담았던 적이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이곳 관계자들과 어느 정도 친분이 있으니까.
“어떻게 하지? 다른 곳에 가서 먹어야 되나?”
우미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이럴 때에는 역시 매니저한테 물어보는 게 상책이다.
“잠깐만.”
이연이 직접 박도수 매니저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익숙한 벨소리가 식당 내에서 들려왔다.
여솜이 벨 소리의 출처를 가리켰다.
“어? 매니저님 저기서 식사하고 계시는데?”
“정말?”
멤버들은 촬영 예정이 잡혀 있다고 그래서 식당에 들어갈지 말지 고민하고 있었는데.
정작 박도수 매니저는 마음 편히 안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여보세…… 뭐야? 밖에 있네?”
뒤늦게 멤버들의 기척을 알아차린 박도수 매니저가 급하게 입안에 있는 것들을 꿀꺽 삼켰다.
“어, 얘들아! 왜?”
하니엘이 식당 안으로 우르르 들어서자, 박도수 매니저와 같이 식사를 하고 있던 홍류현 실장과 회사 관계자들이 그녀들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멤버들 역시 마주 인사를 나눈 뒤에 박도수 매니저에게 전화를 건 이유에 대해 말했다.
“숏토크 촬영 있다고 해서요. 저희도 여기서 밥 먹어도 되는지 물어보려고 전화드렸어요.”
“상관없어. 어차피 촬영은 저기서 진행될 거래. 이쪽 구역까지는 안 넘어온다고 들었으니까 너희도 마음껏 먹어.”
역시 매니저에게 물어보길 잘했다.
멤버들도 박도수 매니저 근처에 자리를 잡고 하나둘씩 음식을 담은 식판을 그곳에 내려놓았다.
때마침 바깥이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뒤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 여기는 어디냐? 내가 예전에 활동했었던 곳. My hometown! LC 엔터테인먼트를 소개합니다!”
입으로 ‘짜자잔~!’ 하며 자체 효과음을 내는 샌디.
언제 어디에, 어느 곳에 있더라도 그녀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만 들으면 누군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였다.
카메라, 조명 장비를 든 스태프들이 한꺼번에 뒷걸음질을 치면서 샌디의 모습을 집중 조명했다.
샌디만 이곳에 온 건 아니었다.
지난번에 어설픈 통역으로 큰 웃음을 줬던 김용진도 그녀와 함께 이곳 LC 엔터테인먼트에 발을 들였다.
“나, 여기 처음 와보는데. 괜찮겠지?”
“에이, 오빠. 뭐 어때? 여기 대표님하고 내가 잘 아는 사이니까 괜찮을 거야. maybe?”
“마지막에 그런 단어 붙이지 마. 괜히 불안해지잖아.”
여전히 일방적인 공격을 당하는 김용진.
낯설지 않은 투샷에 유키는 그리움마저 느꼈다.
“두 분 다 여전하시네요.”
“그렇지, 뭐.”
숏토크는 웹 예능 프로 중에서 인기 상위권을 달리는 프로그램이다.
처음에는 비교적 열세한 환경에서 출발했지만. 이제는 여기저기서 제작 지원을 많이 받게 된 모양인지 이연과 유키가 출연했을 때에 비해서 훨씬 많은 스태프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중간에 샌디가 ‘어?’ 하며 물음표를 띄웠다.
“잠깐만! 저기, 하니엘 아니야?”
대본에 없던 말을 하는 샌디의 행동에 스태프들뿐만 아니라 박도수 매니저, 그리고 하니엘 멤버들 모두가 다 당황스러웠다.
샌디가 PD한테 대놓고 물었다.
“PD님. 하니엘 친구들 알죠? 인터뷰 짧게 하고 가면 안 돼요?”
“어? 아니, 나야 뭐…… 하면 좋긴 한데.”
사전에 협의되지 않은 출연이었기에 PD 입장에선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마침 박도수 매니저도 있고.
근처에 홍류현 실장도 있어서 물어볼 사람은 많았다.
PD가 급하게 이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랜만입니다. 이 말보다 먼저 이들에게 들려줄 게 말이 있었다.
“죄송합니다.”
우선은 사과부터 하고 시작하기로 했다.
추가 출연 제의는 이다음이었다.
샌디가 워낙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성격이다 보니 홍류현 실장이나 박도수 매니저도 이런 일이 벌어질 수도 있을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근데 이 예상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너무 딱 들어맞아서 오히려 좀 당황했지만 말이다.
그들의 의견보다 중요한 게 있었다.
하니엘, 본인들의 의사다.
“어떻게 할래?”
박도수 매니저가 그녀들에게 먼저 물었다.
이연은 상관없었다. 이미 숏토크에 출연했던 적이 있기도 했고. 그리고 인기 웹 예능 프로그램에 잠깐이라도 얼굴을 비치면 그녀들에게도 여러모로 도움이 될 테니까.
대신에 유키가 약간 신경이 쓰였다.
“너, 괜찮겠어?”
“네? 뭐가요?”
“샌디 선배님하고 너하고 잘 안 맞는다고 했잖아.”
샌디는 내숭 떠는 타입을 굉장히 싫어한다고 본인의 입으로 직접 말했다.
반대로 유키는 내숭의 화신이라 불릴 정도로 가면을 자주 바꿔 썼다.
어찌 보면 서로 상극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유키는 개의치 않았다.
“괜찮아요. 잠깐이니까요.”
그리고 유키도 이연과 생각이 같았다.
짧게나마 출연하는 편이 하니엘의 컴백에 조금이나마 더 탄력을 보탤 것이다.
나머지 멤버들도 동일한 마음이었다.
“출연할게요.”
“그전에 화장부터 고쳐야…….”
멀리서 지켜보던 샌디가 급하게 화장품을 찾는 여솜을 향해 외쳤다.
“괜찮아요,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예쁘고 귀여운데.”
그리고 오히려 지금의 모습을 보여줘야 컴백을 위해 열심히 준비하고 있는 사람처럼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대본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게 예능 프로그램이지만, 때로는 이런 리얼한 모습이 시청자들에게 진정성을 선사한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의견이 조율된 끝에 촬영이 재개되었다.
다시 입구에 들어서는 장면부터 촬영이 시작되었다.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샌디가 하니엘을 향해 반가운 마음을 드러냈다.
“어머, 하니엘! 여러분, 쉽게 만나보지 못하는 귀한 분들이에요!”
같은 상황을 반복해 촬영하는데도 불구하고 샌디의 텐션은 죽지 않았다.
오히려 첫 촬영 때보다도 더 목소리 톤이 올라가 있었다.
샌디가 다가오더니 합석하기 전에 먼저 멤버들에게 단체 인사를 부탁했다.
“우리 시청자들한테 인사해 줘요.”
“둘, 셋!”
“안녕하세요. 여러분들의 천사, 하니엘입니다!”
이 단체 인사도 실로 오랜만이었다.
샌디가 자연스럽게 이연과 유키 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먼저 그녀는 이연에게 말을 붙였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잘 지냈죠. 근데 선배님. 원래 방송 콘셉트가 반말 아니었어요?”
“아, 오늘은 LC 엔터테인먼트에 왔으니까. 나름 격식을 차리려고 그랬던 거지.”
뒤이어 샌디의 시선이 유키에게 향했다.
순간 유키의 작은 어깨가 한 차례 움찔했지만,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선배님, 너무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어, 우리 애기?”
샌디는 이전에도 유키를 굉장히 귀여워했었다.
오랜만에 만나서 그런지 그녀는 양손을 뻗어 유키를 꽉 안아줬다.
자연스럽게 샌디의 가슴에 얼굴을 묻게 된 유키.
이연은 궁금했다.
과연 저 속에서 유키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