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제47화. 블라인드 미션(6)
“청중평가단으로부터 가장 많은 표를 받은 팀은 바로……!”
민주린의 시선이 먼저 향한 곳은 맨 오른쪽.
MAYO가 서 있는 방향이었다.
“MAYO 팀입니다!”
“……!”
MAYO는 자신들이 걸파이트 시즌 2 첫 번째 미션에서 1위를 차지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마자 서로를 얼싸안으며 환호성을 질렀다.
“언니들, 너무 고생했어! 다 언니들 덕분이야!”
“고생은 다 같이 했으니까. 울지 마.”
미랑이 리더답게 울먹이는 막내 멤버를 챙겨주는 모습을 보여줬다.
뒤이어 2위, 3위의 순서도 공개되었다.
2위는 아이비제이 트윙클.
3위는 하니엘이었다.
“하니엘 팀하고 4위를 차지하게 된 원더존하고 정말 아슬아슬했습니다. 딱 한 표 차이였거든요.”
한 표 차라는 말을 듣고 원더존 멤버들은 아쉬움을 쉽게 지우지 못했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비교적 결과를 쉽게 받아들이는 자세를 취했다.
원더존이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던 건 맞다.
하지만 그 뒤에 나온 하니엘은 원더존보다 한 수 위였다.
특히 시우의 메인보컬 능력은 모든 가수 팀 멤버들이 예상 못 했던 비장의 무기였다.
이연의 작전이 어느 정도 통한 셈이었다.
물론 아쉽게 MAYO, 아이비제이 트윙클에게 밀리긴 했지만 말이다.
“아쉽네.”
“조금만 더 열심히 했더라면 우리도 2위나 1위 노려볼 수 있었을 텐데.”
옆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아쉬움의 흔적을 흘리는 리샤와 여솜을 본 이연은 그녀들에게만 미리 스포일러를 들려주기로 했다.
“걱정 마. 순위 올라갈 거야.”
“응? 그게 무슨 소리야.”
“조용히 보고 있으면 돼. 그러면 알아서 민주린 선배님이 다 말씀해 주실 테니까.”
이연의 말이 오히려 두 사람의 머릿속에 자라나고 있는 물음표의 성장을 더욱 촉진시켰다.
4위를 차지한 원더존에 이어 5위에는 아주 강렬한 무대를 선보였던 샤이걸스가. 6, 7위는 CDP, 그리고 가을소녀가 차지했다.
하위권 세 팀 다 그다지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다. 엄연히 경쟁 시스템으로 굴러가는 프로그램인데, 여기서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는 것은 안 좋은 일이니까.
게다가 세 팀 다 무대를 반쯤 포기하고 올라섰던 것도 아니었다.
다들 1위가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했다.
하지만 이상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상위권에 오를 수 있는 팀은 소수다. 7팀 모두가 다 공동 1등이라면 좋겠지만, 그러면 경연 프로그램을 만드는 이유가 없다.
특히나 7위로 내려앉게 된 가을소녀 팀이 가장 큰 충격을 받은 듯한 모습이었다.
몇몇 멤버들은 MAYO가 흘렸던 기쁨의 눈물과는 정반대의 의미가 담긴 눈물을 보였다.
순위에 희비가 엇갈리는 곳.
이것이 아이돌의 세계다.
대충 현장이 정리되어 갈 때쯤.
민주린이 반전을 언급했다.
“방금 발표한 순위가 최종 순위는 아닙니다.”
“네?”
“이게…… 최종 순위가 아니었어요?”
민주린은 아이돌들의 말에 고개를 크게 끄덕여 주면서 다시 한번 자신이 한 말을 확인시켜 줬다.
“여러분들, 잊고 계신 게 하나 있지 않나요?”
아이돌들이 당황해하는 동안, 이연이 대신 정답을 외치려고 했다.
그 전에.
이연보다 한발 먼저 움직인 사람이 있었다.
“정체가 들키면 실격이었죠?”
민주린이 혜원에게 고개를 끄덕여줬다.
“네. 혜원 씨, 정답입니다.”
이연과 마찬가지로 혜원도 알고 있었다.
왜 걸파이트 제작진이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들과 달리, 1위를 가장 먼저 발표하게끔 했는지.
방금 혜원이 말한 것과 연관되어 있었다.
“지금부터 1위 팀부터 순차적으로 정체를 알아맞힌 청중평가단들의 숫자를 공개하겠습니다.”
5명 이상이면 아웃이다.
1위를 차지한 MAYO의 득표가 가장 먼저 공개되었다.
정답을 알아맞힌 사람의 숫자는…….
“총 12명입니다.”
자그마치 12명이나 된다.
MAYO 멤버들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블라인드 미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시스템을 적용시킨다면.
결과가 뒤바뀐다.
“MAYO 팀은 자동으로 실격 처리되어 0점을 받게 됩니다.”
1위의 몰락.
후배 아이돌들은 숨을 죽인 채 MAYO의 눈치를 살폈다.
혜원이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쓴 미소를 지으면서 MAYO 쪽을 바라봤다.
너무 무대에 집중한 나머지, MAYO는 블라인드 미션의 본질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들은 첫 오디션 프로그램 출연부터 쓰디쓴 패배를 맛보게 되었다.
* * *
“MAYO가 실격 처리됨으로 인해 자동적으로 순위는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1위로 올라서게 됩니다.”
하니엘은 2위로 승격되었다.
리샤와 여솜이 이연을 바라보면서 놀라는 표정으로 물었다.
“연이, 너도 MAYO 선배님들이 실격 처리당할 거 알고 있었어?”
“보니까 혜원 선배님도 미리 눈치채고 계셨던 거 같은데?”
이연은 두 사람의 물음에 모두 Yes라고 답했다.
눈치챌 수 있었던 이유는 역시 민주린의 멘트 덕분이었다.
“다른 경연 프로그램이었더라면 1위를 나중에 발표했을 거잖아? 그런데 처음부터 가장 중요한 순위를 먼저 발표한다는 건 그 팀이 1위가 아니라는 반전을 의미하는 거지.”
결국 MAYO는 페이크 주인공인 셈이었다.
리샤가 이연을 보면서 작게 혀를 내둘렀다.
“역시 우리 리더, 눈치 엄청 빨라. 그나저나 혜원 선배님은 좀 의외네. 보면 그렇게 눈치가 빠른 타입처럼 보이진 않는데.”
“촉이 굉장히 좋은 선배님이야. 그리고…….”
“그리고?”
“아니야, 아무것도.”
이연은 말을 하던 도중에 알아서 적절하게 말을 끊었다.
물론 리샤 입장에선 이연의 다음 이어질 말이 뭔지 굉장히 듣고 싶어 하는 모습이었지만, 그런다고 한번 닫은 입을 다시 열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연이 말을 하려다가 만 내용은 간단했다.
혜원 같은 타입을 가장 조심해야 한다고.
그러나 이건 같은 팀원에게 대놓고 혜원을 저격하는 말로 오해받을 수 있었기 때문에 일부러 관둔 거였다.
이연은 슬쩍 시선을 돌려 다시 한번 혜원 쪽을 돌아봤다.
예상했던 대로.
‘보통내기가 아니야.’
그녀는 확실히 강적이다.
* * *
MAYO팀이 떨어짐으로 하니엘은 한 단계 순위가 상승했지만, 그럼에도 아직은 아쉬웠다.
이번 베네핏 내용이 자세하게 공개되진 않았지만, 특권을 누릴 수 있는 팀은 오직 1등뿐이라는 것만 먼저 밝힌 적이 있었다.
그래서 2위보다는 기왕이면 1위가 더 나을 수밖에 없었다.
하니엘 멤버들의 입술은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아이비제이 트윙클은 다른 팀들에 비해서 아예 정체를 감출 생각조차 하지 않았었다.
그래서 ‘혹시?’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아이비제이 트윙클 멤버들도 이 점 때문에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현, 미수와 달리 혜원의 표정은 크게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민주린이 혜원을 향해 마이크를 넘겼다.
“혜원 씨는 어때요? 아이비제이 트윙클도 MYAO 팀처럼 실력 처리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시나요?”
“무대 준비할 때에는 90퍼센트 이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어떻게 바뀌었나요?”
“반반으로요.”
50 대 50.
결국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운명은 하늘에 달린 셈이었다.
민주린은 이에 대해 추가로 물었다.
“확률이 바뀐 이유가 있을까요?”
“아까 청중평가단 중에서 정답을 척척 알아맞혔던 분 계시잖아요.”
“그 고등학생분 말씀하시는 거죠?”
“네. 그분이 저희 무대를 보고 헷갈려하는 모습을 보고 나서 깨달았어요. 위험천만한 이 작전이 의외로 사람들에게 꽤 먹혔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래도 다섯 명이라는 상한선은 꽤 위험하지 않을까요?”
50명 중 10퍼센트의 사람들만 맞히면 아이비제이 트윙클도 실격 처리당한다.
그럼에도 혜원은 불안감보다는 자신감을 먼저 드러냈다.
“실격 처리되어도 상관없어요. 저희는 저희가 준비한 120퍼센트의 성과를 무대 위에서 보여줬다고 생각하니까요. 후회는 없습니다.”
모범적인 대답이었다.
이연도 가수가 만족할 만한 무대를 만들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이런 점에 있어서 이연과 혜원은 왠지 모를 공통점을 지니고 있었다.
“MAYO 팀에 이어서. 아이비제이 트윙클이 받은 표도 공개하겠습니다!”
과연 아이비제이 트윙클을 맞힌 사람이 몇이나 될까.
결과는.
“4표였네요. 아이비제이 트윙클은 그대로 1위 확정입니다!”
아슬아슬했다.
5표 이상은 실격이니까. 만약에 한 사람만이라도 더 그녀들의 정체를 유추했었더라면, 아이비제이 트윙클 역시 MAYO처럼 0점 처리를 당했을 뻔했다.
기뻐하는 그녀들과 달리, 하니엘 멤버들은 입맛을 다실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선배들 앞에서 너무 노골적으로 아쉬운 마음을 드러내면 안 된다.
“축하드려요, 선배님!”
“1위 축하드립니다!”
내숭의 여왕, 유키가 먼저 얼굴에 철판을 깔고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1위를 축하했다.
뒤이어 다른 멤버들도 착한 후배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연도 박수를 보내면서 축하 행보에 동참했다.
뒤이어 공개된 하니엘의 표 역시 공개되었다.
단 2표.
이후에도 공개된 다른 그룹들의 표를 살펴봐도 하니엘의 이 기록을 넘는 팀은 없었다.
정체를 완벽하게 감추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이연은 하니엘이 1위를 차지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아쉬움이 남았다.
‘이번에는 어쩔 수 없지.’
아이비제이 트윙클, 그중에서도 혜원이 특히나 이연이 예상보다 훨씬 강했다.
경쟁하는 상대방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것도 제법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그래야 자기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연은 지금의 상황에 크게 게의치 않았다.
‘다음에는 우리가 1등 하면 돼.’
경쟁은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다.
* * *
숙소로 향하기 전에 이연은 잠시 본가에 들러 잊고 온 옷가지들을 몇 개 챙기기로 했다.
겨울옷은 다 들고 왔는데. 이제 날씨도 따뜻해지기 시작했으니까. 슬슬 봄옷을 꺼내둬야 할 시기가 찾아왔다.
박도수 매니저가 ‘바래다줄까?’라고 했지만, 이연은 괜찮다는 말로 정중히 그의 호의를 거절했다.
집에 오자마자 시끌벅적한 소리가 이연을 먼저 맞이해 줬다.
“어? 누님! 안녕하세요!”
권민준의 친구들이 집들이를 겸해서 놀러 왔다.
피곤함에 한숨을 푹 쉰 이연이 권민준에게 물었다.
“PC방 잘 갔다 왔나 보네.”
“PC방이 아니라 도서관이라니까.”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아직도 열심히 거짓말 중인 남동생을 보고 있자니 이연의 한숨이 더욱 짙어졌다.
“형운이도 왔어?”
“화장실 갔는데. 이 녀석, 어디 있다가 왔는지 말을 안 해주더라고.”
마침 주형운이 화장실에서 나와 뒤늦게 이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누나.”
“주형운.”
이연의 얼굴에 약간의 살기가 비쳤다.
“너, 아이비제이 트윙클 선배님들 정체 알아맞혔어?”
“예? 그, 그게 무슨…….”
“대답해.”
오늘따라 무서운 분위기를 풀풀 풍기는 이연의 모습에 주형운은 이실직고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요…… 아무리 봐도 모르겠더라고요. 누나 그룹도 못 맞혔어요.”
“다른 사람들은 잘 맞혔으면서. 왜 하필…….”
“네?”
“됐다. 지나간 일이니까. 그만하자.”
단 한 명이었는데.
한 명만 누군가가 아이비제이 트윙클의 정체를 알아냈다면 하니엘이 1위였을 텐데.
머릿속으로는 잊자고 수도 없이 되풀이했지만.
아쉬움이란 녀석은 생각보다 쉽게 자리를 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