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5화
제47화. 블라인드 미션(3)
이연은 가면을 쓰고 안무를 소화하는 일에 큰 어려움을 느끼진 않았다.
처음에는 많이 어색했지만, 한두 번 연습을 하다 보니까 금세 적응했다.
그러나 우미나 여솜, 시우는 아직 이연처럼 가면에 완벽하게 적응하려면 시간이 많이 필요해 보였다.
그나마 리샤나 비아, 유키는 앞서 언급되었던 세 사람에 비하면 익숙해지는 속도가 빠른 편이었다.
또 한 차례 곡 연습을 마무리 짓자마자 은서해가 자신이 보고 느낀 것들을 멤버들에게도 공유했다.
“지금 연이하고 리샤, 비아, 유키는 잘하고 있는데. 남은 멤버들이 아직 좀 부족해. 특히 시우, 동작이 너무 소극적이야. 이번에 네가 메인이니까 더 자신감 있고 적극적으로 임해야 해. 알았지?”
“네!”
“좋아. 그러면 한 번 더 가보자.”
이연의 자리를 대신 맡아 소화한다는 건 상당히 어려운 일이다.
그만큼 이연이 하니엘의 리더로서 팀에 얼마나 중요한 역할들을 해왔는지, 시우는 이번 연습 과정을 통해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늦은 시간까지 계속해서 연습을 이어가고 나서야 겨우 숙소로 돌아갈 수 있게 된 하니엘 멤버들.
가장 힘들었을 시우는 녹초가 된 몸을 차량 시트에 눕혔다.
눕자마자 다른 멤버들과 말을 섞을 것도 없이 바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고생하는 막내를 보면서 우미는 안쓰러운 마음을 드러냈다.
손을 뻗어서 뒷좌석에 잠든 시우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대신 정리해 줬다.
그래도 시우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힘을 내고 있었다.
이 모습이 우미에게는 그저 기특하게 보였다.
“시우가 열심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결과 잘 나왔으면 좋겠다.”
잠든 시우 대신에 이연이 그녀에게 확답을 들려줬다.
“잘 나올 거야. 반드시.”
과연 이연이 짠 작전이 잘 먹힐지. 결과는 그때 가봐야 알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연은 왠지 모를 자신감에 차 있었다.
* * *
블라인드 미션 당일.
황이전 PD가 무작위로 선발된 50인의 청중평가단을 불러모아놓고 어떤 식으로 미션이 진행될지 알려주기 시작했다.
“7개 팀이 가면을 쓰고 공연을 펼칠 건데, 여러분들은 어느 팀이 제일 잘했는지 투표를 해주시면 됩니다.”
50인의 투표로 1위부터 7위까지. 걸파이트 시즌 2 대망의 첫 미션 순위가 정해질 예정이다.
모든 일에는 항상 첫 스타트가 중요한 법이다.
그래서인지 7개 팀 모두 어떻게든 1위를 노리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하지만 변수가 존재한다.
아무리 무대를 열심히 준비했다고 한들, 이 청중평가단에게 정체가 들키는 순간 실격과 동시에 0점 처리를 받게 된다.
표를 가장 많이 받았어도, 실격 판정이 되면 그 표들이 전부 다 무효표가 된다.
황이전 PD는 미리 참가자들에게 말했던 것처럼 이 사실을 청중평가단들에게 고지하지 않았다.
대신 다른 방향으로 설명을 해줬다.
“여러분들 중에서 몇 번째 팀이 어떤 그룹인지 맞히는 분들이 계시다면, 그분들에게 특별히 저희가 상품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예상대로 상품이 걸리자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청중평가단 중 한 명이 번쩍 손을 들며 질문했다.
“7개팀 다 맞혀야 하나요?”
“다 맞추셔도 됩니다. 그만큼 당첨 확률이 더 올라가니까요.”
블라인드 미션에 참가하는 걸그룹들 입장에선 황이전 PD가 악마로 보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청중평가단에게 오늘의 촬영에 관한 대략적인 개요를 설명한 뒤, 황이전 PD는 각 걸그룹들이 있는 대기실을 순차적으로 찾았다.
하니엘 대기실로 향한 황이전 PD는 멤버들에게 아직 설명하지 않은 추가 룰을 공개했다.
“청중평가단 중에서 다섯 명 이상이 여러분들의 정체를 눈치챌 경우 실격 처리되니 그렇게 알고 계시면 됩니다.”
원래는 한 명만 알아맞혀도 실격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50명 중 한 명은 너무 확률이 높기도 해서 약간의 우려스러운 목소리가 내부적으로 자주 나왔었나 보다.
그래서 한 명이 아닌 다섯 명으로 약간 기준을 완화시키기로 했다.
물론 다섯 명도 타이트한 건 마찬가지다.
‘그래도 한 명보다는 나으니까.’
이연은 황이전 PD의 말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부터는 멘탈 싸움이다. 그렇기에 최대한 정신력이 무너지지 않는 쪽으로 사고방식을 유지하는 쪽이 그녀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황이전 PD가 떠난 뒤, 이연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을 하고 있는 멤버들을 모았다.
“무대를 잘하자는 건 당연하고. 실수해도 좋으니까 일단은 최대한 사람들한테 우리가 누군지 모르게끔 정체를 숨겨야 해. 알았지?”
멤버들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받은 표가 낮다고 괜히 기죽을 필요가 없다.
아까도 말이 나온 것처럼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한 팀이 있다 할지라도 그 팀이 누군지 5인 이상 알게 되면 0표가 된다.
역전의 발판은 언제든 마련될 수 있다.
이것이 블라인드 미션의 반전 요소가 될 것이다.
이 반전이 하니엘에게 긍정적으로 작용할지, 부정적으로 작용할지에 대해서는 오롯이 그녀들 하기 나름이다.
평소처럼 멤버들이 손을 모았다.
파이팅 구호를 외치기 위함이었다.
도중에 이연이 은서해와 퍼플피플 댄서들을 응시했다.
“오셔서 같이 파이팅해요.”
“우리들도?”
은서해가 본인과 크루들을 가리키면서 물었다.
그러자 이연은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한 차례 끄덕였다.
“네. 오늘은 저희와 같은 멤버시잖아요.”
청중평가단을 속이기 위한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연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하니엘 백댄서를 담당하고 난 이래로 처음 그녀들과 같은 옷차림을 하게 된 은서해는 멋쩍은 얼굴로 손을 뻗었다.
바글바글한 인원들 속에서 이연은 평소보다 더 힘이 들어간 목소리로 외쳤다.
“하니엘, 퍼플피플! 파이팅!”
“파이티잉!!!”
두 팀의 합심이 어디까지 통할 수 있을지.
그건 이제부터 무대를 통해 확인하면 된다.
* * *
블라인드 미션 무대에 누가 먼저 오를지에 대한 순서는 첫 녹화 때와 마찬가지로 제비뽑기로 정하기로 했다.
각 팀의 리더들이 무대 뒤에 모였다.
제비뽑기가 시작되기 전에 원더존의 윤채미가 제작진한테서 받은 가면을 쓴 채로 이연을 툭툭 건드렸다.
“연아. 어때? 내가 누군지 알아보겠어?”
“응. 보자마자 바로 알겠어.”
“엑! 정말? 그러면 안 되는데.”
가면을 벗은 윤채미의 얼굴에 당혹감이 번졌다.
그녀의 귀여운 반응에 이연은 쓴웃음을 지었다.
“목소리 들으면 바로 알지. 그리고 나한테 ‘연아’라고 부르는 사람은 몇 없으니까.”
하니엘 멤버들을 제외하면 윤채미가 유일했다.
그래서 이연은 가면 뒤로 숨은 얼굴의 정체를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윤채미가 가면을 만지작하면서 혼잣말을 흘렸다.
“조심해야겠네. 사소한 행동이라도 신경 써야겠어.”
“그게 좋아. PD님이 무작위로 사람들 선정해서 앉혔다고 했지만, 거기에 대중가요 전문가가 섞여 있을 수도 있으니까.”
아니면 권민준의 친구이자 자칭 아이돌 박사로 자신을 소개하는 주형운처럼 걸그룹 마니아가 저 속에 있을지도 모른다.
걸그룹에 관심이 많다면, 걸파이트 시즌 2에 참가하는 7개 팀 모두에 대한 정보는 기본적으로 다 숙지하고 있을 테니까.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다고 한들, 그녀들의 정체를 알아맞히는 일은 누워서 떡 먹기보다도 쉬울 것이다.
이연의 충고를 들은 윤채미는 한숨을 꿀꺽 삼켰다.
이 와중에 이연은 다른 팀의 동태를 살폈다.
가장 관심이 가는 팀이라고 한다면 역시 아이비제이 트윙클이다.
리더인 혜원은 다른 팀 리더들과 달리 블라인드 미션 자체를 즐기는 것처럼 가면을 쓰고 스태프들에게 먼저 장난을 거는 여유를 보이고 있었다.
“와앙! 어때요. 저 무섭죠?”
“무서운 게 아니라 귀여운데?”
여성 스태프들이 작게 웃으면서 혜원의 자칭 놀래킴에 대한 소감을 알렸다.
반대로 MAYO의 리더, 미랑은 누구보다도 긴장한 얼굴로 제비뽑기함을 응시하고 있었다.
현저하게 다른 두 팀의 반응을 보면서 이연은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별로 제각기 다른 분위기를 형성하고 있을 무렵, 황이전 PD가 멤버들을 불러모았다.
“자, 순서 정하겠습니다. 먼저 혜원 씨부터 와서 뽑아주세요.”
“네!”
가면을 쓴 채로 제비뽑기함 앞에 선 혜원이 거침없이 박스 안으로 오른손을 불쑥 집어넣었다.
손 안에 가득 들어오는 볼 하나를 꺼낸 혜원은 밝은 표정으로 말했다.
“3번째예요.”
“아이비제이 트윙클, 3번째. 다음은 미랑 씨. 앞으로 나와주세요.”
데뷔 연도에 따라 제비뽑기가 진행되었다.
그러면 이연은 굳이 제비뽑기를 할 필요가 없었다.
어차피 마지막이니까. 남는 순서에 자동으로 배치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MAYO에 이어서 가을소녀, CDP, 샤이걸스, 그리고 원더존까지.
앞선 6개 팀의 순서가 정해졌다.
“그럼 남은 건…… 5번이네요.”
5번째. 미묘한 순서에 배치되었다.
‘그래도 첫 번째보다는 나을지도.’
이연이 생각하는 최악의 순서가 바로 첫 번째였다.
7개 팀의 공연을 보는 거다 보니, 나중에 시간이 가면 갈수록 첫 무대가 생각이 안 날 수밖에 없다.
이런 이유에서 이연은 첫 번째를 안 좋게 보고 있었다.
최악의 번호를 뽑은 당사자는 샤이걸스였다.
그럼에도 리더인 앤서의 표정은 그렇게까지 절망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자세로 일관하고 있었다.
저 자신감의 근거가 어디서 오는 것인지. 이연은 내심 궁금했다.
‘얼마나 대단한 무대를 준비했길래…….’
사실 이 블라인드 미션에서 아이비제이와 더불어서 가장 불리한 팀은 샤이걸스다.
이 블라인드 미션은 팀 컬러가 확실한 팀인 만큼 불리할 수밖에 없다.
노래를 듣자마자 사람들이 ‘아, 이 노래. 그 그룹 아니야?’라는 생각이 바로 들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평상시라면 개성이 강한 무기가 될 테지만. 블라인드 미션 한정으로는 개성이 오히려 독이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발라드와 같은 잔잔한 노래만을 주로 다루는 샤이걸스에게는 최악의 경연 방식인 셈이다.
물론 이를 극복할 만한 방법은 존재한다.
하지만 샤이걸스가 과연 이연이 생각하는 ‘이 방법’을 사용했을지 어떨지는 아직 모르는 상황이다.
‘다른 팀 무대 볼 수 있게 해준다고 했었지.’
음방처럼 대기실에 설치되어 있는 모니터를 통해 무대 상황을 볼 수 있다고 말했었다.
다른 팀들 무대도 궁금하긴 하지만.
‘샤이걸스 무대는 무슨 일이 있어도 꼭 봐야겠어.’
다른 그룹의 무대가 이토록 궁금해진 적은 오랜만이다.
* * *
MC를 맡은 민주린이 기운찬 목소리로 오프닝을 알리는 모습이 모니터를 통해 그대로 비춰졌다.
하니엘 멤버들은 옹기종기 모여서 첫 스타트를 끊게 된 샤이걸스의 무대를 기다렸다.
“선배님들이 어떤 무대를 준비했을까.”
“직접 보면 알게 되겠지.”
“아, 궁금해 죽겠네!”
마치 제 무대인 것처럼 멤버들 모두가 두 손을 꼭 쥐고 모니터를 응시했다.
마침내 무대에 올라선 샤이걸스.
하니엘과 마찬가지로 그녀들 역시 팀 멤버들 숫자를 속이기 위해 댄서 몇 명을 섭외해서 같은 옷을 입게 만들었다.
겉으로 봤을 때에는 하니엘과 같은 7인조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질적인 멤버는 다섯 명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샤이걸스의 무대가 공개되었다.
흘러나오는 노래 전주 부분을 듣는 순간, 이연의 표정이 변했다.
가장 먼저 들린 소리는 바로…….
강렬한 일렉기타의 전주음이었다.
멤버들도 크게 놀랐다.
“선배님들이…… 헤비 메탈 노래를 부른다고?”
미션을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서.
샤이걸스는 자신들의 개성을 버린다는 선택지를 골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