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제47화. 블라인드 미션(2)
이연에게 메인보컬로 지목당한 시우는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 되었다.
“제가요?”
“어.”
랩 담당이 서브보컬도 아니고. 메인보컬을 소화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다.
다른 멤버들 역시 이연의 파격적인 결정에 뭐를 어떻게 말해야 좋을지 판단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당황하는 멤버들을 대표해서 여솜이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말해두는데, 내가 시우를 비하하고 싶어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절대로 아니야. 메인래퍼가 갑자기 보컬 쪽으로 빠져도 괜찮아? 안무를 소화하면서 라이브로 불러야 해서 많이 힘들 텐데.”
여솜이 언급한 우려는 당연한 내용이었다.
시우도 여솜이 이런 생각을 밝힌 것에 대해 불쾌해하거나 그러진 않았다.
심지어 시우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보컬 포지션으로 활약했던 적이 없었다.
그래서 이연의 결정에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연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시우를 지목한 건 아니었다.
“어떤 곡을 고르든 간에 메인보컬 파트가 가장 많잖아. 그걸 시우가 맡는다면, 우리 그룹이 어떤 그룹인지 청중평가단이 바로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아까 여솜이가 말했던 것처럼 공식 무대에서 시우가 래퍼가 아니라 보컬로 나섰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으니까.”
랩과 노래는 소리를 내는 방법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특히 시우의 경우에는 랩을 소화할 때 평소보다 목소리를 더 낮게 까는 편이었다.
반대로 랩이 아닌 노래를 부를 때에는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온다.
이 작은 변화만으로도 청중평가단을 헷갈리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그리고 여기에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첨가된다.
“시우가 저번에 노래 부르는 거 들어봤는데. 잘 부르더라.”
“엥? 정말?”
“시우가 노래를 부른 적 있었어?”
멤버들의 시선이 시우 쪽으로 집중되었다.
자신에게 갑자기 관심이 쏠리자 시우는 적지 않게 당황했다.
다른 것보다도 이연이 시우의 노래 실력이 어떤지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이 더 놀랐다.
“언니가 그걸 어떻게…….”
떠보기 위해서 슬쩍 던져본 말은 아니었다.
이연이 직접 시우의 노래를 듣고 나서 한 말이었으니까 말이다.
컴백을 위해서 한창 두 번째 앨범 작업을 준비 중이던 어느 날의 일이었다.
LC 엔터테인먼트 내에는 소속 아티스트뿐만 아니라 직원들도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오락 시설이 몇 개 설치되어 있었다.
비디오 게임, 다트 등등.
이 중에 노래방 기계도 포함되어 있었다.
녹음실 부스와는 별개로, 길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코인 노래방 같은 느낌으로 한 공간을 꾸며뒀다.
그곳에서 이연은 시우가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는 모습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다.
“코인 노래방에서 너하고 비슷한 목소리가 들리길래. 그래서 혹시나 해서 몰래 확인했는데, 너 맞더라.”
일반 사람들이라면 시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부르는 게 아닐까 하고 가볍게 넘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연은 이 세계로 넘어오기 전부터 지금까지 소리와 관련이 깊은 일을 하다 보니 남들에 비해 예민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시우는 자신이 노래 부르는 모습을 같은 팀 언니한테 들켰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멤버들 앞에서도 노래를 부른 적이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연은 더 의아했다.
“잘 부르는데. 왜 부끄러워해?”
“그게…… 모르겠어요. 랩할 때에는 괜찮은데, 사람들 앞에서 노래 부르면 귀까지 다 빨개져요.”
자기가 랩이 아닌 노래를 부른다는 사실이 영 낯설고, 이 낯선 감정이 부끄러움을 유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연이 ‘잘 부른다’라고 말을 할 정도면, 시우의 실력이 메인보컬로서의 최소 기준치는 넘겼다는 뜻이 된다.
대신에 시우에게는 큰 단점이 있었다.
“저, 노래 부르면 표정 관리가 아예 안 되는데. 그래도 괜찮나요?”
이게 시우가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려고 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였다.
그럼에도 이연은 긍정적으로 답했다.
“오히려 좋지.”
다른 미션의 경우라면 분명 치명적인 단점으로 작용할 것이다.
하지만 이번 블라인드 미션에 한해서는 시우의 이런 노래 습관이 단점으로 지적될 일은 없었다.
이연이 손으로 본인의 작은 얼굴을 가렸다.
“이번 경연은 블라인드 미션이니까.”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고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표정 관리든 시선 처리든. 전혀 상관이 없다.
사람들에게 정체를 들키지 않은 상태로 최선의 무대를 펼칠 것.
이연이 보기엔 시우의 메인보컬 전환이 이번 블라인드 미션의 키 포인트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라면.
시우는 각오를 다지기로 했다.
“네. 해볼게요.”
승리로 향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이 충족되었다.
* * *
시우가 의외의 보컬 솜씨를 지닌 건 맞지만, 그럼에도 세밀하게 다듬어야 할 부분이 보였다.
이쪽은 하니엘의 보컬 트레이닝을 담당하고 있는 나현아가 집중적으로 봐주기로 했다.
여기에 추가로 이연도 메인보컬 포지션을 시우에게 잠시 인수인계를 하면서 그녀가 알아야 할 팁 같은 것들을 몇 가지 전수해 줬다.
랩이 아니라 노래를 부르며 맹훈련에 임하는 시우.
그녀의 모습이 다른 멤버들에게는 너무나도 낯설게 느껴졌다.
“근데 시우가 진짜 노래 괜찮게 부르네.”
“그러게. 난 처음에 연이 언니가 거짓말하는 줄 알았었는데.”
“저 정도면 서브보컬로 들어가도 괜찮지 않아요?”
멤버들의 찬사가 이어졌다.
칭찬이 거듭되면 거듭될수록 시우의 얼굴은 잘 익은 사과 색상으로 변했다.
이연이 멤버들에게 ‘쉬잇’ 하는 제스처를 취하면서 괜히 시우에게 부담 주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다.
시우가 본 무대 때 어떻게 실력을 발휘하느냐. 여기에 따라 하니엘이 청중평가단으로부터 얼마나 높은 점수를 받을 수 있을지 결정될 것이다.
시우도 시우지만.
걱정되는 요소는 또 하나 더 있었다.
유키가 직접 이 요소에 관해 언급했다.
“연이 언니는 어떻게 하실 거예요? 사람들이 연이 언니 목소리는 듣자마자 바로 알 것 같은데.”
워낙 유명한 목소리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하니엘의 시그니처나 다름없었다. 이렇다 보니 대중가요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거나 아니면 걸그룹 노래를 평소에 자주 접했던 일반인이라도 단박에 이연의 노래는 알아차릴 것이다.
시우가 얼마나 잘하느냐보다, 멤버들은 이연이 과연 정체를 잘 숨길 수 있을지가 더 걱정이었다.
시우나 멤버들이 아무리 열심히 무대를 펼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할지라도 청중평가단이 하니엘의 정체를 알아맞히면 0점 처리되기 때문이다.
하니엘의 존재를 꼭꼭 숨기는 일 역시 무대를 준비하는 것 못지않을 정도로 중요하다.
시우에게 메인보컬 자리를 양보했으니까.
이연이 랩 쪽으로 빠지면 되지 않을까 하는 이야기도 나왔었다.
그러나 하니엘이 선곡한 ‘나란히’란 노래는 애초에 랩 파트가 없는 곡이다.
결국은 이연이 서브보컬로 빠져야 한다는 소리인데.
그래서 더 걱정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서브보컬이라 할지라도 노래를 부르는 순간 사람들의 의심을 받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이연이 확실히 말해줄 수 있었다.
“괜찮아. 안 들켜.”
그러나 멤버들은 이연의 이 호언장담을 쉽게 믿지 못했다.
“어떻게요?”
“나라면 연이 목소리 들으면 바로 알 거 같은데.”
이연은 불안해하는 멤버들을 안심시켜주기 위해 몸소 시범을 보여주기로 했다.
아아아.
그녀가 목소리를 가다듬을 때마다 멤버들의 표정이 바뀌었다.
처음에는 ‘연이 목소리네’였다가, 시간이 지날수록 ‘어……?’ 하는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면 됐다 싶을 때.
이연이 이번 블라인드 미션에서 소화할 파트를 직접 부르기 시작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을 때.
우리가 봤던 풍경이
내 마음속 그림으로 남아 있어.
Remind me.
담담한 표정으로 부르는 노래에 멤버들은 귀를 의심했다.
“방금…… 연이가 부른 거 맞지?”
“마, 맞아요.”
“다른 사람이 불렀던 거 녹화해서 몰래 튼 거 아니야? 연이 목소리가 아닌데?”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많이 이연의 노래를 들었던 멤버들조차도 지금의 목소리가 이연의 것이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마법을 이용해서 아예 다른 여성의 목소리로 변조를 시킨 거였다.
예전에 음유시인으로 무대에 섰을 당시, 이중인격 캐릭터를 연기한 적이 있었다.
관중들에게 A라는 캐릭터와 B라는 캐릭터가 서로 완전히 다른 인격임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연은 일부러 목소리 변조 마법을 익혔다.
덕분에 무대에 서서 관중들로부터 상당한 호응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멤버들한테 마법 덕분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농담하지 말라는 소리를 들을 게 뻔했기 때문이다.
“발성하고 어조 좀 바꾸고. 그러면 금방 다른 목소리를 낼 수 있어.”
다시 원래의 목소리로 돌아온 이연이 어떻게 해서 목소리를 완전히 변조시킬 수 있었는지 설명…… 아니, 변명을 둘러댔다.
지금까지 이연이 보여준 능력들이 상당히 많지만, 그중에서도 이 목소리 변조 능력이 가장 놀라웠다.
비아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이연을 향한 존경심을 드러냈다.
“연이 언니는 진짜 못하는 게 없네.”
“노력하면 다 할 수 있어.”
마법을 터득하기 위한 노력만 있으면 된다.
물론 이들에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 * *
‘나란히’란 노래를 부른 걸그룹, 러빙유는 하니엘과 다르게 9인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7인조인 하니엘보다 2명이 더 많았기에 남은 인원은 퍼플피플 댄서들 중에서 스카우트하기로 했다.
그중 한 명이 은서해였다.
댄서들이 은서해를 향해서 하니엘 멤버들이 몰랐던 사실을 흘렸다.
“팀장님, 예전에 아이돌 되고 싶었다고 하셨잖아요. 꿈 이루셨네요.”
“축하드려요, 팀장님!”
댄서들이 환호를 하자, 은서해가 민망함에서 우러나온 화를 냈다.
“내 나이에 이제 와서 무슨 아이돌이라고. 얼굴 가리고 하는 거 아니었으면 맡지도 않았어.”
“그래도 기분 좋으시면서.”
“맞아. 어제 친구들한테 막 자랑하셨잖아요. 저희가 통화하는 거 몰래 들었어요.”
여기저기서 목격담이 이어지자, 은서해는 마치 시우처럼 달아오른 얼굴을 애써 감췄다.
“시끄럽고! 아무튼 이틀 뒤에 바로 무대 가져야 하니까 연습부터 하자. 너희도 준비됐지?”
휴식을 마친 하니엘 멤버들이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은서해가 미리 준비한 가면을 그녀들에게 건넸다.
“오늘은 실전처럼 가면 쓰고 연습해볼 거야. 실제로 무대에서 이거 쓰고 한다고 하니까 미리 적응해둬.”
“이걸요?”
검은색으로 잔뜩 칠해진 가면 하나.
하니엘과 은서해, 그리고 다른 한 명의 댄서가 쓸 가면 모두가 동일한 디자인을 취하고 있었다.
먼저 가면을 써본 이연은 쯧 하고 짧게 혀를 찼다.
가면을 쓰고 무대를 펼칠 거라는 말을 들었을 때부터 예상했던 거긴 하지만.
‘생각보다 시야가 많이 좁아지는데.’
좌, 우로 눈동자를 돌릴 때 가면으로 인해서 제약이 발생했다.
사각지대가 크면, 그만큼 동작을 취하다가 서로 부딪치는 실수가 자주 발생할 수 있다.
얼른 이 시야 폭에 적응해야 한다.
이것이 멤버들에게 주어진 또 다른 미션이었다.